淮南子(회남자) 泰族訓(태족훈)에 나타난 묵자(墨子)
– 묵자,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과 맞짱 뜬 반전(反戰)주의자
– 천하 엎으려 목숨 걸리라!
– 회남자에서의 묵가 비판과 수용
○ 묵자, 공동체의 힘으로 세상과 맞짱 뜬 반전(反戰)주의자
‘회남자 태족훈’에서는 다음과 같이 묵자의 실상을 짧지만 매우 강하게 평가했다.
“묵자의 심복 180명은 모두 불 속으로도 뛰어들 수 있었고, 칼날도 밟을 수 있었으며, 죽음 앞에서도 돌아설 줄 몰랐다.”
.전쟁의 시대, ‘비공(非攻)’을 주장하다
“그 나라의 변경을 넘어 들어가서는 그들이 농사지은 곡식들을 베어 버리고 그곳의 나무들을 잘라 버리며 그들의 성곽을 부수고 그들의 해자를 묻어 버리며 그들의 짐승을 함부로 죽이고 그들의 종묘(宗廟)를 불질러 없애며, 그 나라 백성들을 찔러 죽이고 그 나라의 늙은이와 약한 사람들을 죽여 없애며 그 나라의 소중한 그릇들을 가져간다.”(묵자 [墨子] 비공 하 [非攻 下])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년~221년)의 전쟁은 저와 같이 적국에 쳐들어가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전쟁을 치르는 규모, 기간, 철제무기 보급으로 인한 전투력에 이르기까지 춘추시대(春秋時代)와는 모든 면에서 너무 달랐다. 하루에 백번이 넘는 전투가 치러지는 그야말로 ‘전쟁의 시대’에, 지식인들은 전쟁의 비참함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 전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법가, 전쟁에 부정적이지만 전쟁 자체보다는 군주의 수신(修身)을 통한 인정(仁政)에 무게 중심을 두었던 유가, 전쟁을 반대하나 세상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던 도가. 오직 묵가만이 ‘전쟁 반대 [非攻]’를 기치로 내걸었다.
묵가, 이들은 누구인가? 묵가는 묵자를 거자(鋸子: 묵가 최고 우두머리)로 삼고 전사‧무의(巫醫)‧농민‧상인‧말단 관리 등의 하층민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 집단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묵자 역시 성도 이름도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생몰 연대도 불분명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대략 그가 공자가 죽은 해와 맹자가 난 해 중간쯤인 전국시대 초기를 살았다는 것, 공자와 같은 노(魯)나라 사람이라는 것, 『묵자』의 내용을 봤을 때 기술자, 노동자였을 것이고, 독학으로 공부한 것 같다는 정도다. 묵가 역시도 그 조직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대중적 기반이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묵자의 심복 180명은 모두 불 속으로도 뛰어들 수 있었고, 칼날도 밟을 수 있었으며, 죽음 앞에서도 돌아설 줄 몰랐다.”(회남자 [淮南子] 태족훈 [泰族訓])고 한 것으로 보아 묵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단단한 조직이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공동체 내에서 사형이 이루어질 만큼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 묵가는, 능력 여하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났고, 뛰어난 방어술과 장비 제조 기술로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약하고 작은 나라를 도왔다고 한다.
