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북한 방문기 (2, 3)

나의 북한 방문기 (2)
<1997년 10월 13일(월) / 서울과 베이징 – 두 곳 다 맑고 쾌청하다>
어제 저녁 시드니를 출발한 비행기는 아침 7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공항밖으로나가지 않고 비행기를 갈아타는 환승선 (transit)을 따라 대합실로 이동했다. 시드니대학에서 공부하다가 휴학하고 서울대학에 와서 한국어 연수를 하고 있는 우리 쌍둥이 딸들에게 전화했다. 아이들은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즐겁고 행복하게 한국어를 잘 공부하고 있다며 오히려 나와 우리일행을 염려하며 조심하라고 말했다.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 시드니 집에도 전화하고 이곳 서울에있는 KNCC의 김동환총무와 예장 통합총회 사무실에도 전화하여 북한 방문일정을 알려드렸다.
Gregor와 Joy, 장목사와 나는 공항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식사와 커피를 나누며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었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평양에서 양국 교회의 선교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제안할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확인했다.
1) 향후 UCA와 KCF 사이의 선교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기적 교류와 방문의 가능성에 관해 협의한다.
2) 매해 KCF가 추천하는 신도들이나 교회지도자들 1-2명을 호주에 와서 영어연수나 신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UCA가 스칼라쉽을 제공하는 문제를 제안한다.
3) UCA가 북한에 호주의 양과 젖소와 농업 기술자를 보내어 지원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4) 이번 방문 기간 동안 가능하면 북한의 의료시설, 탁아시설, 처소교회 그리고 수해 피해지역 방문을 요청한다.
5) 이번 방문 기간 동안 우리는 정치적 토론을 하거나 정치적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10시 3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은 오후 1시 반경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입국절차를 마친 우리는 20여개나 되는 짐들을 모두 공항 물품 보관소에다 맡기고 북한 영사관으로 직행했다. 이미 다 연락이 된 절차였기에 어렵지 않게 북한 입국비자를 받았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도 나는 이곳 베이징 북한 대사관 로비에서 오재식선생을 만나 기쁨으로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이도 다음 주에 북한으로 들어갈려고 비자를 받으러 왔다고 하였다. 70년대 함께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뜻을 같이 했던 분인데 지금은 한국선명회에서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가능하면 다음 주 평양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에게 찍어 준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 사증번호는 1763xxx이었고 체류일 수는 8일 간으로 되어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베이징 스위스호텔 1층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항공을 찾아가 예약된 티켓팅을 했다. 북에서 온 여행사 직원들은 참 친절했고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대우 베이징 지사장으로 있는 이원태집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이는 10여년 전 시드니에서 대우 지사장을 할 때 부터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참 좋은 믿음의 사람이다. 회사 직원을 공항까지 보내어 선교비도 주셨다. 나는 그동안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기에 베이징 거리가 별로 낮설지는 않았다. 우리는 베이징에 있는 호주 대사관에 전화를 하여 내일 북한을 방문하려고 한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지난 주 켄베라에 있는 호주외무성을 방문하였을 때 외무성 직원은 여러가지 정보와 함께 베이징 대사관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평양으로 출발하기에 앞서서 베이징에 있는 호주 대사관에다 미리 그 날짜를 알려주는 것이 외교관계가 없는 지역을 방문 할 때는 유익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어 이곳 까지 함께 온 임장로와 이집사 까지 우리 여섯은 베이징의 한 전통적인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음식의 종류는 한 30여 가지도 더 되었다. 교우들이 준 돈으로 내가 대접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중 Gregor는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1930년대 호주 선교사로 평양신학교에 와서 교수를 했던 Gelson Engel박사의 낡은 사진과 편지를 보여 주었다. 평양 방문을 하루 앞에 둔 의미 깊은 자리에서 이런 역사적 사진을 보여 주다니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평양에 가면 그 옛날 평양신학교 자리를 꼭 찾아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익히 읽어서 알고 있던 Gelson Engel은 독일 출신으로 1898년에 호주로 온 목사였는데 2년 뒤인 1900년에 호주 장로교회는 그를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엥겔목사는 37년 동안 부산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했고 특히 선교 중반기 부터는 평양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교회사를 가르쳤다. 