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주의 (觀點主義, perspectivism), 객관주의 (客觀主義, objectivism)와 주관주의 (主觀主義, subjectivism)
‘관점’ (a point of view)이란 철학에서 사고를 특정하게 진술하는 방식이며, 어떤 개인적 견해로부터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의미상 동일한 단어는 견해 (perspective)이다. Margarita Vázquez Campos와 Antonio Manuel Liz Gutiérrez는 “관점의 개념” (The Notion of Point of View )이란 책에서 개념의 구조를 포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이 충분하게 분석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헬라 철학자 파르메니아와 헤라클리토소로 부터 출현과 실재에 대한 관계를 논의하고 있다. 자신들의 관점은 실재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관점과 실재의 관계성의 하나의 예화로서 비트겐스타인의 사진이나 모델에 대한 이론을 주목한다.
○ 관점주의 (觀點主義, perspectivism)

관점주의는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본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본질/현상, 선/악, 진리/오류의 이분법에 입각하여 세계를 사유한다면, 관점주의는 세계에는 본질-현상, 선-악, 진리-오류는 관점에 따라 이동한다고 본다.
관점주의는 ‘가치평가에서 관점주의’를 말하는 것이며, ‘관점에 따른 가치의 이동’로 정의할 수 있다.
① 관점주의가 ‘관계의 문제’일 때
먼저, 관점주의가 관계의 문제일 때, 자연과 사회의 경우를 들어보겠다.
– 자연에서 관점주의: 깊은 산 오솔길 옆 작은 연못에는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큰 물고기에게는 행복한 일이, 작은 물고기에게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지만, 그 연못 (자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사회에서 관점주의: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일을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일을 연장하고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경우, 그는 구매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노동일을 표준적 길이로 제한하려는 경우, 그는 판매자로서 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 사이에서는 힘이 사태를 결정짓는다.”
그런데 관점주의적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모든 사태를 선/악 혹은 진리/오류로 구분하는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약자는 옳고 강자는 그르다거나, 내게 유리한 것은 선이고 불리한 것은 악이라는 가치평가를 넘어서, 관점과 맥락에 따라 자유로운 가치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② 관점주의가 ‘주체의 문제’일 때
그럼, 관점주의가 ‘주체의 문제’일 때,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태도를 사례로 들어보겠다.
– 기존의 가치에 복종하는 방식: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와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형이상학적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방식: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의 한계를 깨닫고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 기존의 가치를 극복하는 방식: 형이상학에 대한 ‘관점주의적 긍정’으로 형이상학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처음 방식을 시대성으로, 다음을 반시대성으로, 마지막을 비시대성으로 정의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점주의를 획득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이고 지배적인 가치를 넘어서게 할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가치를 생성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것이 내 안의 강자를 구성하는 방식이며, 자기극복의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계기일 것이다.
“인간이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개념과 불안에서 벗어나, 예를 들어 사랑스런 작은 천사나 원죄를 더이상 믿지 않으며,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도 더이상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상당히 높은 단계의 교양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해방의 단계에 있다면 그는 ···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후진운동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표상들의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정당성을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를 장려하는 최대의 힘이 어떻게 거기에서(형이상학) 나왔고, 후진운동이 없으면 지금까지의 인류 최대의 성과를 박탈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철학적 형이상학에 관한 한 부정적 목표 (어떤 긍정적 형이상학도 오류라는)에 이른 사람은 많아지지만, 그 몇단계 뒤로 가는 사람은 적다. 사람들은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 너머까지 바라보아야 하지만, 그 계단 위에 서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장 계몽된 자라도 기껏해야 형이상학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정도에서 머무른다 : 여기서도 경마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트랙의 끝을 돌아서와야 하는데 말이다.” _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중
○ 객관주의 (客觀主義, objectivism)

객관주의 (客觀主義, objectivism)는 러시아계 미국 작가 아인 랜드에 의해 고안, 발전된 철학 체계다. 랜드는 ‘파운션헤드’ (1943년), ‘웅크린 아틀라스’ (1957년) 같은 소설을 통해 객관주의를 처음 표현했고, 후기에는 수필이나 비문학 도서를 통해 활동했다. 여기에 랜드의 지적 후계자로 지명된 전문 철학자 레너드 페이코프가 보다 형식적인 구조를 잡았다. 페이코프는 객관주의를 변화의 대상이 아닌 “닫힌 계”라고 설명한다.
객관주의의 중심 교리는 이러하다.
