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본다이 사건이 드러내는 다문화 해석의 방식에 대한 도전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 (Paul Ricœur) 사상을 중심으로
신년초 (2026년 1월 5일), 역사학회 모임에 속한 목회자들은 Bondi Beach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였다. 불과 몇주전 2025년말을 호주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총격 사건으로 유대인들축제를 피로 불드린 비극의 현장이었지만, 방문 당시 해변은 여름 햇살 아래 평온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백사장을 반복해서 씻어내고 있었고, 시민들은 수영과 산책,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비극의 흔적은 눈에 띄게 지워진 듯 보였다.
그러나 이 평온함은 단순한 회복의 표지로만 읽히지 않았다. 자연과 일상은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비극은 정말로 ‘지나간 사건’이 되었는가? 아니면 단지 기억과 해석의 층위에서 덮여 버린 것인가? 이 현장은 물리적 흔적의 소멸과 사회적 의미의 지속 사이에 놓인 긴장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글은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 (Paul Ricœur, 1913 ~ 2005) 의 해석학과 책임 윤리를 분석적 틀로 삼아, Bondi 비극 이후 호주 다문화 담론에서 나타난 기억의 소멸, 책임의 이동, 해석의 조기 종결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본다이 해변에서 발생한 비극 이후, 호주 다문화 사회는 슬픔과 충격을 넘어 또 하나의 국면에 들어섰다. 그것은 단지 사건을 애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어떻게 이해하려는 시간이었다. 언론 보도와 공적 대화 속에서 반복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인가? 이 질문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다문화 사회의 도덕적 기후는 크게 달라진다.
다문화 사회가 일반화된 질문은 정체성 (identity)의 질문이다. 곧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다. 즉 어떤 사람이 시간 속에서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it mean to say that someone is the same person over time?”)를 뜻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폴 리쾨르는 ‘정체성 (identity)’을 하나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두 차원으로 나눈다. 이 두 차원이 바로 “동일성 (Sameness, idem)” 이라는 개념과 “자기성 (Selfhood, ipse)”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Idem (라틴 발음 아이듬)과 Ipse( 라틴발음 입씨)는 ‘인간 대 사회’의 구분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 모두에 함께 적용되는 ‘정체성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구분이다.정체성의 두 구분을 좀 더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동일성: Sameness (idem) 이해이다. 출신, 문화적 전통 , 민족적 전통, 종교 전통과 생활습관, 넓게는 인종의 분류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정체성을가진 사회 ( society)이며 동시에 나혹은 우리 (Me or We) 이다.
폴 리쾨르에 따르면, 그의 책 Oneself as Another (1992)에서 동일성 (idem)이란 시간이 지나도 비교적 변하지 않는 정체성의 요소들—국적, 종교, 문화, 사회적 역할과 같은 반복 가능한 특성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동일성은 다문화사회 운영에 필수적이다. 다문화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이민자, 에스닉( Ethnic) 을 말할때 사용되며 다문화의특성을 말할때 이민자의 배경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언어이다.
본다이 사건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본다이 사건 직후 언론 보도는 당연히 사실 확인과 피해자, 공공 안전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도의 중심은 점차 사건에서 사람으로 이동하면서 어느문화 어는종교 어는 공동체로 이동하게된다. 출신, 배경, 정체성의 범주들이 조심스럽게—때로는 암묵적으로—의미의 열쇠처럼 다뤄졌다.이러한 질문들은 반드시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사회적 본능에서 나온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체성이 설명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 비극은 더 이상 개인의 구체적 행위로 머물지 않는다. 해석은 자연스럽게 그 행위를 낳았다고 여겨지는 집단의 특성과 성향으로 확장되며, 사건은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이 전환은 비극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개인 행위에서 집단 범주로 이동시키는 해석학적 오류를 낳는다. 그 결과 해석은 행위를 평가하는 대신 집단을 암묵적으로 정죄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
둘째로 리쾨르는 동일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자기성 (ipse)을 제시한다. 자기성: Selfhood (ipse)은 약속, 책임, 신뢰, 윤리적 선택 “누가 책임지는가?”에 답하는 자신을 동일한 ‘나’로 유지하게 하는 윤리적 능력이다. 곧 책임지고 응답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자기성이다. Idem (동일성)이 반복되는 특성, 습관, 성향, 즉 캐릭터 (character)와 연결되였다면 이와달리 자기성 (ipse)은 이런 것들과 의도적으로 구별되는 능력 (capacity)이다. 리쾨르가 말하는 자기성에는 네 가지 모습이 있다. 말한 것을 지키려는 자세,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태도, 잘못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이런 선택들이 쌓여 형성되는 신뢰다. 이 모든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길러지는 능력이다.
