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11월 4일, 무굴 제국의 6대 황제 아우랑제브 (Aurangzeb, 1618 ~ 1707) 출생
아우랑제브 (Aurangzeb, 알술탄 알아잠 왈 카칸 알카람 아불 무자파르 무휴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 바하두르 알라기르 1세 파드샤 가지, 1618년 11월 4일 ~ 1707년 3월 3일)는 무굴 제국의 6대 황제(1658년 ~ 1707년)였다.
악바르의 증손이며 샤 자한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뭄타즈 마할이다.
또한 그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의 인도에서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 아우랑제브 (Aurangzeb)
.휘: 무히웃딘 무함마드 아우랑제브 (페: محی الدین محمداورنگزیب)
.출생: 1618년 11월 3일, 무굴 제국 다호드 (오늘날의 인도)
.사망: 1707년 3월 3일, 무굴 제국 아마드나가르 (오늘날의 인도)
.능묘: 아우랑제브 묘지
.왕조: 티무르조
.부모: 부) 샤 자한, 모) 뭄타즈 마할
.배우자: 디를라스 바누 베굼, 나와브 바이, 아우랑가바디 마할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 제6대 무굴 바드샤
.재위: 1658년 7월 31일-1707년 3월 3일
.대관식: 1659년 6월 13일 델리
.전임: 샤 자한 에아잠 / 후임: 아잠
학식이 풍부하여 아라비아어 · 페르시아어 등에 능통하였으며, 이슬람 신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와의 왕위 다툼으로 아버지 샤 자한을 감옥에 가두고 즉위하였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의 신자로 ‘살아 있는 성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엄격한 종교 생활을 강요하였으며, 마라타 족을 평정하지 못하고 죽어 무굴 왕국이 쇠퇴하게 되었다.
○ 생애 및 활동
– 즉위 이전
그는 일찍부터 군사와 통치에 자질을 보였는데, 이 재능이 권력욕과 결부되어 맏형인 다라 시코와 대적하게 되었다. 1636년부터 그는 중요한 지위에 임명되기 시작했으며, 임무 수행에 두각을 나타냈다. 우즈베크·페르시아와의 싸움 (1646 ~ 47년)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공훈을 세웠다. 데칸 지방의 부왕(副王)을 2번 지낼 때는 (1636 ~ 1644년, 1654 ~ 1658년) 데칸의 두 이슬람 왕국을 정복한다. 1657년 부터 1658년까지의 권력 투쟁에서 아우랑제는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고 1658년 5월 사무가르에서 다라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승리자가 된 뒤, 아버지가 세운 아그라 궁에 아버지를 유폐하고 황제로 즉위하지 못했다고 한다.
– 치세 초기 (1658 ~ 1680)
1680년까지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능한 군주였다. 무자비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 했지만, 그의 정열과 능력 때문에 존경 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그는 주로 페르시아인이나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로부터 북서부 지방을 방어하는 데 몰두했고, 그외에 수라트 대항구를 2번씩이나 약탈한 (1664년, 1670년) 마라타 수장 시바지 에게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상대방을 쳐부순 다음 화해하고 그들에게 제국의 임무를 부여하는 방식을 썼는데, 시바지를 패배시킨 뒤 화해를 위해 1666년 그를 아그라로 불렀고 제국의 직위를 주었지만, 시바지는 그 뒤 데칸으로 도망하여 독립된 마라타 왕국을 세우고 군주가 되었다가 1680년 죽었다.
– 치세 후기 (1680 ~ 1707)
그러나 1680년 이후부터 아우랑제브는 통치 태도와 정책을 바꿨다. 그가 이슬람만을 위한 통치자로 변신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힌두교도들은 동료가 아니라 종속자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악바르가 폐지했던 인두세 (지즈야)가 1679년부터 비 (非)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부과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우랑제브의 셋째 아들 악바르는 아버지를 배신하였고 (라지푸트 반란, 1680 ~ 1681년), 힌두교도들 역시 제국을 섬기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열성적이지는 않게 되었다.
