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기억합시다 (Lest we forget!) 신명기 24:18
우리교회는 매달 마지막 주일을 구세군 주일로 정하고, 오전예배 후에 기독교 역사 탐방을 갑니다. 구세군에 속해 있지만 구세군에 대하여 잘 모르고, 호주에 살고 있지만 호주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게 되면 피상적인 우리의 지식이 구체적으로 이해될 것 같아서 올해부터 시작했습니다.
호주와 한국의 교류는 두 축이 있습니다. 호주는 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를 보내 복음을 전해준 나라이고, 1950년 한국전쟁 때 파병하여 나라를 지켜준 고마운 나라입니다. 한국과 호주는 1961년에 외교 관계를 정식으로 수립했습니다. 올해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제는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일이고, 오늘은 ANZAC Day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두 날을 기억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평전투 – 1951년 4월 24일
어제는 가평전투 70주년 기념일입니다. 호주 3대대는 ‘가평부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9일 호주는 미국에 이어서 영국과 함께 두 번째로 참전을 결정한 나라입니다. 8407명이 참전하여 339명이 전사하고, 1216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오늘은 1951년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남으로 밀려 올 때 미군, 캐나다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한국군이 연합하여 가평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한 날입니다.
2010년 4월 24일, 스콧 부대장의 초청을 받아 기념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부대 중심에는 가평에서 가져온 ’38선(38 Parallel) 기념비’가 서있었고, 주위에는 호주기, 성조기, 캐나다기가 태극기와 함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사열 장교는 훈시 때 한국 전쟁 참전국이 21개국이고 했습니다. 사열 후 장교 식당에서 그를 만나 질문했습니다. “저는 참전국이 16개국으로 배웠는데 21개국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16개국은 전투병을 파병한 나라이고, 5개국은 의료를 지원하였습니다.” 3대대는 10년 전에 시드니에서 타운스빌로 부대를 옮겼습니다.
ANZAC – 1915년 4월 25일
오늘은 안작 데이(ANZAC Day)입니다. 호주가 중요하게 여기는 국경일은 1월 26일 ‘Australia Day’과 4월 25일 ANZAC Day입니다. ANZAC(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은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란 뜻입니다. 1900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는 1901년 1월 1일 ‘Australia’란 이름으로 독립은 했지만, 국민의 대부분은 영국계로서 영국을 ‘어머니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연방 국가의 젊은이들은 ‘어머니 나라’를 위하여 참전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훈련 받은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은 연합하여 1915년 4월 25일 갈리폴리(Gallipoli)로 투입됩니다. 이때 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이 탄생했습니다.
안작은 10,0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그해 12월에 갈리폴리에서 철수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졌지만, 이긴 전투입니다. 호주의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주의 정신을 ‘ANZAC Spirit’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더 많은 호주의 젊은이들이 분연히 일어나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끝났습니다. 지금도 RSL 클럽에서는 오후 6시에 일제히 일어나 순국선열과 전몰용사에 대한 묵념을 하고, 일제히 “Lest we forget”(잊지 맙시다)을 외칩니다. 갈리폴리는 호주, 뉴질랜드, 터키에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오늘 새벽에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갈리폴리에서 ‘Dawn Service’를 드립니다. 오번의 모스크는 주로 터키 사람이 다니는데 이름이 ‘갈리폴리 모스크’입니다.
기억하라 – 신명기 24:18
신명기는 죽음을 앞둔 모세가 출애굽 2 세대를 향한 3번의 고별 설교입니다. 레위기는 문어체라 딱딱한 반면에, 신명기는 구어체라 이해하기 쉽습니다. 신명기는 모세5경의 결론이며, 역사서를 시작하는 서론입니다. 신명기는 요시야왕이 성전을 수리하다 발견하였습니다. 신명기는 신약에 약 80번 정도 인용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시험을 받을 때 ‘기록되었으되’의 말씀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의 구조를 분석하면 1-4장은 과거에 대한 설교, 5- 26장까지는 현재에 대한 설교, 27-34장은 미래에 대한 설교입니다.
신명기의 핵심 단어는 ‘기억하라’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르’(zakar)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의 뜻입니다. 기억은 정체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의 기억에 의존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홀로코스트 박물관'(Holocaust History Museum)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란 뜻은 ‘전부’란 뜻의 ‘홀로’와 ‘태우다’라는 ‘코스트’의 합성어입니다. 박물관의 히브리어 이름은 ‘야드 바쉠’(Yad Vashem)입니다. 야드는 이름, 바쉠은 ‘기억’이란 뜻입니다.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가스실에서 산화된 600만 명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과거 애굽의 종이었다는 사실, 둘째 하나님이 속량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답게 살 수 있도록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계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빌라우드 이민 수용소를 다녀오다
호주는 1951년 ‘UN 난민헌정’과 ‘1967년 Protocol’에 서명하여 매년 최소한 13,000여명의 난민(Refugee)을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에 이어서 세계에서 2번째로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는 국가이다. 난민이란 1951년 ‘UN 난민헌정’과 ‘1967 Protocol’에 의하면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멤버, 정치적인 의견’ 의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라도 관련되어, 자국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난민은 난민 비자를 받은 사람이다. 난민 비자를 신청한 사람을 ‘난민신청자(Asylum Seeker)’라고 한다. 난민신청은 호주 안과 밖에서 할 수 있다. 호주 안에서 난민을 신청한 사람을 ‘On Shore 난민신청자’이고, 호주 밖에서 난민을 신청한 사람은 ‘Off Shore 난민신청자’이다. 빌라우드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On Shore 난민신청자’이다.