묵자가 주는 놀라움은 그가 자기 머리 하나만을 믿고 유세했던 당대의 지식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쳤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의 힘, 실천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강력하게 전쟁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천하에 남은 없다
“지금 나라와 나라들이 서로 공격하고 있고 집안과 집안들이 서로 빼앗고 있으며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 해치며, 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은혜롭고 충성되지 않고, 아버지와 자식들은 서로 자애롭고 효도하지 않으며, 형제들은 서로 우애를 다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곧 천하의 해악이다.” 그렇다면 이 해악을 살펴볼 때 또한 그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있는가? … 묵자는 말하였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 ”(겸애 중 [兼愛 中])
묵자의 가치판단 기준은 오로지 “국가와 백성과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가”였다. 유가의 음악과 호화로운 장례가 비판되고, 자원을 개발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자는 절용(節用)이 권장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사람, 집안, 국가 간에 일어나는 쟁투 역시 백성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으로, 그 중 최고의 해악은 단연 전쟁이다. 묵자가 보기에 이런 해악들은 나와 남을 차별하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자기, 자기 집안, 자기 나라만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다른 집안을 빼앗고, 다른 나라를 공격한다. 그래서 그는 차별 말고 모두를 아울러 사랑하자는 ‘겸애(兼愛)’를 주장한다.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 물론 유가도 나로 미루어 남을 사랑하라는 인애(仁愛)를 말하지만 유가의 사랑은 친친(親親: 가까운 사람을 친히 함)이다. 즉 내 아이, 내 동생의 아이, 내 이웃의 아이, 저 건너 마을의 아이, 이런 식으로 가까운 데서부터 점점 먼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듯 유가의 사랑에는 분명한 차등이 있다. 그런데 묵자가 말하는 겸애는 친소, 귀천 등을 넘어선 무차별적 사랑이다. “천하에 남은 없다!” 이 경계 없는 사랑만이 천하의 해악을 없앨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가 차별[別]은 그르고, 아우르는 것[兼]을 옳다고 한 이유는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는 일을 추구하기 위해서”(겸애 하 [兼愛 下])이다. 다시 말해 겸애는 공리(公利)를 위해서가 아니면 무의미하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한다(겸상애 [兼相愛] 교상리[交相利])! 사랑[愛] – 이익[利]의 짝패는 이렇게 탄생한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롭게 하기도 하지만, 서로 이롭게 하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하기도 한다. 묵자가 생각하기에 ‘겸상애 교상리’의 정신만이 무자비한 전국(戰國)의 세상에서 모두가 생명을 보존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치였다. 그런 점에서 겸애에는 냉철한 판단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귀 밝은 사람과 눈 밝은 사람이 서로 더불어 보고 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팔다리가 잽싸고 강한 사람들이 서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을 돕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도를 터득한 사람은 힘써 서로 가르쳐 주게 되는 것이다.”(겸애 하 [兼愛 下])
겸애는 마치 물이 흐르듯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들이 타인에게로 흘러들도록 한다. 주고받고 나누는 행위, 서로를 이롭게 하는 행위.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것은 겸애가 아니다. 겸애는 자신으로 향한 시선을 타인에게로 돌려 그들도 나와 같은 욕망이 있음을 생각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묵자는 사랑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하는 존재지만 “이기적이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不爲己之可學也)”(대취 [大取]) 어떻게? 바로 상벌(賞罰)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 겸애의 마음을 갖기 어려우므로 상벌을 통해서 그런 마음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묵자는 주장한다. 이 근거는 무엇인가? 천(天)이다. 즉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것은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그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하늘과 귀신이 벌을 내릴 거라는 얘기다. 묵자에게 하늘과 귀신은 겸애를 취하기 위한 방법적 차원에서 소환된다. 아울러 정치적으로는 성인이 천자가 되어 그 아래 삼공(三公)-제후-경(卿), 재상-향장(鄕長)-가군(家君)-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천자의 뜻 하나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상동(尙同)’의 논리가 도출된다.
겸상애 교상리. 여기에 부합하면 상을 받고 여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어찌 보면 비정하고 조금은 단순한 이 논리는, 이렇게 강제성을 띠지 않고서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비장함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묵자에게는 문화와 감정과 개인의 삶이 희생되더라도 모두의 삶을 보장하는 공리(公利)가 중요했다. 그래서 공리(公利)를 해치는 전쟁은 없어져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 원리로 겸애가 주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묵자의 귀환
묵가는 전국시대가 지나고 제국이 통일되는 시점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묵자』가 청(淸)말 고증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발굴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묵가 사상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노예의 도”(순자)라거나 “아비도 모르는 무리”(맹자)라는 유학자들의 비판으로만 그를 기억했을 것이다. 그들은 왜 세상에서 사라진 걸까? 묵가는 당시 많은 백성들의 지지로 큰 세(勢)를 얻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주장은 “살아서는 고생이요, 죽어서는 박장이어서, 그의 도는 너무나 각박하여 사람을 근심하고 슬프게 했고, 정말로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장자 [莊子] 천하 [天下])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전쟁을 반대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막으려는 묵가의 반전(反戰) 태도는 전쟁을 통해 패권을 차지하려는 군주들의 욕망과도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는, 묵가가 그들만의 독자적인 규율로 운영되는, 최고의 전쟁기술을 가진 공동체라는 점이 통일된 제국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묵자는 왜 다른 유세가들처럼 군주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비전을 펼치는 대신 공동체를 만든 것일까? 아마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군주들이 어떤 욕망 속에 있는가를. 그는 자신의 비전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시대의 문제를 돌파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상적으로는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하자는 겸애를 설파하고, 실천적으로는 공동체를 만들어 직접 전쟁을 막으러 다녔다.