그는 비자푸르와 골콘다의 데칸 왕국들을 1686년 ~ 1687년 사이에 정복했지만 오히려 뒤이은 불안상태만을 초래했고 이런 불안한 상황은 오랜 경제 위기를 더욱 재촉하고 말았다. 이러한 경제 위기는 마라타와의 전쟁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시바지의 아들 삼바지는 사로잡혀 1689년 처형되었고 왕국은 멸망했으나, 이 때부터 마라타족은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고 민중들의 동조 속에서 남인도 전역으로 퍼졌다. 아우랑제브는 이 때문에 마라타 고지대 국가들의 요새들을 공략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아우랑제브는 남부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에 북부지역을 이전처럼 강력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토지세입의 일부를 할당받는 무굴 제국의 관리들이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했기 때문에 통치력의 약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농민의 불만은 펀자브 지방의 사트남파와 시크교도의 경우 같은 종교운동 형태나 자트족의 반란 등의 봉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에 1675년 아우랑제브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시크교 구루 (정신적 지도자) 테그 바하두르를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후계 구루들은 아우랑제브의 나머지 치세 동안 공개적으로 저항을 계속했다.
그는 호전적인 정통 수니파 이슬람교도로서 통치했고 무흐타시브라고 불린 도덕 검열관들에 의해 강요되는 엄격한 법령들을 점차 시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주화에 새겨진 모든 이슬람교 신앙고백 구절은 이교도의 모독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거했고 조정의 신하들에게는 힌두식 인사법을 금지했으며 힌두교의 우상·사원·성지는 마구 파괴되었다.
거의 49년간 통치한 뒤 아우랑제브가 죽었을 때, 제국은 수많은 치명적인 문제에 직면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가 일으켰던 마라타 소탕작전은 제국의 재원을 지속적으로 고갈시켰고 시크교도와 자트족의 호전성은 제국 북부에 어두운 전조를 드리웠다. 또한 새로운 이슬람 정책은 힌두교도의 감정을 손상시켰고 라지푸트족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게다가 토지에 대한 재정적인 압박은 전체 행정체계를 왜곡했다. 결국 그의 후계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자 제국은 붕괴되었다.
– 죽음과 불행한 가정사
아버지 샤 자한을 폐위시키고 유폐한 후 형제들을 죽인 탓인지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랑 형제들은 물론 자녀들과도 관계가 좋지 못했고 그의 자녀들은 아우랑제브를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특히 차남 무아잠은 1670년 첫 반란을 모의했다가 들통난 후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았지만 그 뒤에도 세 번이나 반란을 모의해 네 번째 반란 때에는 아우랑제브도 참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가둔 후 더울 때라도 냉수를 제공하지 말고, 좋은 식사도 제공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7년여 간을 감옥에서 죄수로 복역하던 무아잠은 아버지에게 또다시 용서를 받고 1695년 풀려나 아버지의 감시가 있긴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그 후 그는 제국의 서북 변경지대 카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재임 중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 무아잠은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남은 형제들을 모두 죽인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다섯 번째 아들인 악바르는 1681년 라지푸트와 손을 잡고 반란을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난 후 데칸으로 도주해 마라타 왕국의 왕 샴바지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최악의 악바르’라 부르며 군사를 모아 마라타 왕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샴바지 왕을 포로로 잡아 잔인하게 고문한 끝에 죽였으나 악바르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도주한 악바르는 페르시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던 중 사망했다.
장녀인 제브니사 공주는 동복동생인 악바르를 지지했는데 아우랑제브 황제는 제브니사가 반역자인 악바르와 연락했다는 것에 분노했고 그녀의 재산을 몰수한 다음 델리 외곽의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20여 년간 세상과 격리된 채 지내면서 마크피 (숨겨진 자)란 필명으로 수백 편의 수피 전통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기 5년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시는 1929년 델리에서 출간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사망하기 전 아들 세 명에게 제국을 삼등분해서 다스리라고 유언을 남겼고 파디샤 (황제) 자리는 장남 아잠 샤에게 넘겼으나 앞서 말했던 차남 무아잠이 모든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 평가
아우랑제브 개인은 독실한 무슬림이자 뛰어난 학식과 군사적 재능을 지닌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치세 후반기에 들어가며 국가경영과 자신의 종교관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 최대 실책이라 평해진다.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 주요 종교들 외에도 지역별로 군소 종교와 기독교, 심지어 소수의 유대인들까지 온갖 종교와 문화가 난립한 땅이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제위 후반기의 벌인 지나친 이슬람 우위 정책으로 제국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선제들의 노력을 무너뜨려버렸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 강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폭정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궁정 내에서 ‘무타시브 (이슬람 율법)’ 강요 및 힌두교식 인사법 금지와 제국 각지의 비 이슬람 종교 시설의 파괴, 비 무슬림 관료들에 대한 차별과 이유 없는 해고를 일삼았다. 이에 이슬람 학자들과 신자들은 ‘이슬람 성군이 탄생했다’며 칭송했지만,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은 끝없는 반란과 재정 파탄으로 멸망 직전에 몰려있었다. 이를 아우랑제브의 차남 바하두르 샤 1세가 어느 정도 수습했으나 즉위 5년 만에 급사하여 이후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껍데기만 남아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또한 아우랑제브의 즉위 명분이었던 ‘선제의 폭정으로 인한 재정 파탄’은 아우랑제브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들고 일어난 반 무굴 세력과 제위 초부터 끝없이 이어져 오던 전쟁 및 해이해진 관료 기강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수 배는 더 심하게 답습하였다. 그럼에도 당대 무굴 제국의 역량 자체는 훌륭하여 아우랑제브 치세에는 연 세입이 약 3억 900만 루피에 달했고, 사망시 아그라의 중앙 은행에는 2억 4천만 루피의 돈이 남아있었다.
