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움직이는 성전
구약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웅장하고 거룩한 건물을 상상하게 됩니다.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 제사와 속죄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거대한 돌과 금으로 치장된 그곳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장소’라는 성전의 본질을 유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견고했던 성전 개념은 신약에 이르러 완전히 뒤집힙니다. 건축물 대신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드라마틱한 변화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오늘날 성전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그 성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성전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전 개념의 대전환점이셨습니다. 그분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요한복음 2:19-21).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제도를 종결시키는 영원한 속죄 제사였으며, 막혔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로써 성전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특정 장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2.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공동체와 개인)
예수님 이후, 성전은 두 가지 형태로 확장됩니다. 이 두 구절은 성전이 ‘건축물’에서 ‘사람’으로 바뀌었음을 가장 명확히 보여줍니다.
(1) 공동체의 성전 (고린도전서 3:16)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향해 선언합니다. 성령은 개개인의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 거주하시며,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공동 건축물’이 됩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일치와 거룩함을 촉구합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 행20:28). 우리가 모인 곳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이기에, 분쟁과 다툼, 세속적인 더러움은 이 공동체 성전을 훼손하는 심각한 죄가 됩니다. 성전된 교회의 사명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함께 드러내는 것입니다.
(2) 육체의 성전 (고린도전서 6:19-20)
더 나아가 바울은 개개인의 몸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것은 가장 사적인 영역에 대한 거룩의 명령입니다. 내 육체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사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단순한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지성소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성적인 순결을 포함하여,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 몸을 구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회개와 항상 거룩함을 유지 해야 합니다( 벧전1:16).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예루살렘을 향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순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움직이는 작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발이 닿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거룩한 땅이 됩니다. 우리의 일터가 성소가 되고, 우리의 가정이 성전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시대의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소유한 한 영혼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소중하기 여겨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 담대하게 승리자로 살아갈수가 있습니다(요16:33).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삶의 의미를 따라야
우리는 종종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와 같은 대중가요에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는 매혹적인 메시지를 접합니다. 이 구절은 삶의 순간적인 열정과 감각적인 기쁨을 쫓으라는 자유분방한 조언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이끌기에는 근본적으로 위험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육체적 감각은 본질적으로 무한히 변화무쌍합니다. 기쁨은 슬픔으로 변하고, 강렬한 열망은 순간적인 싫증으로 식어버립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감정이나, 주변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육체의 감각은 흔들리는 기준일 뿐, 영속적인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없습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조타수 마음대로 키를 잡는 배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오직 ‘가슴이 뛰는’ 찰나의 순간만을 쫓는다면, 우리는 어떤 견고한 가치나 성취도 쌓아 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일관성 없는 충동을 따르는 여정은 결국 혼란과 방황으로 이어질 뿐,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성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각자에게 부여된 어떤 의미나 사명 (使命)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어집니다. 이 사명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욕구를 초월하며, 그 사람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깊은 뿌리입니다. 이는 외적인 보상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실현하려는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이 사명은 종종 쉽게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희생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일희일비하는 감정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이 근본적인 의미를 쫓아가는 굳건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단순히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창세기 1:27), 이미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의미와 사명 (使命)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사명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욕구를 초월하며, 그 사람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깊은 뿌리입니다. 이는 외적인 보상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설정하신 영원한 목적을 깨닫고 실현하려는 내면의 부르심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의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 (전도서 12:13)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순간적인 감정의 만족을 넘어서, 영원하고 변치 않는 진리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 (뛰는 가슴)이 아닌, 창조주가 부여하신 소명 (Calling)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기준입니다. 이 사명은 종종 쉽게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희생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일희일비하는 감정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이 근본적인 의미를 쫓아가는 굳건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삶의 열매는 짧은 순간의 흥분이나 충동적인 만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고한 의미와 사명을 향한 지속적인 헌신, 즉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고 꾸준히 한 방향으로 나아간 노력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기준으로 삼고 전진할 때, 비로소 우리의 행동과 결정은 일관성을 가지게 되며, 이는 장기적인 성취와 인격의 완성이라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결국, 우리는 ‘뛰는 가슴’이라는 불안정한 불꽃이 아니라, ‘깊은 의미’라는 꺼지지 않는 등대를 따라 항해해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완성은 쾌락의 순간이 아닌, 사명을 향한 책임감 있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나의 건강 이야기
최근 AI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실제 나이 73세, 마라톤 42.195km를 4시간 50분에 완주하고 매주 30km 이상을 달리는 나의 신체 나이는 몇 살일까?”