사회도 하나의 인격처럼 책임질 수 있다.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을 때, 제도가 문제를 바로잡으려 할 때, 사회가 “이 일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자기성을 가진다. 자기성이란 변하지 않는 성격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약속과 책임을 놓지 않으려는 능력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비극을 보도할 때, 리쾨르의 관점은 두 가지 중요한 태도를 요구한다. 이는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건을 말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기준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방향제시를 한다 (폴 리쾨르, 『자기 자신으로서의 타자』 (Oneself as Anoth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시간과 이야기』(Time and Narrative), 1–3권.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1988. 「윤리와 정치」, 『텍스트에서 행위로』 (From Text to Action), 1991).
첫째로 언어 해석학적 겸손 (Narrative humility)이다.
비극이 발생하면 우리는 그 의미를 견디기보다, 가능한 한 빨리 설명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인가”, “어느 집단에 속하는가”로 이동하며, 사건의 의미는 정체성 범주를 통해 정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문화 사회에서 이러한 설명 방식은 쉽게 오해와 상처를 낳는다. 개인의 구체적 행위는 집단의 특성으로 확장되고, 사건은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언어 해석학적 겸손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요청된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사건의 의미를 단정하고, 집단이나 문화를 암묵적으로 정죄하는 성급한 해석을 보류하는 태도다. 이 겸손이 결여될 때, 해석은 개인의 행위에서 집단 전체로 이동하고,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공동체들마저도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전환은 비극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낸다. 이는 물리적 폭력 이후에 발생하는 2차적 상처, 곧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상처 입히는 해석의 폭력이다. 비극 이후 사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는 신속한 설명이 아니라, 책임을 흐리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성급히 고정하지 않는 해석의 인내에 있다.
둘째로 윤리적 지향 (Ethical orientation)이다.
비극 앞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문제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다문화 사회에서는 특히, 분류와 구분보다 공동체의 반응이 더 큰 메시지가 된다. 서로를 의심하는 말이 아니라, 피해를 함께 애도하고 다시 안전을 세우는 선택이 사회의 얼굴이 된다. 윤리적 지향은분류 (classification)가 아니라 공동체적 책임 (response)을 먼저 묻는 태도이다. 즉 이 말은 “우리는 타자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호주 다문화 사회의 공적 담론 속에는 종종 책임을 외부로 이전하려는 유혹이 은밀하게 작동한다. “이민자가 너무 많아서 경제가 어렵다”, “유학생 때문에 주택난이 심해졌다”, “난민 정책이 일자리를 빼앗았다”와 같은 말들은 개별 정책 실패나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합적인 사회적 책임을 특정 집단의 존재로 환원하는 잘못된 언어 해석적 전략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한 방향으로 단순화한다.
폴 리쾨르 (Paul Ricœur)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담론은 단순한 오해나 정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가 스스로를 책임지고 응답할 수 있는 주체, 곧 자기성 (ipse)으로 이해하기를 회피할 때 나타나는 해석학적 증상이다. 경제 불안, 고용 구조의 변화, 주택 정책의 실패와 같은 문제들은 사회 전체가 응답해야 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담론은 그 책임을 추상적 구조 즉 가시적인 타자에게 이전함으로써 질문을 조기에 종결시킨다.
이러한 희생양 담론은 사회적 긴장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다문화 사회의 성숙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책임이 특정 집단의 ‘ 동일성 (idem)’에 귀속되는 순간, 사회는 더 이상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된다. 그 결과, 다문화 사회는 차이 속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는 공동체가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양으로 대취하는 취약한 구조로 변질된다.
성숙한 다문화 사회는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 사회는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어떤 집단의 존재로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제도와 선택, 그리고 응답의 방식 속에서 해석하며 성숙하기위해 도전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쾨르가 말하는 자기성 (ipse)은 윤리적 개념을 가진 사회적 성숙의 기준이 된다 고 평가한 것이다. 다문화 사회는 정체성 차이를 얼마나 잘 관리하는가에 있지 않고, 어려운 현실 앞에서 누가, 어떻게, 끝까지 책임지고 응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책임을 전가하기보다, 이 사건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를 함께 묻는 공공적 윤리의 자세다.

결론 : 본다이 비극 이후의 이야기
비극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모든 상처를 막을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그러나 비극이 남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사건을 출신과 배경으로 설명하려 할수록 사회는 쉽게 갈라진다. 반대로 정체성을 책임과 응답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 공동체는 더 단단해진다. 사회적인 취약점을 소수 이민자들에게 원인을 돌리는 단순화는 다문화사회를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넘어, “우리는 이 일 앞에서 어떤 공동체로 남을 것인가?”이다. 다문화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동일성”의 관리도 중요하지만 “자기성”의 성숙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그는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호주의 다문화 상황에서 지금 어떤 존재, 어떤 공동체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지 않는다면 소수민족은 호주 백호주의 신화 앞에서 항상 희생양이 되여야 한다. 본다이 비치 비극이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책임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도전으로 받아드릴 때 호주 다문화사회는책임윤리를 가지는 건강한 다문화사회로 성숙해 갈 것이다.

이상택 목사 (아이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