이외에도 군사적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개인의 무력 면으로는 황자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군영에 대형 전투 코끼리 하나가 난입해오자 혈혈단신으로 말에 올라타 장창으로 코끼리를 죽여 ‘용사’라는 뜻을 가진 ‘바하두르 (Bahadur)’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전술 · 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물론 군행정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화약 무기 도입, 군 조직 체계화, 병과의 유기적 연계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아우랑제브 시기 무굴 제국의 군사력은 정점에 달했다고 평해진다. 다만 무굴 제국군이 정점에 달하는 이 시기에도 연간 1백만 루피의 세금을 창출하던 무굴 제국의 대표적인 무역항인 수라트가 마라타 동맹의 지도자인 시바지에게 함락되어 6일 동안 계속된 약탈은 무굴 제국의 세금 수입에 치명타를 입혔다. 대대적인 약탈의 와중에 멀쩡했던 이들은 영국인과 포르투갈인들이었는데 시바지는 이들에게 무리하게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당시 인도의 군사 기술력과 인프라는 유럽 문명과의 활발한 인도양 무역과 교류를 통해 상당한 발전을 이루면서 유럽의 성형 요새와 유사한 구조의 대포병 요새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군대들이 겪었듯이 이런 포격에 강한 낮고 두꺼운 방벽에 사각이 안 생기는 공간 디자인, 대규모 요새포 운용이 가능한 본격적인 요새 하나에 마주치면 무굴 제국의 군대도 몇개월이고 힘겨운 공성전 상황이 연출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아우랑제브는 비자푸르, 골콘다 같은 이런 대규모 공성전에 몇 차례나 직접 개입하면서 전황을 타개하고 무굴 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군사 기술이란 측면에서도 동시대 유럽, 오스만 제국과 교류하며 지속적으로 기술자, 고문들을 초빙하고, 당시 기술로서 최첨단인 조병창, 탄약 공장을 짓고 여전히 기마 귀족층의 기마 궁시가 중요했던 무굴 제국의 군대에 화약 전담 보병들인 총병대랑 포병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배치하는 등 세계적 트렌드를 잘 인지하고 있는 유능한 군사행정가였다. 개인의 무력으로나, 장군으로나, 군주로나 군사적인 능력에서는 공헌이 크지만 정치, 종교적 문제에서 오히려 스스로 실점하는 인상이 강하다.
오늘날 인도 역사에서 아우랑제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15년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우랑제브의 이름을 딴 ‘아우랑제브 로’가 많은 사람들의 비판으로 인해 지워지고 그 자리엔 인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압둘 칼람의 이름이 붙었다. 2014년 인도 공화국의 다수 여당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인도 인민당은 아예 아우랑제브에 이어 무굴 제국 자체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악평은 19세기 인도에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의 인도 작가 반킴 찬드라는 자신의 소설 『라즈싱하』에서 아우랑제브 황제가 힌두를 증오하려고 태어난 인물로 묘사하였다. 영국 지배자들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의 통치와 비교하며 힌두를 차별한 아우랑제브는 폭군이었다고 평가했고 이 평가는 후대로 그대로 이어졌다.