그의 휘하에서 배운 한국목사들 만도 5백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후기 : 그의 7자녀 중 평양에서 태어난 Rev. Dr. Frank Engel은 그후 호주장로교회와 연합교회에서에큐메니칼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2006년 돌아가셨는데 나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퍼스에서 북한과 연계된 사업을 하고 있는 천영수사장의 베이징지사 박사장이 우리를 위해 봉사해 주었다. 승용차 두 대를 준비하여 공항에 나와 픽엎해 주시고 대사관, 여행사, 호텔 까지 이곳 저곳으로 데려다 주고 전화 까지 다 해 주느라 하루 종일 정말 수고 많이 하였다. 깊이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캐피탈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하룻 밤이어서 우리 남자들 셋이서 한방을 쓰기로 했다. 샤워 후 성경을 읽고 여행일기장을 펼쳤다. 미루어 두지 않고 오늘 하루를 되새기며 일기를 쓴다. 모든 것이 다 감사할 뿐이다. 도대체 나같은 것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는 이곳 저곳 필요한 곳 마다 신실한 사람들을 배치해 두시고 갈길을 인도하시는가? 모든 것이 다 감사 할 것 뿐이다. (계속) *홍길복 (2026.3.23)
나의 북한 방문기 (3)
<1997년 10월 14일 (화요일) / 평양 – 맑고 아름다운 가을 날씨다>
베이징의 호텔이다. 평소 새벽기도를 드리던 습관대로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아직 Gregor와 장목사는 잠들어 있다. 그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샤워와 면도를 한 후 성경을 읽었다. 오늘 아침까지 이사야서를 다 읽었다. 기도를 드린 후 어제의 여행일기를 다시 읽어 보았다. 7시가 넘어 우리는 호텔 부폐식당에서 아침을 나눈 후 서둘러 공항으로 나갔다. 대우 베이징 지사장 이원태 집사의 사무실 직원이 와서 우리를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
수속을 마친 후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바로 밑까지 벤즈를 타고와 탑승하는 사람도 눈에 띠었다. 아마도 고위층 인사인가 보다. 기내에서는 북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비행기는 좀 낡아보이고 좌석은 다른 비행기에 비해 많이 좁았다. 중국의 특유한 냄새도 풍긴다. 그래도 북조선 여자승무원들은 참 친절하고 부드럽고 아주 고왔다. 영어로 기내 방송이 나온다. 손님 중 가방을 분실한 분이 있어서 찾느라고 출발이 늦어지고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말이었다. 비행기는 예정했던 11시 보다 지체되어 12시쯤 이륙했다. 조국, 내가 태어난 고향 땅을 찾아가는 내 마음은 커다란 흥분과 더불어 기쁨으로 가득했다. 소박한 기내식을 먹은 후 고려항공은 현지시간 오후 3시경 평양 순안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공항은 아주 깨끗하고 조용하고 무척 한가했다. 호주의 어느 작은 지방 도시의 비행장 같았다. 여행객이 많지 않은 사회일테니 그럴 것이다. 입국 절차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세관에서 우리를 불렀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간 선물들 중 남조선 제조사의 제품 마크가 그대로 붙어있는 옷가지들과 운동화들을 비롯하여 몇 가지 물품들은 그대로 통과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모든 물품에서 이들 상표들을 다 떼어내라고했다. 우리는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조선기독교도련맹의 지도자들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우리를 VIP 통로로 인도해 주었다.
공항에는 련맹의 여러분들이 마중을 나왔다. 고기준목사를 위시하여 이천민목사, 황시천목사, 이종로선생 등을 기쁘게 만나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너무도 반가운 얼굴들이다. 이들은 지난 1991년 WCC 켄베라 총회에 참석한 후 시드니에 와서 우리와 더불어 몇 가지 소중한 행사를 함께했던 분들이어서 더더욱 반갑고 기뻤다. 인사를 나눈 후 북한의 신문과 방송사 기자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질문을 던졌다. 생각지 못했던 기자회견이었다. 그들은 신분을 밝히면서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며 사진을 찍었다. 어디서 온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부터 시작하여 이번 평양을 방문하게 된 이유와 목적, 기간, 인원수, 그리고 하려고 하는 일들을 꼼꼼하게 물었다. 모든 물음에 대해 우리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황목사는 이런 회견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면서 아마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우리가 온 것을 간단하게 보도 할 것이라고 했다. 회견이 끝난 후 우리는 밖으로 나와 <평양>이라고 쓰여진 공항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고기준목사는 이제 63이 되었다고 하면서 6년 전 이야기와 옛날의 추억을 말씀하면서 여러 번 울컥하셨다. 그러면서 여러 차례나 거듭해서 말했다. 여기 평양을 그져 “내 집 처럼” 여기고 마음 편안하게, 건강하게, 잘쉬고 가라는 당부요 덕담이었다. 그이는 참 정이 많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분이다.
