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필
늦어진 반성문
‘이 아이는 누구니?’ 결혼 6년차가 되었는데도 2세를 낳지 않고 있는 딸네집 사위 책상위에 웬 사내아이 사진이 놓여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위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미 태어났는데 형편이 어려워 도움이 절실한 아이 하나를 돕기로 했다는 딸의 대답이 단호하다. 동양계가 친근감이 있어 몽골아이를 선택하여 몇 년째 돕고 있다고 한다. 사진이 왔는데 사위가 보더니 자기 어릴 적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무척 좋아했다니 찰떡궁합이다. ‘평소에 인정을 베풀면 훗날 좋은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명심보감을 떠올리며 세계시민 정신을 가진 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난날의 나는 남 주는 걸 좋아하긴 했다. 내 맘에 들면 친구 삼으려고 뭐든지 잘 주고, 신세지면 꼭 답례를 해야 하고, 싫증난 물건은 필요한 이에게 아낌없이 주어버리곤 했다. 수출을 하던 남편 회사에서 납품 했던 원단 3000마를 퇴짜 맞은 적이 있었다. 동대문 시장에 넘기라는 주변의 유혹을 무시하고 여기 저기 다 나누어주고 말았다. 그 중 모자원이나 자선 병원에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한다고 하니 뿌듯했다. 나머지 700마 정도를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신설 초등학교에 커튼을 만들어 달아 주었다. 어느 날 동네 미용실에서 아줌마들의 수다를 들어보니 한참 왜곡된 우리 집 이야기였다. ‘이 동네 초등학교에는 얼마나 부자들이 많은지 글쎄 어떤 학부형이 학교 전체 커튼을 700만원이나 들여서 해줬다네요.’ 맙소사, 골칫덩어리 원단이 한참 부풀린 현찰로 둔갑을 하다니… 로댕이 건너 건너 오뎅이 된 우스갯소리가 새삼스러웠다.
이민 오기 전 10년 넘게 살던 단독주택에 쌓여있는 잡동사니를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삿집 센터에 일곱 번째 트럭을 예약 할 때 웬 짐을 이렇게 사방으로 퍼나르냐고 자기네도 좀 달라고 농담을 걸어 올 정도였다. 화실 작업대, 석고상, 이젤, 화판 따위는 아무나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제자들에게 실어 보냈다. 진정한 의미의 따뜻한 배품이나 아름다운 나눔과는 거리가 먼 시원한 대청소 작업이었다. 이민화서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고 사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집을 줄여 이사를 할 때마다 버리고 나누어 줄 핑계거리가 생겨서 갈등하지 않고 비우고 또 비워 버렸다. 그런 나의 나눔은 지속적이거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푼 것은 아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순수한 의미의 나눔과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내 편리를 위해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자선은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남에게 베풀 줄 알 때 그것이 곧 자선이요, 사랑이다.’ 라고 가르치신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가슴 속 깊이 새겨본다.
둘째 아들네 장식장 속에 피부색이 검은 아기사진 액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첫 아들을 낳아 기뻐하며 애지중지 돌보면서 문득 사랑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여운 아기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 아이가 생길 때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기를 돕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보내온 사진 속에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아기에게 눈길이 가더라는 며느리의 말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어쩌면 그런 갸륵한 생각을 다 했을까. 딸과 아들 부부가 기특해서 내 가슴이 뜨거운 포만감으로 터질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의사 아들, 변호사 사위도 부럽지 않은 충만함에 취해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끊임없이 주변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선행에 갈채를 보내고 감동 받아 깊이 반성하고 결심도 해봤지만 아직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선을 행하는데 나중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고 괴테가 단호히 말하지 않았던가. ‘자선을 많이 베풀면 보다 빨리 평화가 온다.’는 숭고한 음성에 바짝 귀 기울여야겠다.
최근에 갑작스레 남편이 NGO에 가입한다고 해서 의아했다. 나이 칠십에 한비야 같이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다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알고 보니 모월간지의 별책 부록 ‘인생 2막을 연 사람들’에 소개된 월드 투게더 회장인 전 육군참모총장의 감동 스토리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대한민국 60만 대군을 지휘하던 군 최고 지휘관이 소셜 서비스(Social Service)로 방향을 바꾸어 활약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이라크 크루드지역의 전쟁 피해 아동 지원 사업을 체계화하고, 캄보디아, 미얀마, 볼리비아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하며, 어린이 교육을 통한 의식계몽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국군의 해외 파병국 중, 이미 지원중인 베트남, 동티모르를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아이티, 서부 사하라, 소말리아 등에 우리 국군이 이룩한 파병효과를 민간으로 연결하고 지원해서 대한민국 국격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아,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 가슴 뛰는 벅찬 감동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부나 건강, 아름다움, 명예를 뛰어넘는 행복의 조건은 자부심과 나눔이라고, 특히 남에게 뭔가를 나누어 줄 때 인간의 뇌에서는 춤 출 때 느끼는 기쁨에 버금가는 호르몬이 분비 된다고 한다.
현재 2만 명인 월드 투게더의 후원 회원을 10만 명으로 확대해야 긴급 재난 발생 시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NGO로 발전해서 차원 높은 사업을 펼칠 수 있다고 한다. 후원금 조금 내고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회원이라고 으스대는 남편 뒤에라도 바싹 붙어 서서 나눔과 봉사라는 시대정신에 합류해야 갰다. 내 시작을 심히 미약하나 창대해지길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호주문협(수필분과) 박조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