묵자는 사람들 각자가 가진 능력과 재물과 지식은 공동체 속에서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 밝은 사람은 눈이 되어 주고, 힘이 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돕고, 음식을 가진 자는 음식을 나눠주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준다. 이것이 바로 교상리(交相利)의 정신이고, 이런 나눔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겸애다. 차별적 사고로는 가진 것들을 흐르게 할 수 없다. 흘러나가지 않으니 흘러 들어오지도 않는다.요컨대, 묵자의 겸애는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맹목적 이타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대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보완해줄 것을 요구하는 합리적 인식이다.
우리는 늘상 말한다. 가진 것이 없다고, 그래서 더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묵자는 누구나 나눌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겸애와 공리를 말한다. 우리 각자가 이미 뭔가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나누라는 거다. 그렇다면 나눔은 어떻게 가능한가? 많이 가진 자가 조금 가진 자를 동정할 때? 내가 내놓은 만큼 받으리라는 보상심리가 작동할 때? 묵자는 말한다. “이롭게 하고 사랑하는 것은 생각해 주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대취 [大取]) 생각해주다니 무엇을? 그도 나와 같이 삶을 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말은 그러한 존재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카렌 암스트롱은 이를 “공감”이라고 했다. 나눔은 바로 여기에서 가능해진다.
공감 그리고 나눔. 겸상애, 교상리. 이것은 이천년을 넘어 묵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공존(共存)의 메시지이다.
○ 천하 엎으려 목숨 걸리라!
– 최고 영수의 외아들도 묵가 법대로 처형… 차세대 지도자 부실해 망각 속으로
묵가의 조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전국시기에 활동한 맹자(약 372∼289 서기 전)는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楊朱·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不歸楊, 則歸墨. <등文公> 下-9)고 한탄했다. 맹자는 묵자(약 475∼396 서기 전)가 죽은 뒤 두 세대쯤 지나서 활동한 인물이다. 이를 보면 묵자 사후에도 묵가의 학설은 크게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가 죽은 뒤 한 세대쯤 지나 활동한 인물인 한비자(약 279∼233 서기 전)는 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世之顯學, 儒·墨也. <顯學> 50-1) 한비자의 활동 시기는 묵자 사후 다섯 세대쯤 지난 때이다.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학문(顯學)’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그러나 한대 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청대에 고증학자들에 의해 묵가 연구가 부활할 때까지 <묵자>를 읽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처럼 세력이 장대했던 학파가 어떻게 이토록 급속도로 몰락하여 완벽한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을까. 불가사의한 일 가운데 하나다. 흩어진 자료의 파편 속에서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묵가 조직의 엄격함 드러난 복돈의 비극
먼저 묵자가 죽은 뒤 묵가 조직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자. 묵가 집단은 최고 지도자인 거자(鉅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조직원은 ‘묵자’(墨者)라 불렸다. 묵가의 초대 거자는 물론 묵적(墨翟)이었다. <여씨춘추>에는 묵가의 거자로 복돈(腹돈), 맹승(孟勝), 전양자(田襄子)라는 세 인물이 나온다. 이들의 활동 시기를 대조해 보면 묵적이 죽은 뒤 복돈―맹승―전양자의 순서로 ‘거자’의 의발이 전승된 걸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맹승과 복돈은 묵가 조직의 단면을 보여주는 매우 강렬한 일화를 남겼다. 먼저 복돈에 관한 <여씨춘추>의 기록이다.
묵가의 거자인 복돈은 진(秦)나라에 살았는데, 그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선생은 나이도 많고 또다른 아들이 없으시니 과인이 이미 형리에게 아들을 처형하지 말도록 조처를 취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제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복돈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묵자의 법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해친 자는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저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자식을 사면하셔서 처형하지 않도록 하셨더라도 저로서는 묵자의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답한 뒤 혜왕의 사면을 허용하지 않고 결국 자식을 처형했다.(<去私>)
끔찍한 일이다. 묵가의 거자 복돈은 자기 외아들조차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묵가 집단의 법에 따라 처형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진 혜왕의 재임기간은 서기 전 399년부터 서기 전 387년까지이므로 묵자가 죽은 직후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묵가 조직이 국가의 법률과 별도로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있었고, 거자가 묵가의 법 집행권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군주가 비록 사면하더라도 묵가의 기율이 허락하지 않으면 최고 영수인 거자의 아들조차 달아날 구멍이 없었다.