– 형이상학: 실재란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은 감각을 통해 실재에 접촉한다.
– 인식론: 감각을 개념의 형성과 귀납 논리라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인간은 객관적 지식을 얻는다.
– 윤리학: 인간의 정당한 도덕적 목적성은 그 자신의 행복을 추구 (합리적 이기주의)하는 것이다.
– 정치학: 그리고 그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완전히 보장할 수 있는 사회체계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유일하다.
– 미학: 인간의 삶에 있어 예술의 역할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물리적 형상을 가진 실재의 선별적 재현물 (예술작품)을 만들어서 인간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강단 철학자들은 랜드 및 그 추종자들의 철학을 거의 평가절하하거나 아예 무시한다. 하지만 객관주의는 미국의 자유의지주의,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주관주의 (主觀主義, subjectivism)
주관주의 (主觀主義, subjectivism)는 일반적으로 철학 상의 관념론을 말한다.
그것은 정신· 의식이라는 주관의 부분을 기초로 하며, 물질· 자연이라는 객관적 부분은 그것에 대한 부수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념론 가운데에서 객관적 관념론은 주관주의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 상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면에서 개개의 사람들이 자기 중심으로 해나가는 것도 주관주의라고 말한다.
주관주의에 대립하는 것은 ‘객관주의’이다.
– 단순주관주의 : 단순 주관주의 (simple subjectivism)는 윤리학적 주관주의의 한 이론으로, 도덕적 진술은 그 화자의 태도에 대한 보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어느 누군가가 ‘그것은 행해져야 할 일이다’라고 자신의 도덕적 견해를 밝힌다면, 이는 그가 ‘그것’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아닌, 단지 그것에 찬성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단순 주관주의는 윤리학적 주관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이론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화자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다. 화자가 다수일 경우, 화자간의 의견 불일치를 설명할 수 없다.
– 간주관주의 : 상호주관적(相互主觀的)이라고도 한다. 주관적인 경험이나 생각이 상호, 혹은 다자간에 공감대를 이루는 경우 간주관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주관적 관점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되어 형성되는 인식의 방식이다.
주관적 인식이 개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공유되고 상호 이해, 확장을 거치면 한 범주의 사람 사이에 공유되는 인식의 틀이 발생하고, 그러한 인식은 그 범주 안에서는 국지적으로 객관적인 것과 유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이 때의 인식을 간주관적이라고 한다.
언어학적인 주관적, 객관적개념과는 다소 축이 다르고 사회과학의 주관주의 사조에서 강조되는 개념이다. 특히 현상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미학에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미의 성질에 대한 논의는 대상에 대한 미적 경험, 미적 태도와 밀접히 연관시켜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와 예술에 관한 이론적인 반성과 사고는 멀리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되어왔지만 하나의 학문으로서 ‘미학’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 독일의 바움가르텐에 의해 ‘감성적 인식의 학문’ (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 이라고 규정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미에 관한 학문을 나타내는 말이다.
미학은 미에 관한 학문이므로 그 대상이 미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미가 주로 예술에서 발견된다는 점과 미의 개념이 추상적이고 애매한테 반해 예술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다는 점을 논거로 예술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있다.
미에 대해 혹은 예술에 대한 많은 연구들 중에 미에 대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에 대하여 보다 세밀하게 공부해 보고자 한다.
미란 그 개념의 성립 근거에서 볼 때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로 나누어지는데 그들 중 어느 측면을 인정할 것인가 그리하여 그 중 어느 측면에 연구의 중점을 둘 것인가에 따라 구별된다. 이러한 대립개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매우 애매하긴 하지만 보통 객관주의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예술작품, 일반적으로는 미적 대상의 측면으로부터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 객관주의 미학
객관주의 (objectivism)는 말 그대로 미라는 것이 대상 (object)에 내재해 있는 성질이라고 주장하며, 주관주의 (subjectivism)는 미는 개인의 주관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객관주의의 허점은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객관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어떠한 대상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나면 그 대상에 미가 내재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객관주의자들이 미를 판가름할 수 있는 조건으로 내세우는 객관적인 지표들을 다 갖춘 대상을 보았을 때도 어떤 사람들은 그 대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느낄 가능성은 아주 많다. 이 사람들이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미를 보는 눈에는 수학문제의 해법처럼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는 물리적인 비례와 질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꽃들이 일정한 질서 없이 피어있는 꽃밭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는다.
