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개혁의 횃불을 들다(1)
10월의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 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항의 반박문을 붙였던 날이다.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하지만, 영어로 ‘개혁'(Reformation)이다. 중세는 ‘정치와 종교’와 분리되지 않고 상생하는 관계였다. 교회는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기에, 세상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역할을 올바로 감당할 수 없다. 20세기의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 받는 칼 바르트도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1) 로마와 기독교
기독(基督)이란 그리스도(Christ)를 한문으로 음역한 말이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기독교인이란 뜻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사도행전 11:26절에서 등장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안디옥에서 살았다. 이때 안디옥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비하하며 부른 용어이다. 기독교의 본격적인 박해는 AD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부터이다. 백성들의 원성이 황제에게 향하자, 네로는 기독교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기독교는 AD 64년부터 공인되는 313년까지 지하종교였다.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로마가 점령한 모든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졌다. 서로마의 수도는 로마, 동로마의 수도는 지금의 이스탄불이다. 나라는 분리됐지만 기독교는 분리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언어, 지역, 교리, 영토 등의 갈등으로, 1054년 서로마는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 동로마는 ‘정교회'(Orthodox Church)로 분리되었다.
2) 서로마와 동로마
서로마는 476년에 게르만 족에 의하여 멸망했다. 게르만족 중 가장 강력한 프랑크족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교회의 교황과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서로마 제국을 재건했다. 카롤루스가 죽고 영토를 3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분할한 나라는 후에 프랑스, 이태리, 독일이다. 962년 오토 1세가 로마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의미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지만,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었다. 지금의 독일인 ‘신성로마제국’은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나라이다. 이곳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종교 전쟁’도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동로마는 1453년에 무슬림에 의하여 멸망했다. 서로마가 멸망하고 무려 1000년이나 더 나라를 지탱하였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긴 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고, 무슬림이 점령한 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3) 개혁의 횃불을 들다
모든 사건에는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이 있다. 종교개혁의 직접적 원인은 베드로 성당의 건축이다. 무려 100년이 넘게 건축했으니 건축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엄청난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교황청은 면죄부(免罪符)를 발매했던 것이다. 면죄부는 ‘죄를 용서받는 증서’이다. 자신의 죄 뿐 아니라,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죄까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면죄부를 가장 잘 판 ‘테첼’이란 사람이 있다. 타고난 수사학자이고, 뛰어난 설교가로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 면죄부를 안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교황청은 적폐의 원산지였다. 성직을 매매하기도 하고, 뇌물로 높은 성직을 사기도 하고, 비밀 결혼까지도 성행했다.
신성로마제국이었던 독일이 면죄부를 팔기가 가장 쉬운 곳이었다. 이웃나라는 국가주의가 팽배했지만, 독일은 제국이어서 영주중심으로 나라가 통합되지 않은 상태였다. 영주들은 돈이 로마로 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루터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영주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르네상스로 인간의 이성이 눈을 뜨게 되었고, 중세의 봉건제도가 와해되고 상인세력들이 등장하였고, 14세기의 유럽인구의 1/3이 죽었던 흑사병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한방은 금속활자의 발견이었다.
개혁의 횃불을 들다(2)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제 3차 여행 때 고린도에서 기록하였다. 바울의 13권의 성경 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이다. 로마서를 수식하는 많은 수식어들이 있다. “성경 중의 성경”, “성경의 다이아몬드”, “반지의 보석” 등으로 신학자들은 로마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의 핵심은 구원인데, 로마서는 구원론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설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성경 속의 ‘조직신학’과 같다.
로마서는 신앙의 거장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거스틴은 길을 가다가 “들고 읽어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폈을 때 로마서 13: 12-14절을 읽게 되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 12~14). 이 말씀으로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수도사이고 교수였던 루터는 풀리지 않는 구원의 문제로 날마다 고민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 말씀으로 구원이란 ‘인간의 의’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얻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인들의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중에 성령을 받게 되었다.
로마서의 핵심주제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의’를 중심으로 로마서를 3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8장까지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 9-11장 하나님의 의의 변론, 12-16 하나님의 의의 적용이다. 특별히 마틴 루터는 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라는 3개의 기둥을 바탕으로 개혁의 횃불을 높이 올렸다.