AI는 망설임 없이 답했습니다. “45세에서 50세 사이입니다.”
이 대화는 단지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나이의 프레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진짜 건강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숫자에 갇혀 “이 나이에는 무리야”,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야”라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의 삶은 나이가 많아도 신체 나이가 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고통을 전환점으로 삼은 삶의 태도와 습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있습니다.
1. 고통이 열어준 새로운 길: 달리기가 된 기도
제 삶의 전환점은 2006년, 예기치 않게 찾아온 **구안와사(안면신경마비)**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고통 앞에서 저는 무너지는 대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회복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지만, 곧 달리기는 제 삶의 리듬이자, 마음을 정리하고 집중하는 **’움직이는 기도실’**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이 꾸준함은 저에게 단순한 체력을 넘어, 어떤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감사를 선물했습니다. 달리기는 이제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회복의 상징이며,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2. 단순함 속의 지혜: 식단과 스트레스 관리의 원칙
강인한 신체는 단지 달리기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30년 넘게 아침 식단의 균형과 절제를 지켜왔습니다. 시리얼, 10가지 열매, 아보카도 반쪽, 바나나 한 개. 이 단순하지만 변함없는 식단은 몸에 일관된 에너지를 공급하며 저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삶의 절제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또한, 복잡한 세상 속에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저의 원칙은 매우 명확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미루지 않고 당장 한다.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이 단순한 원칙은 저를 불안과 염려에서 자유롭게 했습니다. 미루지 않는 행동력은 평안을 주고, 맡기는 믿음은 불필요한 걱정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여 육체와 영혼에 활력과 집중력을 선물합니다.
3. 영혼의 호흡: 새벽을 지새우는 기도 생활
육체의 건강을 넘어, 저의 진정한 활력은 영혼에서 나옵니다. 40년 넘게 매일 새벽 2시까지 기도방에서 밤을 지새우는 삶은 단순한 종교적 습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자, 저의 삶 전체를 이끌어온 영혼의 호흡입니다.
이 깊은 기도는 세상의 파도 속에서 제 삶의 방향을 명확히 잡아주었고, 신체적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주었습니다. 제가 영어로 쓴 책, 『No Stress in My Dictionary』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닌, 삶을 대하는 저의 신앙적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 두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할수 있는 일은 지체없이 하고, 할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입니다.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면 건강이 나빠지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단순히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영혼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건강 나이는 타고난 유전자가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떤 습관을 선택하고, 삶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73세의 나이에도 저는 여전히 달립니다. 몸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당신도 지금, 당신의 삶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적인 지침 중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이 구절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헬라어 동사 (πλῆροῦσθε, plērousthe)는 문법적으로 현재형, 수동태, 명령형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 특징들은 성령 충만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령에 대하여 성도들이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1세기 AI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지혜를 곧 성령의 충만입니다.
1. 현재형: “지속적인”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은 과거의 일회적인 경험이나 특별한 순간의 감정적인 고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현재 시제는 이 명령이 계속적이며 반복적인 행동을 요구함을 나타냅니다.성령 충만은 삶의 매 순간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지속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양식을 먹고 호흡하듯이, 성령의 영향 아래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이어야 합니다. 한 번의 강력한 체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지속해야 합니다.