– 고대 철학자들의 객관주의 비판과 주관주의 미학 입장
고대 철학자들은 미적 주관성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철학은 객관주의의 관점을 지키면서 그 관점을 강화 시켜줄 주장은 찾았거나 미적 주관주의의 편에서 객관주의의 관점을 버리기도 한다.
1. 미적 객관성에 대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
– 사물의 속성들 속에는 미를 구성하는 속성이 있다.
– 우주중심적
– “질서와 비례는 아름답고 유익하지만, 무질서와 비례의 결여는 추하고 쓸모없다”
2. 주관주의 이론의 소피스트들의 철학
– 인간은 미의 척도
– 인간중심적
–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3. 소크라테스
– 아름다운 사물을 두가지로 구별함 : 그 자체로 아름다운것 & 이용하는 이에게만 아름다운것
– 미란 부분적으로는 객관적 & 부분적으로는 주관적 (객관적, 주관적 미 모두 존재 )
4.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학파와 같은 의견을 냈다.
– “아름다운 것치고 비례를 갖추지 않은 것은 없다”
–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사물들이 존재한다”
5. 스토아 학파는 플라톤의 객관성과 비슷한 미적 견해를 보임.
– 비례가 미를 정하며, 미는 비례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이나 객관적인 특질이라고 믿음.
– 미에 대한 판단은 인상에 근거하고 있기에 비이성적이라고 인정함.
6. 에피쿠로스 학파 ≠ 회의주의 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 – 필로데모스는 상대주의를 배제시킨 미적 주관주의 주장
* 회의주의 학파 – 미적 판단들간의 차이 강조
7. 객관주의의 견해는 철학의 학파들뿐 아니라, 특정 예술이론들에 의해서도 채택됨.
미학이란 문자 그대로 아름다움에 관한 이론적 설명을 다루는 학문이다.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설명을 시도하였다. 플라톤은 당시 흥미 위주의 미메시스 예술을 비판하고 순수예술을 격상시키려 노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반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미메시스 문예 비판을 무시하고 문학예술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원인을 미메시스에서 찾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미메시스적 미학은 이후 허치슨에게도 이어져 내려며, 이후 흄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미를 이해하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에드먼드 버크와 칸트는 ‘장엄미’와 ‘숭고미’와 허구적 개념을 만들어내 미와 착각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함께 미학과 예술철학은 정치사회적으로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가다머와 아도르노 등 일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개념을 부활시켜 미학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등장한 푸코는 당시 금기시되어온 니체의 ‘실존 미학’을 계승하여 ‘윤리’를 유희화하려는 변덕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아름다움을 설명하려 시도한 많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칸트는 일반적으로 서양 미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인식된다.
– ‘이익관심’의 중의성으로 인한 논리적 모순
칸트는 “미감판단이 규정하는 쾌감은 어떤 이익관심도 없다”고 말한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관심도, 이익타산도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미에 관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이익관심 (Interesse)이 섞이면, 그 판단은 매우 편파적이고 또 순수한 미감판단이 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간 한국 학계에서는 이 ‘이익관심 (interesse)’을 ‘관심’으로 해석하여왔다. 사실 이는 칸트가 사용한 독일어 “interesse” 혹은 영어 “interest”의 중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이들 단어에 관심, 흥미, 이익, 이해관계, 이자 등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관심”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미학의 주관주의 우위
고대부터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해 왔다.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의 성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수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견해들을 크게 두 범주로 객관주의 (objectivism)와 주관주의 (subjectivism)로 나눌 수 있다.
객관주의는 말 그대로 미라는 것이 대상 (object)에 내재해 있는 객관적인 성질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 대상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으로 인해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은 그 대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 객관주의 미학은 주관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한 18세기 이전까지 플라톤의 후광을 받아 미학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주관주의는 미는 개인의 주관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이 아니며,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는 주관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주관주의에 따르면 아름다운 속성을 가졌거나 추한 속성을 가진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대상은 미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는 둘 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어서 어떤 관점이 더 정확한지 알기 어렵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 주관주의가 좀 더 우위에 서고 있다.