첫째, 오직 성서(Sola Scriptura) – 전통
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인 동시에 신학의 근거와 원천이다.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신학의 진리성은 성경에 의해 결정된다. 성경은 진리의 영원한 표준이며 척도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전1:21)
루터는 진리의 기준은 교리나 전통이 아닌 성서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보름스 궁전에서 열렸던 재판에서, 그가 쓴 모든 책과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 받았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내 주장이 성서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철회할 수 없다”
월요일에 멜버른에서 Intercultural Workshop에서 있었다. 다문화에 사역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서 군국의 다문화 정책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이란 사람인 ‘Kevin’을 만났다. 그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에 이주 노동자로 일을 했다.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직장도 잡고 교회도 다니게 되어, 무슬림이었던 그가 크리스천이 되었다. 한국말이 서툴다 보니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이란어(페르시아어)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어 참석하게 되었다.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게 되면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이란으로 돌아가서 종교적인 박해를 받다가, 2012년에 난민으로 호주에 올 수 있게 되었다. 호주에서 구세군 교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지금은 구세군 직원으로 다문화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다.
종교개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Back to the Bible’이다. 마틴 루터는 빼앗겼던 성경을 다시 국민에게 돌려준 사람이다. 가톨릭은 지금도 성경 못지않게 전통을 중시한다. 성경을 채택한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성경도 중요하지만 교회 전통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오직 믿음(Sola Fide) – 행위
하박국 선지자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말씀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라고 강조했고, 루터는 이 말씀을 의지하여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고행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고해성사를 했지만 마음에는 참 자유가 없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의 의’가 무슨 뜻인가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던 중, 마침내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의 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한다. 의로운 분이 의롭다고 칭할 때 비로소 의로워 질 수 있는데, 그 의는 그분을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가톨릭에는 믿음에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 행위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뜻하지만, 반드시 7대 성례전에 참여해야만 한다. 7가지 성례전은 핵심적인 신앙행위이다. “1.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2. 성체성사를 통해 몸과 마음에 힘을 주는 양식을 얻는다. 종종 마음에 상처가 생겼거나 더러워진 날에는 3. 고해성사로 상처를 씻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4. 견진성사를 통해 신앙인으로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면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5. 성품성사를 통해 하느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바치거나, 6. 혼인성사를 통해 가족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나 지치고 힘들거나 몸이 아파서 생을 마감해야 할 상황이 생길 때 7. 병자성사를 통해 치유의 은혜를 받거나 편히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다.”
루터는 인간이 태어나는 요람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무덤까지 교회의 7대 성례전이 인간을 억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1521년에 쓴 3권의 논문 중에 하나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바벨론 포로기 70년에 비유로 ‘교회의 7대 성례전이 인생 70년을 묶고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큰 벌이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세례와 성만찬만 인정하고 있다. 성공회는 개신교 신학을 가졌지만, 7 성례전을 중요시 여긴다. 성공회 신부였던 요한 웨슬리는 미국을 선교를 떠나 교회에서 소피아라는 아리따운 소녀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가 교회의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자, 너무 화가 나서 성례전 때 소피아와 남편에게 영성체를 주지 않았다. 이 일은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웨슬리는 이일로 1년 9개월 만에 도망가듯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셋째, 오직 은혜(Sola Gratia) – 공로
우리는 구원을 ‘조건이나 자격’과 연관시킨다. 이런 자격이 되면, 저런 조건을 갖추면 ‘내가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앙은 조건이나 자격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런 조건이나, 저런 자격을 갖출 수 없는 자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無知의 知’라고 한다. ‘무지의 지’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이 아닌, 은혜이다. 가톨릭에서는 은혜만으로 부족하고, 인간의 공로를 강조한다. 공로란 일을 마치거나 목적을 이루는데 들인 노력과 수고 또는 공적을 뜻한다. 일을 잘 마치면 퇴임할 때 ‘공로패’를 수여한다. 하지만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은혜란 상이 아니라 선물이다. 상은 자격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지만, 선물은 자격이 없어도 받을 수 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은혜이고,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도 은혜이고, 천국 가는 것도 오직 은혜로만 간다. 믿음조차도 은혜라는 것을 아는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어릴 때 할머니 따라 교회를 다녔다. 학교 문턱도 가보지 않은 할머니는 교회를 다니시며 한글을 깨쳤다. 할머니의 애창가는 ‘나의 죄를 씻기는’이다. 3절에 ‘나는 공로 없으니 예수의 피밖에 없네’란 구절이 있다. 어릴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고 노력을 해야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조건 없이 구원해 주신 그 은혜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다.