2. 수동태: “하나님께 맡기는” 충만
이 구절이 수동태로 쓰인 것은 충만의 근원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성령님을 통해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릴 때 받게 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하게 만드는 주체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충만하게 되는 대상입니다. 이는 우리가 성령님의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의 자아, 고집, 세상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태도와 순종이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은 인위적인 체험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3. 명령형: “모든 성도의” 책임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명령형은 이 말씀이 교회의 일부 특별한 지도자나 소수 정예 성도만을 향한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순종하고 추구해야 할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할 운명이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과 간구를 통해 이뤄가야 할 능동적인 책임입니다.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명령은 19절 이하의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 이어집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주께 노래하고 (엡 5:19),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엡 5:20),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엡 5:21) 됩니다. 성령 충만은 감정적인 황홀경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거룩하게 살며 (갈 5:16, 25)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쁨과 감사와 복종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속에서 성령 충만에 대해 방해 받는 일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차면 넘친다 : 축적의 임계점이 만드는 기적
ChatGPT가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 능력에 경악했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인간의 창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 혁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기적이 아닙니다. 이 놀라운 지적 능력은 무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끈기 있는 도전과,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데이터 충만’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가능성을 믿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인공지능 언어 모델은 오랫동안 미약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전환점은 2017년,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는 ‘트랜스포머’라는 혁신적인 그릇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OpenAI는 이후 GPT-1 (2018년)부터 그릇의 크기와 데이터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워나갔습니다. 특히 GPT-3 (2020년)에 이르러 모델의 크기를 이전보다 100배 이상 키우고 방대한 인터넷 텍스트를 쏟아부었을 때, 모델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단순한 암기를 넘어 인간과 같은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이 폭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차면 넘친다’는 진리는 기술의 영역을 넘어 영원한 진리의 영역에도 존재합니다.
1. 때가 차매: 역사의 충만함이 낳은 구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구원의 때를 준비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 ‘완성의 순간’으로 기록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라디아서 4:4)
성경에서 ‘때가 차매’ (헬라어: plēroma tou chronou)는 단순히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역사적, 영적, 문화적으로 모든 조건이 충만하게 준비된 ‘완성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수천 년간의 율법 교육은 인간의 죄를 명확히 보여주었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게 했습니다. 동시에 로마 제국의 통일과 팍스 로마나는 복음이 가장 효율적으로 전파될 수 있는 길을 닦았습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만하게 축적되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는’ 완벽한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넘쳐흐르게 된 것입니다.
2. 성령의 충만: 내면의 채움이 낳는 외적 열매
개인의 영적인 삶에서도 ‘차면 넘친다’의 원리는 강력하게 적용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명령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이 구절에서 ‘충만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plērousthe는 ‘가득 채워지다, 넘치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즉, 성령으로 ‘계속해서 가득 채워지고 넘치는 상태가 되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성령께서 우리의 삶 전체 (마음, 생각, 의지, 행동)를 완전히 통제하고 지배하는 상태, 곧 “차면 넘치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으로 내면을 가득 채울 때, 그 능력은 우리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외면으로 흘러나와 성령의 열매 (갈 5:22-23)와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나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으로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3. 개인의 삶에도: 9,999번의 데이터 축적
영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학문적, 경험적 성취 역시 지루하고 반복적인 축적의 과정을 통해 임계점을 돌파합니다.
토머스 에디슨의 삶은 ‘양적 축적이 질적 혁신으로 전환되는 임계점’을 보여줍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인 백열전구 발명은 1만 번 가까운 실험을 반복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작동하지 않는 9,999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9,999가지의 실패는 ‘작동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와 경험의 축적이었고, 만 번째 시도에서 탄소화된 대나무 섬유를 통해 ‘넘침’의 혁신이 터져 나왔습니다.
또한, 노벨상 수상자 파울 에를리히가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을 개발한 과정도 같습니다. 특정 질병의 병원체만 죽이는 ‘마법의 총알’을 찾기 위해 그는 수백 가지 화합물을 합성하는 반복적인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마침내 605번째 화합물까지 실패했지만, 606번째로 합성된 비소 화합물이 극적인 효과를 보이며 인류 최초의 효과적인 화학요법제로 탄생했습니다.
결론: 채우지 않으면 넘칠 수 없다
ChatGPT의 방대한 데이터 축적, 예수 그리스도의 때가 찬 오심, 그리고 위대한 과학자들의 무수한 실험 횟수는 모두 하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바로 ‘채우지 않으면 넘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단기적인 성과만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혁신과 변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끈질긴 채움, 즉 임계점을 향한 지적, 영적, 경험적 축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당신의 인생이라는 그릇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당신이 지금 반복하고 있는 지루한 학습, 좌절하는 실험, 혹은 매일의 성실한 영적 훈련이 바로 미래의 ‘넘침’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 그릇이 가득 차는 순간, 당신의 삶에서도 세상을 밝힐 만한 놀라운 빛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모두 행복한 주일 하루 되세요.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