<논어>에는 이와 정반대의 논리가 나온다. 초나라 섭현의 영윤이던 섭공자고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무리에 몸소 바름을 실천한 이가 있으니,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아비가 훔쳤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무리의 바름은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줍니다. 바름은 그 안에 있습니다.”(<子路> 13-18) <맹자>에도 닮은 상황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순임금이 천자로 있을 때, 만약 순임금의 아비인 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사법 담당자인 고요는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인가.” 이 고약한 질문에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고요는 법을 집행하기 위해 고수를 잡으러 나섰을 것이고, 순임금은 천자 자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 아비를 업고 외딴 바닷가로 달아나 죽을 때까지 즐거이 살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盡心> 上-35) <맹자>의 이야기는 물론 실제상황은 아니지만, 이런 데서 유가와 묵가의 차이가 드러난다. 아마도 유가의 논리가 사람의 본디 심성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그게 유가의 미덕이라면, 묵가의 미덕은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변됨을 취하는 데 있다.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어 세습귀족 중심의 세상을 철저하게 바꿔보겠다는 뜻을 세운 묵가로서는 유가처럼 ‘은둔’ 같은 피난처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외아들을 죽여야 했던 복돈의 비극은 겉보기엔 상식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묵가 조직의 상황을 이해하면 거자인 복돈조차도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도 재임중에 자기 아들이 감옥에 가는 일을 막지 못하지 않던가.
.자결한 맹승을 따라 죽은 제자 183명
아마도 복돈 다음으로 거자의 자리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맹승은 더욱 끔찍한 일화를 남겼다. 역시 <여씨춘추>에 실려 있다. 맹승은 초나라의 양성군과 가까이 지냈다. 양성군은 그에게 나라의 수비를 맡기면서, 패옥을 둘로 나누어 신표로 주었다. 두 사람은 “신표가 맞으면 명에 따른다”고 서약하였다. 서기 전 381년, 초나라의 도왕이 죽은 뒤 벌어진 내란에서 양성군은 왕실에 도전했다가 달아났고, 초 왕실은 양성군의 봉지를 몰수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양성군의 봉지를 지켜주겠노라고 패옥을 나눠 가지며 약속했던 맹승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의 봉지를 맡으면서 신표를 나눠가졌다. (…) 우리 힘으로는 초나라 왕실이 양성군의 봉지를 몰수하려는 걸 막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제자 서약이 맹승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죽어서 양성군에게 이롭다면 죽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죽음을 선택하는 건 양성군에게 이로울 게 없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묵자의 조직을 끊는 일이니 마땅하지 않습니다!” 맹승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양성군에 대한 나의 관계는 스승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피한다면 지금부터 세상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쳐놓을 것이고, 어진 벗을 구할 때에도 묵자학파의 사람들을 제쳐놓을 것이며, 좋은 신하를 구할 때도 반드시 묵자학파의 사람들을 제쳐놓을 것이다. 내가 지금 죽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를 실천하고 그 업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나는 장차 거자 자리를 송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양자에게 넘기려 한다. 전양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찌 묵자의 조직이 세상에서 끊어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맹승은 거자 자리를 전양자에게 넘기고 자결했다. 맹승이 죽자 그를 따라 함께 자결한 제자가 183명이었다.(<上德>)
<회남자·태족훈>편에는 “묵자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 180명은 모두 불 속에 뛰어들고 칼날을 밟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을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묵가 조직을 평하고 있다. 이런 평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돈과 맹승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묵자의 ‘거자’가 ‘선양’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기보다 더 뛰어난 다른 동지에게 자리물림했음을 알 수 있다.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버리는 투철한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조직이었기에 묵가 조직이 의로운 협객인 ‘유협’(游俠)의 선구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한번 약속한 일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는 이런 불 같은 의협정신 때문에 묵가 조직은 맹자와 한비자의 활동시기까지 자신들의 정치강령으로 천하를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묵적, 복돈, 맹승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인상적인 지도자는 더이상 등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빼어난 지도자가 없을 때 조직 내에는 반드시 분파투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한비자는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한다. <장자·천하>편에는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別墨)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고 전한다.
