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특별기고

권력 사유화와 주술의 그림자 : 융의 심리학으로 본 두 상징적 행위
전직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가 보여준 경복궁의 어좌 사건과 대통령과 부인이 일본 군경에 의해 시해된 국가적 비극의 현장 명성왕후의 침소를 은밀히 방문한 일은 한국 사회에 강한 불편함을 남겼다. 겉으로는 단순한 호기심의 행위 같지만, 심리학자 C.G. 융 (Jung)의 시각으로 보면 이 두 사건은 권력과 무의식이 교차한 상징적 행위로 이해된다. 융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자기 (Self, 自己)라는 중심이 있다.
‘자기 (self)’는 우리 안의 큰 질서와 조화의 힘을 뜻하는 원형 (Archetype 집단무의식)이다. 자기 (Self, 自己)는 인간 존재 전체,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통합된 중심이 된다. 즉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리키는 내면의 지도와 같다.
반면 자아 (自我 Ego)는 스스로를 ‘나’라고 인식하는 의식의 중심. 생각하고, 판단하는 작은 나이다.
문제는 이 두 존재의 관계가 뒤바뀔 때 생긴다. 불안하거나, 비판을 받거나, 권력이 흔들릴 때 사람은 자신 안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중심이다”, “내가 옳다”라고 믿고 싶어진다.
그 순간 작은 나 자아 (Ego)가 큰 중심 자기 (自己 Self)의 자리를 빼앗아 통제한다. 이것을 융은 ‘자기 팽창 (inflation)’ 이라 불렀다.
– 신성한 권위와 질서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자기팽창의 상징적 행위
왕좌는 조선 500년의 정치적 · 종교적 상징이자, 공동체가 신성한 질서를 위임했던 자리다. C.G.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본 것 처럼 김씨의 왕놀이 행위는 자아 속에 감춰진 무의식적 욕망과 불안이 왕의 보좌에서 자기의 정체감을 찾으려한 것이다. 융에 따르면 자아 (Ego)가 자기 (Self)의 자리를 대신하려 할 때 ‘작은 나가 전체가 되려는 착각’, 즉 자기 팽창 (自我膨脹)이 일어난다. 김건희 씨의 ‘왕좌 착좌’는 바로 그 자기 팽창의 상징적 표현으로, 왕좌라는 신성한 중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절대화하려는 무의식의 드러남으로 볼 수 있다. 왕좌가 하늘의 뜻과 국가 질서를 상징한다면, 그 자리에 앉는 행위는 의식적으로는 단순한 방문일 수 있으나, 무의식적으로는 신성한 권위와 질서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나는 권위의 주체이며 선택된 존재다”라는 확신을 강화하며 보여주려는 상징적 행위로 해석된다.
그녀가 오랫동안 보인 주술 · 무속 의존적 세계관과 결합될 때, 이러한 상징적 행위는 단순한 권력 과시가 아니라, 융이 말한대로 “나는 특별히 선택된 존재이며, 신적 힘이나 생명을 소유한 마나 인격 (mana personality)자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상징적 행위일 수 있다.
– 명성왕후의 침소 방문은 재 점유의 의례 (ritual of repossession)식 및 터밟기 주술과 닮아보임
그 장소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깊은 ‘한 (恨)’과 폭력의 그림자가 깃든 자리다.
그 장소를 찾은 전 윤대통령 부부가 수행원 없이 둘만이 들어가 10여분 머무른 행위는 고대 종교 의례 중의 하나로서 상처의 자리를 정화하고 새 질서를 세우려는 재점유 의례 (ritual of repossession 再占有儀禮) 행위로 보여질 수 있다. 이 말은 과거에 상실된 권력, 신성, 또는 중심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수행되는 의례적 행위를 말한다. 인류학에서는 이 개념을 정화 (潔淨, purification) 또는 질서의 회복과 관련하여 사용한다.
한국의 토속 신앙과 무속 문화에서 ‘터밟기 주술이란 것이 있다. 집이나 마을, 절, 궁궐 등 땅 (터)에 깃든 귀신이나 부정한 기운을 달래고, 그 자리를 정화 (淨化)하여 평안과 복을 빌기 위해 무당이나 공동체가 땅을 밟으며 행하는 주술적 의례이다. 예를 들어, ‘터 밟기’나 ‘풀이굿’은 과거에 불행이나 죽음이 있었던 장소, 귀신이나 한 (恨)이 남은 장소를 다시 밟고 정화하는 주술행위이다. 정화 (淨化) · 풀이 의례는 비극의 장소를 방문하여 부정한 기운을 씻고 권력자의 액운을 막는 의례이다. 이것이 바로 무속적 재점유의례 (ritual of repossession) 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융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상처의 기억을 직면하기 보다 통제하려는 보상적 행위이며, 진정한 치유가 아니라 통제의 환상이다. 상처의 자리를 밟고 서며 ‘이제 그 자리를 다스린다’는 행위는 주술적 보상행동의 표출이 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경복궁의 왕좌에 앉거나 명성왕후의 침소 같은 비극의 장소에 들어가는 행위는 겉으로는 단순한 방문처럼 보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신성한 상징을 사유화하려는 의지의 표출로 읽힐 수 있다. 이런 행동을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신의 불안과 통제 욕구를 달래기 위해 상징적 공간을 통해 힘을 회복하려는 의식이며, 무속적 전통으로 보면, 굿이나 터밟기 처럼 ‘불안한 터’를 정화하고 새 질서를 세우는 주술적 행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의 은밀한 그 곳의 방문중 한 사람은 무속인으로 주술적 주문을 주도적으로 진행했을 수 있으며, 은밀한 두 삶의 주술의례는 권력의 정당성을 초월적 힘으로부터 확인받으려는 “터밟기 주술”과 같은 것으로 충분이 의심된다.
– 위에 논한 두 사건을 한국 사회가 불편하게 느낀 이유는 공공의 상징을 사유화한 것
그것이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역사의 상처 위에 권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장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의 성역은 개인의 사유지가 아니라 역사적이며 민족공동체가 본존되야하는 책임 공간이 되야한다. 그 자리를 주술적 의례나 자기 확증의 무대로 사용하는 순간, 역사적 공공의 상징은 사유화된다.이 두행위는공동체의 무의식이 느낀 성역 침범’에 대한 거부감이었다.그 자리를 공공선으로 비워둘 수 있는 겸허함, 바로 거기서 공동체의 품격과 역사의식이 시작된다. 한국 사회가 이 사건을 통해 성찰해야 할 것은, 공권력의 책임의식과 주술적 신성의 혼동을 넘어서는 성숙한 의식 구조 – 즉, 공동체의 중심을 다시 자아 (Ego)가 아닌 공동선 (common good)에 두는 일이다. 무속이나 주술적 행위가 국가 통치행위에 스며들면 국가는 합리성과 사회계약의 신뢰성이 무너지고 국가 통치의 DNA (유전정보 시스템)의 상실을 경험하며 사회적 와해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래서 이를 엄격히 배격해야 한다.

이상택 박사 / 목사 (아이오나 트리니티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