몇 칠 전 빌라우드 이민 수용소에 다녀왔다. 빌라우드 이민 수용소 사역을 한지가 15년이 넘었다. 지금도 빌라우드 Chaplain으로 되어 있다. 3주 전에 센트럴 코스트에서 사역하는 Graig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대면 예배 뿐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빌라우드 수용소에 있는 사람에게서 그에게 연락이 왔다. 마약과 연관되어 빌라우드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살 때 부모님과 함께 영국에서 호주로 이민 와 50년을 살았지만 시민권을 받지 않았다. 영주권과 시민권의 차이가 거의 없지만 범죄가 발생하면 달라진다. 호주법에 의하면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영주권자는 추방될 수 있다. 그는 마약과 관련된 범죄로 4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빌라우드 수용소로 이송되어 추방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로 사태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9개월 째 빌라우드에 감금되어 있다. 빌라우드 수용소의 수용인원은 550명이 조금 넘는다. 현재는 비행기가 뜨지 않아 수용소가 차고 넘치고 있다.
빌라우드 수용소는 원래 이민이나 난민 온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숙소였다. 후에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용소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건물을 신축한 후 예전과 같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민성에 개인 계좌를 열어야 하고, 면회 24시간 전에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빌라우드 수용소를 관리하는 기관은 이민성이 아니라 영국에 본부를 둔 Serco라는 하청업체이다. 2016년 4월부터 Serco는 이민성을 대신하여 빌라우드 수용소를 관리하고 있다. 수용소의 환경 개선을 위한 지역자문단 CCG (Community Consultative Group)이 있다. 이민성 직원, Serco 직원 그리고 수용인(Client)을 돕는 ‘비영리단체’(NGO) 대표들이 함께 모여, 수용인들의 처우개선과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정책적인 제안을 하거나 논의하는 모임이다. 정기적으로 모임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모이지 않는다.
코로나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불허되었다. 코로나의 규제가 완화되면서 면회는 허락되었지만, 면회 조건은 강화되었다. 면회 5일 전에 신청을 해야 하고, 개인적인 면회만 허락되며, 면회 시간도 1시간이다. 그는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찾아왔다는 그 자체가 기쁜 것 같았다. 그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억울한 이야기를 나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듣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간수가 면회 시간이 5분 남았다고 한다. 그는 당황해 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니,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내일이다. 4년간 감옥에 있을 때는 시간이 흐르면 출소할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수용소에서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 하루하루가 불안하다고 한다. 인간은 내일이 없어 오늘에 절망하고, 내일을 몰라 오늘을 불안해한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오늘의 삶이 힘들어 서가 아니라 내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은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살고는 싶지만,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표현이다.
내일은 희망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세계관이다. 세계관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날 수 있다. 무신론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세계관이다.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 땅이 전부이기에 이 땅에 올인하며 산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넓은 집에서 살아야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하고, 더 좋은 차를 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의 것을 위하여 아등바등하며 산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열심히 일하여 소출이 풍성하여 지자, 부자는 심중에 생각하여 곡식을 쌓아 둘 곳이 마땅치 아니하자, 내가 곳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어야겠다고 한다. 이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셨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9)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자이고,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노숙자이다.
두 아이가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 둘이는 열심히 모래성을 쌓으며 재미있게 놀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밀려와 모래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한 아이는 일어나 모래를 털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른 아이는 돌아갈 집이 없어 두려움에 떨며 바닷가를 떠나지 못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이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 사람 – 속사람) 17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잠시 – 영원) 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것 – 보이지 않는 것) 두가지의 대조적인 단어를 통해서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비교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이란 자기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는 것이다. 동양에 인간이 향유하는 다섯가지 복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였다. 오복(五福) 중 첫번째는 장수하는 것(壽)이고, 두번째는 재산이 넉넉한 것(富), 다음으로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편안히 돌아가는 것(考終命)을 들고 있다.
내가 30대 쯤 사람들은 나에게 인생을 반쯤 살았다고 했다. 40대가 되니 또 인생을 반쯤 살았다고 한다. 의술이 놀랍게 발달되된 덕분이다. 50대가 되니 100세 시대가 돌입했다고 했다. 그 때 나온 말이 ‘9988234’이다.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죽는다”. 이제 60대가 되니 이런 말까지 나왔다. ‘9988231’, “99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다시 일어난다.” 정도의 조금의 차이가 있겠지만 언젠가 우리는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 복은 잘 죽는 것이다. 어떡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오늘의 본문은 잘 사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잠시 있는 환란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살지 말고 보이지 않은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다.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겉 사람은 시간이 가면 후패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헤아릴 수 있다면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줄 안다면 영원을 사모하며 살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이것을 그때 알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인생의 불행은 짧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데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내일은 희망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