아우랑제브가 조상인 악바르 대제처럼 포용력이나 정치적 유연성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비관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힌두 귀족의 수는 그의 치세에 오히려 증가하였는데 아우랑제브 이전엔 힌두교도가 귀족의 20%를 차지했지만 그의 재위 시절엔 그 비율이 30%에서 절반 가까이로 늘었다. 무슬림 귀족들은 이런 힌두교도 우대에 아우랑제브에게 따졌으나 그는 “그대들의 종교는 그대들의 것이고, 내 종교는 나의 것”이란 말로 듣지 않았다.
사실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이란 측면도 시크교 구루 살해, 바라나시 강제 개명 시도 같이 해당 종교의 지도자급 인물이나 성지에 대한 정치적 박해 중심이지, 아예 사회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 신도들을 강제 개종, 박멸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악명 높은 힌두교 사원 파괴 사건들도 주로 정치적 반란이나 불온함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고, 반대로 아우랑제브 치세의 후원으로 인해 융성해진 힌두교 사원들도 있다. 게다가 독실한 무슬림을 표방한 것치고 그가 상대한 적들 중 많은 수가 데칸 술탄국의 같은 무슬림 군주들이었고, ‘아우랑제브의 악행’으로 기억되는 큰 사건들 중 하나인 골콘다 약탈과 모스크 파괴도 같은 무슬림 상대로 저지른 것이다. 즉, 아우랑제브가 종교 불문한 정치적 독단성과 무자비함으로 적을 많이 만든 건 사실이라도, 특별히 종교적으로 불관용과 독선의 화신이었다는건 후대 19세기 인도 자체와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과장된 인식이 20세기 들어와 힌두교 다수 인도 vs 무슬림 파키스탄이라는 정치적 구도 속에 재생산되면서 생긴 왜곡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무슬림이었는데다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온 강직하고 엄격한 무골이기도 했던 아우랑제브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민법 강화와 민간에서의 혼합종교적 (syncretic) 풍습에 대한 탄압 등으로 기본적으로 전임자들보다 종교적으로 더 엄격한 사회를 지향했던건 사실이나, 힌두교 음악과 제례에 대한 전면적 탄압 같은 에피소드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게 현대 무굴 제국 사학계의 평가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는 완고해졌는데 힌두교에게 관세를 무슬림들에 비해 두 배나 올렸고 1679년에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 모든 타 종교인에게 인두세를 징수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힌두교도와 타 종교인들의 반발이 커졌고 나중에는 그들의 증오를 받는다. 게다가 이렇게 거둔 세금의 대부분이 국고에 보태지기보다는 세금 징수인들의 잇속을 채우거나 아우랑제브가 벌이는 전쟁 비용으로 소모되는데 그쳤다. 급기야 델리의 힌두교도들이 금요 사원으로 행차하는 아우랑제브의 행진을 가로막았는데 이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코끼리에게 사람이 짓밟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는 힌두교도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인두세로 인한 폭동과 반란이 계속되자 아우랑제브도 인두세를 축소해야 했다.
○ 기타
한때 아우랑제브는 바미안 석불이 우상이라며 파괴하려 했으나, 당대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조부 셀림은 ‘자한기르’, 아버지 후람은 ‘샤 자한’이라는 페르시아식 왕호로 불리는 데에 비해 아우랑제브는 ‘알람기르 1세’라는 왕호가 있음에도 주로 본명으로 불린다.
1961년 아서 C. 클라크가 그레이트베이시스리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침몰선을 보고, 거기에서 은주화를 발견하는데, 이 배가 샤 자한의 전설의 보물선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 배는 타지마할을 장식하기 위해 수많은 보석을 옮기게 했는데, 침몰해버렸다고 사람들이 추측했다. 그의 친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샤 자한의 보물선을 찾았지만 보석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이 배가 샤 자한의 보물선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3년 동안 발굴한 후 1964년에 자신이 발견한 배가 무굴 제국의 배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 안에는 100개의 주화만 있었지 보석이나 금괴는 없었고, 자신이 발견한 배가 샤 자한이 아니고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 1세의 배였다고 주장했다.
아우랑제브의 첫째 황후의 무덤은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비비 까 마끄바라 (Bibi Ka Maqbara)이다.
그 외에도 해적인 헨리 에이버리가 그의 제위 시기에 무굴 제국 소속인 메카 순례선을 약탈해 거부가 됐다 (2010년 기준 5,200만 파운드에 해당). 이에 아우랑제브가 분노하여 영국과 무굴 제국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