짐은 따로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면서 두 대의 벤즈로 우리를 나누어 태운 다음 공항을 벗어났다. 차 안에서 이천민목사는 평양시내 이곳 저곳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평양에서 제일 처음으로 안내를 받은 곳은 만수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김일성 원수의 동상이었다. 황시천목사는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제일 먼저 수령님께 인사드리는 것부터 다음 일정을 시작한다면서 이는 개인적 인사의 성격을 넘어 공화국에 대한 존중을 담은 예의라고 했다. 1972년 김일성주석 60세 기념으로 세워진 이 동상은 23미터 높이에 금박을 입힌 것으로 김일성주체사상의 상징이며 그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상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여 Joy가 그들이 준비해 온 꽃다발을 드리고 우리는 함께 묵념을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 우리는 이미 사진을 통해서도 많이 보아서 익히 알고 있는 그 유명한 김일성광장에 도착했다. 뒤로는 대동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주체사상탑이 우뚝 서있는 김일성광장은 6.25 직후인 1954년에 준공된 것으로 그 넓이만도 7만 5천 평방미터 (약 23만평)나 되며 바닥은 콩크리트나 씨멘트가 아닌 화강암으로 만든 평양의 중심광장이다. 김일성광장은 북한의 각종 기념일 때 마다 커다란 행사를 진행하며 우리는 TV에서 북한군의 대규모 사열과 각종 최신 무기를 보아왔었다. 광장의 중심부인 주석단 아래에서 우리는 주변에 있는 인민대학습당과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평양제1백화점 등을 바라보며 자랑스런 설명을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베이징의 천안문광장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위시하여 바티칸의 성 베드로광장, 런던의 트라펠가광장, 파리의 콩코드광장, 베네치아의 산마르코광장, 피렌체의 두오모광장, 그리고 서울의 광화문광장 까지 정말 많은 나라와 도시의 크고 작은 역사적 광장들을 많이 보았지만 여기 김일성광장은 또 하나의 다른 기능과 목적을 지닌 이색적 광장임을 실감했다.
김일성광장의 이곳 저곳을 둘러 본 후 이 분들은 우리를 평양역 앞에 있는 고려호텔로 데리고 갔다. 처음엔 보통강호텔로 숙소를 정하려고 했는데 수리 중이어서 거기 보다는 한급 낮은 곳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3개의 방을 예약하고 정해 놓았는데 나와 장목사는 한 방을 쓰게 해 주었다. 그분들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우리는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간단히 씻은 다음 내려와서 함께 조선기독교도련맹 본부로 갔다. 봉수교회당과 이웃하고 있는 3층짜리 크지 않은 건물이었다. 강영섭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KCF사무실을 방문한 자리이며 또한 공식적 만남의 날이기에 간단한 순서를 갖었다. 강영섭목사가 환영사를 하고 Gregor Henderson목사가 답사를 했다. 이어서 이천민목사가 기도를 드린 후 전명숙집사의 피아노 반주에 따라 신숙희집사가 찬양을 했다. 그런데 오늘 부른 찬양은 주기철목사의 노래 <영문 밖의 길>이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의미 깊은 순교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크게 은혜를 받았다. Grego는 참 자상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그는 UCA총회 이름으로 준비해온 기념패를 읽고 전달했다. 이어서 Joy는 호주연합교회가 드리는 선교비 1만불과 수재의연금으로 5만 7천불을 은행계좌에 입금한 서류를 드렸다. 나도 우리 협의회 이름으로 성도들이 헌금한 수재의연금 1만불을 전달하고 별도로 황시천목사에게 이번 우리들의 평양 방문을 위한 비용으로 2천불을 드리고 특송을 하신 두 집사에게도 각각 작은 봉투를 드렸다. 성찬식을 거행 할 상황이나 순서가 아니어서 우리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포도주를 드리며 다음 기회에 북조선에서 나온 포도주와 함께 사용하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참 화기애애하며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다시 고려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 시간을 갖었다. 우리를 위해 KCF가 마련한 환영 만찬의 시간이었다. 이 자리엔 오늘 우리와 함께 평양에 온 임용모장로와 이문철집사도 같이 초청해 주었다. 풍성하고 귀한 성찬이 차려졌다. 수재를 당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찾아온 우리들로써는 참 미안한 식탁이었으나 이것이 전통적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이다. Gregor와 Joy도 한국음식을 잘 들었다. 시드니에서 먹어 본 한식 보다는 색다르고 훨씬 풍성하고 맛이 좋다고 칭찬한다. 나와 임장로와 이집사는 모두 고향이 이북이어서 참 오랜만에 잊혀졌던 고향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식만이 아니라 깊은 사랑과 정을 느끼게 해 주는 만찬이었다. 우리는 여러가지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북한의 음식과 의복, 주택과 도시 등 오늘 본 평양거리와 사람들에 대한 인상들을 이야기 하면서 친교를 나누었다. 이종로선생과 김혜숙선생은 오늘만이 아니라 이번 방문 일정의 공식적 자리에서는 통역을 맡아 수고 하는 분들이다. 두 사람 다 영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잘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이들은 기독교인들 같지는 않았다. 영어는 잘 하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 처럼 보였다. 식사 후 임장로와 이집사는 해외원호위원회를 따라 준비된 초대소로 돌아가고 KCF 사람들도 자리를 떴다. 그들이 간 후 우리 넷은 커피를 마시면서 밤 10시가 넘도록 하루를 정리, 평가한 후 각자의 방으로 올라와 평양에서의 첫날 밤을 보낸다. (계속) *홍길복 (2026.2.9)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