○ 갈등을 보는 관점: 객관과 주관 사이 그리고 상호주관성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세대간, 집단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사회이지 않나 한다. 아마도 이것은 2000년대 이후, 정확히 말하면 2002년 월드컵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었던 경험 이후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현상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과 대립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나 집단을 이제 적대시할 정도의 수준으로 온 것 같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며 언어 전환을 통한 인식 변화의 모색은 이제 식상하게 들린지 오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SNS의 확대, 빈부격차의 심화, 지식과 정보의 분권화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론적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유명한 합리적 인식론의 아버지, 데카르트에 기반한 합리주의적 사고는 두가지 전제를 한다. 인간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고 모든 행위의 결과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식에 있어서 이러한 합리주의적 관점은 지식의 습득과 해석에 있어서 행동주의와 인지주의 모델을 낳았다. 즉, 우리가 안다는 사실 (지식)은 개인 외부에 존재할 수 있는 객체이고, 사람들이 영양분으로서 음식을 전달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절대적인 것이라는 관점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또는 지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지식은 벽돌처럼 ‘물리적으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객체가 아닌 것일 수 있다. 지식은 존 듀이의 얘기처럼, 하나의 파이를 물리적으로 조각내서 나누어 공유하는 것처럼 나누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공동의 목표를 갖고 협동적 노력을 통하거나 변증법적으로 상호간 대화작용에서 서로 반대되는 관점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것일 수 있다. 즉, 주관이 객관으로 전환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요즘 시대의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이 추구하는 것은 객관적인 지식 또는 진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나 집단의 생각은 주관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트위터를 중심으로 SNS에 의해 빠르게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여기서 집단 간 갈등은 심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식적인 수준에서 객관과 주관의 차이는 무엇일까?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객관은 4지선다, 주관은 서술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시험에서 객관식 문제와 주관식 문제는 선다형 문제와 서술형 문제를 말하는 것인데, 즉, 답을 정확히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객관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주관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또한 앞에서 얘기한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에 근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객관적 지식이나 진실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옳다고 인정하는 지식이라는 얘기인데 그것은 진정으로 맞는 것일까? 어찌보면 지식은 맥락에 크게 의존적인 것일 수 있다. 여기서는 맞다고 인정되고,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 맥락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뉴턴의 역학은 미시세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과 주관을 정확하게 구분하거나,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상황이나 사물들을 상대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채택이다.
객관적 지식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는 공유된 지식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즉, 상황에 대한 공유된 이해가 상호주관성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고, 이러한 상호주관성에 입각한 행위는 사적이고 개별적인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개인들은 어떤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 및 일차적 해석을 한다. 그리고 언어 등의 상징체계를 통한 협의 과정을 통해 상호주관성의 상태를 얻는다. 현상학적 철학자인 후설은 하나의 주관을 초월하여 다수의 주관에 공통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상호주관성으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상호주관성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약간씩은 다를 수 있지만 분명히 이러한 관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본다.
현재의 시대가 첨예한 갈등으로 대립된 사회가 된 것은 객관적인 지식,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는 가정과 관점에서 촉발된 것일 수 있다. 즉, 조직 내에서 누가 옳다 그르다는 객관적인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 간의 상황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대화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관점은 상호주관성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대화의 과정은 서로의 의견 차이만을 재확인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HRD담당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학습조직이든, CoP (community of practice, 실천공동체)든 액션러닝 등의 활동들은 어떠한 완벽하고 절대적인 지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이러한 상호주관성을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접근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기타 :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객관주의는 인간 외부의 세계에 필연적인 법칙이 있어서, 세계와 제대로 관계하려면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주관주의는 인간 자신이 세계에 법칙을 부과하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객관주의적 경향은 세계가 안정적인 질서로 유지될 때 강화되고, 주관주의적인 경향은 세계가 낯설거나 불안정할 때 대두하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안정된 세계에 산다면, 그냥 그 세계의 법칙이나 규범을 따라서 살면 된다. 반대로 불안정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 세계에 자신이 생각한 법칙을 부과해야만 한다.
객관주의적 사유가 안정된 농업 공동체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주관주의적인 사유가 유목민, 여행자, 혹은 상인들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6세기 유라시아의 양 끄트머리를 살펴보면 우리는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상인 계층의 등장과 그에 따라 확대되었던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다. 그러니까 이미 삶의 차원에서 16세기 이전에도 변화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단지 그 변화가 16세기 들어 인간의 내면에까지 영토를 넓혔을 뿐이다.
객관주의니 주관주의니 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16세기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합의 사항이 존재했다. 바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존재이다. 그것이 기독교처럼 인격적인 신일 수도 있고, 유학에서처럼 비인격적인 태극(太極)일 수도 있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기독교 사유는 신(God)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유교적 사유는 태극 혹은 이(理)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객관주의적 사유 경향은 객관을 거쳐야만 절대자의 뜻이나 법칙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이고, 반대로 주관주의적 사유 경향은 객관을 거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통해 절대자의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인 셈이다.