개혁의 횃불을 들다(3) 경건주의 – 창 32:1-2, 딤후 2:3-6
종교개혁 후 교회는 지역 혹은 국가에 따라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분리되었다. 교회의 양분은 사회적, 경제적 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교파 차이로 인한 동일 지역 내에서도 교류가 단절되었다. .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100년이 지나자 유럽은 북쪽의 기독교와 남쪽의 로마 가톨릭으로 양분되었다. 161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에 두 명의 사신을 보내 그곳 백성들에게 개신교가 불법이라고 선포하고 모두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황제는 명령을 거부한 보헤미아 백성들을 무수하게 살해했다. 개신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인근 개신교 국가들이 지원병을 보냈고, 가톨릭 역시 지원병을 보내어 3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30년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초토화되고, 개신교 지역은 개신교로 또 가톨릭 지역은 가톨릭으로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을 맺고 휴전했다. 이후 개신교 내부에서는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 정립에 중점을 두고, 실천보다는 제도와 교리에 더 많이 치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경건주의가 등장하였다. 경건주의는 수도원의 경건이나 교리가 아니라, ‘경건한 삶’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운동이다. 세상 밖에서의 경건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성결한 삶을 살며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경건이다.
1. 필립 제이콥 스페너(1635-1705) – 경건주의(Pietism)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루터파 교회 지도자인 ‘필립 스페너’에 의해 시작되었다. 경건주의 운동은 ‘제 2의 종교개혁’이라 불린다. 교회는 교리적 시비가 아닌 신앙의 내적 경험과 행위 중심으로 신앙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신앙의 실천이 없이 신학에 빠져 있는 시대적 반성이며 요구에 따른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자선사업, 사회복지 그리고 세계선교에 앞장섰다. 그는 ‘할레대학’을 설립했다. 할레대학 출신 중 ‘진젠도르프'(1700~1760)가 있다. 그는 30년 전쟁으로 유랑하는 모라비아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지를 제공하였다. 그는 이들의 리더가 되어 모라비안 신앙공동체를 발전시켰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계를 품고 선교사로 나갔다. 1832년 고대도에서 20여일 복음을 전했던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tzlaff)도 할레대학 출신이다. 이 대학은 루터의 개혁운동 기반인 ‘비텐베르크대학’과 병합하여 지금은 ‘할레-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 대학교’가 되었다.
2. 요한 웨슬리(1703-1791) – 감리교(Methodist)
요한 웨슬리는 성공회 신부였다. 요한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사무엘 웨슬리 목사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 1703년에 태어났다. 그는 그의 모교이며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 친구들이 마련한 옥스퍼드 ‘홀리클럽’이라는 소그룹의 지도목사이기도 했었다. 미국으로 선교 가는 배안에서 우연하게 폭풍우 중에도 침착하게 찬양을 부르는 모라비안 신도들을 만나 많은 감동을 받았다. 미국에서 특별한 열매 없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진젠도르프를 만났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체험을 한다. 이후 머리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성공회에서는 그의 설교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 강단을 내어 주지 않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웨슬리는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웨슬리 사후에 ‘영국 감리교’가 탄생하게 되었고, 감리교로부터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3. 윌리엄 부스(1829-1912) – 구세군(Salvation Army)
윌리엄 부스 영국의 감리교 목사이자 구세군 창시자이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인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당포에서 일하게 됐다. 15세 때 감리교회에서 크리스천이 됐다. 그는 노팅엄에서 출생하여, 온몸으로 빈민들의 비참한 삶을 체험하였기에,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빈민가인 동부런던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1865년에 시작하여, 1878년 구세군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감리교 운동은 산업혁명 초기에 시작되었고, 구세군은 산업혁명 후기에 태동되었다.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기득권층을 위한 교회로 전락하였다. 교회는 가난한 자의 ‘방주’가 아닌, 부자들의‘유람선’이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빈민들에게 ‘신앙’이란 사치품이고, 교회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곳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커지는 기계소리에 가난한 자의 신음소리는 묻혀 버렸고, 높아지는 빌딩의 그늘에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은 가려졌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구세군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구세군의 요람은 가난한 자들이 살고 있던 동부런던 거리였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정치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지고 왔다. 공업화로 농촌 인구의 대부분은 도시로 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공해 문제, 위생 문제, 주택 문제, 범죄 문제, 빈민가 문제 등 도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비참하였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작업 환경도 열악하였다. 자본가들은 임금이 비싼 숙련된 성인 노동자 대신 임금이 싼 부녀자나 아동을 고용하여 노동을 착취했다. 도시에 범죄자들이 넘쳐나자, 이들을 유형식민지(Penal Colony)로 보냈다. 초기에는 영국과 가까운 미국으로 보냈지만 177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하면서, 1788년부터 죄수들을 호주로 보내기 시작하였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