국제기념일
5월 1일, 노동절 (勞動節, Labor Day, May Day)
노동절 (勞動節, Labour Day, Labor Day) 또는 메이 데이(May Day)는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하고 안정된 삶을 도모하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한다. 1886년 5월 1일 미국의 총파업을 노동절의 시초로 본다. 1889년에 제2인터내셔널은 5월 1일을 노동 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고,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8시간 노동 쟁취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미시건 거리에서 파업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집회를 연 이유는 장시간 노동에 대항하여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지만, 경찰과 군대의 발포로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고, 결국은 자본가들은 단결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당시 시카고 데일리 뉴스에서는 공산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며, 이들을 공산주의자 취급했으나 당시 미국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은 의식화된 사회주의자들의 쟁투이기 이전에, 장시간 노동을 극복함으로써 사람답게 살고자 한 노동자들의 단결투쟁이었다.
미국 노동 운동은 자본가, 정부, 자본가와 결탁한 보수언론들의 탄압과 색깔론을 주장하는 왜곡 보도가 증가되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나, 8시간 노동이라는 노동인권을 단결투쟁으로써 쟁취했다는 의미가 있는 노동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노동절
20세기 초부터 미국 정부가 매년 5월 1일이 사회주의의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노동절을 9월 첫 번째 월요일로 바꿔 놓았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 시기인 1923년부터 노동절 행사가 조선노동총동맹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독립 직후에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시점인 1945년 결성된 전평과 1946년 결성된 대한노총이 1946년에 각각 노동절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미미하지만 세계 노동절에 맞추어 행사하고 투쟁하던 것을, 이승만 정권 때 공산당의 선전도구로 이용된다며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노동절 날자를 옮기더니, 박정희 정권 때에는 그마저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1989년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1994년 부터 5월 1일로 다시 바뀌었지만 이름은 아직 노동절로 변경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는 1958년 이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으며, 1963년 4월 17일에는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이 1973년 3월 30일에 제정·공포되었으며, 1994년 다시 5월 1일로 바뀌었다. 노동절은 근로자의 날로서 노동자의 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급휴가로 인정된다. 하지만, 이주공동행동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절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다고 밝혔다.
한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주요 명절 중 하나다.
노동절의 유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의 역사는 피의 역사이고 인민대중의 자유의 신장은 권력자들의 배려와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로 물든 투쟁에 의해 한발 한발 전진해 오고 있슴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현재 과학기술이 발전되고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점점 그 설 자리가 잃어가고 있다.
청년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취직을 못하고, 대부분의 단순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 기대어 살고 있다.
노동의 양극화 현상도 심해진다.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인간 노동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운전직을 시작으로 의사, 교사, 판사, 변호사, 경찰, 군인, 요리사, 단순 노무직, 전문 노동자 순으로 직업 붕괴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인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5월 1일 노동절에 인류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부록: 헤이마켓 사건 (Haymarket affair) / 헤이마켓 폭동 (Haymarket riot) 개관
헤이마켓 사건 (Haymarket affair) 또는 헤이마켓 폭동 (Haymarket riot)은 1886년 5월 4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시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진행되던 노동시위 와중에 벌어진 폭탄투척 사건과 그 결과 일어난 폭력사태이다. 애당초 시위는 그 전날 경찰에게 살해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 참여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평화 행진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경찰이 그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신원불명의 누군가 다이너마이트를 경찰 쪽으로 던졌다. 폭탄 폭발과 뒤이은 발포로 인하여 경찰 일곱 명과 민간인 네 명 이상이 죽었고, 숱한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무정부주의자 여덟 명이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기소 증거는 피고 중 한 명이 폭탄을 만들었을 수 있다는 것 뿐이었고, 실제 그들 여덟 명 중 아무도 폭탄을 던지지 않았다. 피고 중 일곱 명에게는 사형이, 나머지 한 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사형수 중 두 명은 일리노이 주지사 리처드 오글스비가 종신형으로 감형해 주었고, 한 명은 교수대로 끌려가기 전에 자살했다. 나머지 네 명은 1887년 11월 1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1893년 신임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올트겔드는 그때까지 살아있던 피고들을 모두 사면하고 재판을 비난했다.
헤이마켓의 순교자중의 한명이자 독일계 이주노동자인 아나키스트 아우구스트 스피-스(August Spies)는 그의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를 목매달음으로써 노동운동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궁핍과 고통 속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해방을 고대하는 수백만 임금 노예의 노동운동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릴 처형하라! 당신들은 지금 불꽃 하나를 밟아 끄고 있지만, 여기 저기서, 당신들 뒤와 앞에서 어디서든 불꽃은 다시 피어오를 것이다. 이것은 지하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다. 당신들이 밟고 있는 대지 자체가 불타올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헤이마켓 사건은 국제노동절의 유래가 된 중요 사건으로 생각된다. 사건 발생 장소는 1992년 시카고 시장이 결정하는 사적지 (Landmark)로 지정되었고, 2004년 그 자리에 조각상이 설치되었다. 또한 억울하게 사형당한 이들의 무덤에 헤이마켓 순교자 기념물이 세워졌고 1997년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노동연구가 William J. Adelman 교수에 따르면, “일리노이 주는 물론,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역사상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보다 노동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사건은 없었다. 사건은 1886년 5월 4일의 시위로 시작되었으나, 그 결과는 지금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헤이마켓 시위는 미국의 역사 교과서들에 실려 있지만, 그 중 사건을 정확하게 서술하거나 그 중요성을 포착한 사례는 거의 없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