그러니까 16세기의 지적 변화를 이해하는 객관주의나 주관주의라는 용어는 조심스럽게 쓸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외부 세계의 법칙을 알아야 신의 뜻을 안다는 입장, 혹은 사물의 법칙을 알아야 전체 법칙을 지배하는 하나의 법칙, 즉 태극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 바로 이것이 가톨릭과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16세기의 객관주의다. 반대로 외부 세계나 사물들을 거치지 않고도 자기 마음을 통해 신의 뜻이나 태극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당시 새롭게 대두하던 프로테스탄티즘과 양명학이 표방한 주관주의적 사유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질서를 긍정하는 탓인지 가톨릭과 주자학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신이나 태극의 명령이라고 긍정한다. 가톨릭에서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를 일이다. 반면 프로테스탄티즘과 양명학에서 중앙집권적 체제는 절대적인 필연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주관주의적 경향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자와 자신의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개인이 성경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잠시 16세기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펼쳐진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이행, 그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차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 등장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구절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物이라는 동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격’을 ‘궁리(窮理)’라고 독해한다.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주희에게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해 앎을 이룬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격’이란 글자에 ‘자격’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에 주목한 왕수인은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는 뜻을 가진 ‘정기부정(正其不正)’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왕수인에게 격물치지는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서 앎을 이룬다.’는 뜻이 된다.
이런 해석 차이 때문에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내 마음과 무관한 객관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반면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그러니까 이미 인간적 가치가 부여된 것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객관적인 사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왕수인이 평상이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心外無物)”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와 무관한 객관적인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주저 『전습록(傳習錄)』에서 왕수인은 주희를 비판하면서 말했다.
“무릇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가령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理)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
이제야 우리는 왜 왕수인이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로 해석했는지, 그리고 ‘물’을 나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부모를 모시는 데 불효한 것이 바로 ‘바르지 않은 것(其不正)이라면,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正‘ 효를 행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었던 것이다.
외부의 사물로부터 내면의 마음으로 시선 돌리기, 즉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일어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그것을 바로잡으면 된다. 이런 강한 주관주의적 경향은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하며 등장한 상인 계층에게 크게 환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마음만 바로잡으면 성인(聖人)이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사농공상의 말단에 있다고 천대받던 상인들에게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춘하추동 사계절의 법칙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 법칙을 어기고서 어떻게 농사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반면 상인들에게는 객관적인 법칙보다는 주관적 결단이 더 중요한 법이다. 무엇을 팔 것인지, 어디 가서 사고팔 것인지, 그리고 가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이런 주체적인 결단에 목숨을 거는 계층이 바로 상인들이니까 말이다.
양명학에 환호했던 또 하나의 계층도 상인처럼 개인적 결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농부처럼 안정된 문신文臣들이 아니라 상인처럼 불안정한 전쟁에 뛰어들어 매사 신속하게 결단할 수밖에 없는 무신(武臣)들이었다.
중앙집권적이고 객관적 질서를 중시했던 사람들, 즉 관료, 관료 후보자들, 혹은 농민들은 주자학과 공명하는 경향을 강하게 띤다. 반면 상인 계층이나 무신들처럼 다원적이고 주체적인 역량을 긍정하던 사람들은 양명학에 깊은 호감을 피력하곤 했다. 분명히 16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의 사상사적 경향을 변별해 주는 요소도 없을 것이다. 문신과 농민의 정치적 우월성을 강조했던 조선은 개항 때까지 집요하게 주자학적 사유를 고집했지만, 무신과 상인이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일본은 개항 때까지 양명학적 사유를 면면히 이어 갔다.
16세기에 유라시아 대륙 양 끝에서 자본주의를 예감하는 주관주의적 사유 경향이 대두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양명학, 그것은 정착민적 사유에서 유목민적 사유로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농민적 사유에서 상인적 사유로의 이행이랄 수도 있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면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을 출간하고, 중국의 위잉스 (余英時)가 『중국 근세 종교 윤리와 상인 정신(中國近世宗敎倫理與商人精神)』이란 책을 출간해 이 문제를 탐구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_ 문사철 /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인문 교양의 보급과 출판을 목표로 활동하는 기획 집단. 『근현대사신문』, 지식의 사슬 시리즈 등을 기획 출간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