.가장 오래된 좌파 조직의 흥망성쇄
어떤 정치 집단 안에 비슷한 수준의 그릇을 지닌 지도자 두 사람이 존재한다면 두 사람은 일쑤 관뚜껑에 못이 박힐 때까지 서로 헐뜯고 싸운다. 우리는 양 김씨에게서 좋은 사례를 구경하고 있다. 두 사람의 그릇이 비슷할 때, 양보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사실은 더 큰 그릇이다. 불행하게도, 묵가 조직에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처럼 그런 지도자가 등장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조직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묵가의 원대한 뜻을 실현하지 못한 채 묵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인류 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컸던 좌파 조직은 이렇게 망각의 세월 속으로 묻혀갔다.
○ 회남자에서의 묵가 비판과 수용
본문에서는 『회남자』의 중심 사상 가운데 묵가와 관련 있는 내용을 개괄하고 다음으로 전체 내용에서 묵가 사상에 대한 비판과 수용의 측면으로 대별하여 서술하였다. 여기서 전제해야 할 것은 이 책은 개인의 저술이 아니므로 각 편의 내용이 일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한초 사상적 융합의 필요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지만, 각 편의 내용이 심지어 상호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첫째, 『회남자』에서의 유가와 묵가를 비롯한 제가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황로도가의 이상에 어긋나는 몇 가지 이념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며, 공자와 묵자를 병칭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묵자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묵가 이념을 비판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회남자』에서는 황로도가를 기본으로 하고 인의(仁義)로 보완하는 입장이므로 유가를 완전배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자를 묵자와 함께 성인으로 높이고, 예악(禮樂) 또한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의와 예악으로 잘못된 것을구할 수 있지만 최선의 정치에 통달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둘째, 『회남자』에서는 묵자를 성인으로 높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실천적 측면을 높이 칭송하였다. 또한 묵가의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한다”, 혹은 “침략 전쟁 비판” 등의 이념에 대해서는 명시적인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양자의 이러한 상호 관계는 묵가가 학파로서 진한(秦漢) 연간에 침체된 것과 상관없이 묵가의 이념과 묵자 개인의 영향력은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요컨대 묵가의 민본주의적 측면은 『회남자』의 정치사상체계가 정립되는 데 중요한 이론 근거로 활용되었다.
영어 초록
In the main body, the contents related to Mohism among the central ideas of 『Huainanzi』 are summarized, and then regarding the whole contents, Mohism is described in a general classification of criticism and acceptance. What needs to be assumed here is that this book has not been written by one person, so it“s difficult for the contents of each chapter to be consistent. It certainly seems to have resulted from the necessity for ideological convergence in the early days of Han, yet some contents from different chapters are even contradictory one another. First, the criticism of all the schools including Confucianism and Mohism in 『Huainanzi』 is only limited to some thoughts that are against the ideals of Hwang-Lao Taoism. Moreover, when Confucianism and Mohism are ranked together, it“s used as a pronoun passing judgement on Mohism rather than the criticism of the person, Mo-tzu. 『Huainanzi』 has the position to have Hwang-Lao Taoism as its foundation, and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仁義) as supplement, so it doesn“t completely exclude Confucianism. Rather, Confucius is revered as a saint with Mo-tzu, and manners and appreciation for the arts(禮樂) are not entirely denied. Yet, it has the stance that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and manners and appreciation for the arts can save what has been wrong, but cannot master the best politics. Second, in 『Huainanzi』, Mo-tzu is praised as a saint and, simultaneously, the aspect of an individual“s practice is complimented highly. In addition, Mo-tzu“s thoughts of “bringing out advantage of the universe, and removing harm”, or “criticism of an aggressive war” and so on are accepted positively, even though not explicitly. This mutual relation between the two implies that the ideas of Mohism and Mo-tzu“s personal influence had continued regardless of the depression of Mohism as a school from Jin era to the early days of Han. In summary, the democratic aspect of Mohism was used as an important theoretical ground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political ideological system of 『Huainanzi』.
_ 윤무학(Mu Hak Yun) /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논집 49권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