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눈물로 쓴 편지 (고후 2:1-4, 고후 7:8-9)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아테네에서 약 80km 서쪽에 위치했는데, 동쪽으로 에게해 서쪽으로 이오니아해를 연결하고 있다. 도시는 항구도시로 부요했고 음란했다. 고린도의 도덕적 타락은 너무도 널리 알려져서, ‘고린도인이 되다’란 헬라어 동사 ‘코린티아조마’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2차 전도여행 때 교회를 개척하여 18개월 동안 목회를 하고, 3차 전도여행 때에는 3개월간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다.
1.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바울은 3차 전도여행(행 18:23 -21:16) 에베소에서 썼다. 에베소는 바울이 ‘3년이나’(행 20:31) 머무르며 목회하던 곳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을 에베소에 머물게 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는 ‘교회의 문제들’이다. 이 서신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교회 안의 분쟁, 음행한 교인의 포용, 권징, 성도의 법정 소송, 우상제물과 우상숭배, 여자의 머리 수건 문제, 성찬,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의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고린도교회에서도 있었다.
2. 눈물로 쓴 편지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2:1-4)
‘눈물로 쓴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쓴 편지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 거짓 교사들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의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발송하고 얼마 후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였다.(고전 12:14, 13:1,2) 그러나 방문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더욱 큰 불신과 마음의 상처만 남기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하고 눈물로 쓴 편지를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에 보냈다.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기를 계획했지만(고전 16:5-8), 소동으로 인하여 예정보다 빨리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니아에 머무르게 되었다.(고후 2:12-13) 바울은 마게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좋은 소식을 듣게 되고 기뻐한다.
3.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는 바울은 마게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쓴 편지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눈물로 쓴 편지를 받고 회개하고 바울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고후 7:7)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거짓 교리를 퍼뜨리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고후 11:13-15) 다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생애를 지냈던 사람들인데 반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사역의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지가 공격의 포인트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자신의 사도권과 전파한 복음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위해 고린도후서를 써 보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위한 연보의 주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후 8, 9장)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자서전적인 서신으로 바울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8-10)
두 종류의 근심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적인 근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육적인 근심으로 육신의 정육,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위한 근심이다. 영적인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육적인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자기 사랑이 자존감이다
인간은 관계적이 존재이다. 마태복음 22:36-40 말씀에는 세가지 관계가 있다. 첫째 나와 하나님 영적 관계, 둘째 나와 이웃 사회적 관계, 셋째 나와 나 심리적 관계. 이 모든 관계의 중심은 사랑이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의 준말이다.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을 혼동되어 쓰는 경우가 있다. 자존심은 타인과 비교한 나이고,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 선 나이다. 자존심은 타인과 비교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고,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존감’이 낮아지면 ‘자존심’이란 ‘방어기제’을 작동한다. 그래서 더 있는 척, 더 아는 척, 더 힘센 척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타인을 무시하며 경쟁자로 생각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을 인정하고 동역자로 생각한다.
1. 나와 하나님 관계 – 영적 존재
인간은 영적존재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으로 드려야 할지니라.”(요 4:24) 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프뉴마’를 사용한다. 첫째 영은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 신령은 거듭난 인간의 영이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영으로 드리는 것이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식을 지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2. 나와 이웃 관계 – 사회적 존재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남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주기도 한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인간 (人間)이란 한자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는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과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사람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으로 산다. 관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관계가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 통 (通)하며 불통 (不痛)하고, 불통 (不通)하며 통 (痛)한다는 말이 있다. 通은 통할통 자이고, 痛은 아플 통자이다.
3. 나와 나 관계 – 심리적 존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존심이 강하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시소와 같아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사랑의 근거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창 1:27)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자녀 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품으로 만들지 않고 작품으로 만드셨다. 그것도 전무후무하고, 유일무이한 걸작품으로 만드셨다. 상품은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지만, 걸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더 발한다. 우리의 겉사람은 후폐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인간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본질적인 것은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영적 존재인 인간만이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며 예배드릴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지니라”(요4:24)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라 예식이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고, 예식은 지키는 것이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부엌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일 수 있다지만, 교회 개는 10년이 지나도 예배드리지 못한다. 그래도 개는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조금 특별한 것 같다. DOG를 꺼꾸로 하면 GOD이기 때문에 그런가?
인간 이분설
이분설이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영과 육’을 합하여 ‘영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설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견해로서 인간이 물질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말로 ‘영혼’은 ‘영과 혼’을 합한 말이지만, 성서에서 영혼은 ‘혼’을 뜻하는 ‘푸시케’ (Psyche)를 번역한 말이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요삼 1:2) 일반적으로 영혼을 영 (Spirit)라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혼’ (Psyche)를 번역한 단어이다. 히브리어로 ‘푸시케’는 ‘네페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영’ (루아흐)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기'(네샤마, breath)를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도 ‘생령’이란 단어는 살아있는 ‘영'(루아흐, Spirit)이 아닌, ‘혼'(네페쉬, Soul)이다.
인간 삼분설
삼분설이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설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 (Spirit, Pneuma)과 혼 (Soul, Psyche)과 몸 (Body, Soma)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히브리서도 인간을 삼분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헬라어에 ‘영과 혼’의 단어가 따로 있는 것처럼, 히브리어도 ‘영’은 ‘루아흐’이고 ‘혼’은 ‘네페쉬’이다. ‘루아흐’는 하나님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신”으로 번역되고, 네페쉬는 숨, 호흡, 혼, 자아, 생각 등으로 번역된다. 영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혼은 ‘지정의’가 있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과 관계가 있다. 혼이란 헬라어 단어인 ‘Psyche’에서 파생된 용어가 ‘심리학'(Psychology)이다.
중재자 마음
마음 (Heart)이란? ‘존재의 중심’이다. 성경에 ‘카르디아’ (Kardia)라는 단어가 나온다.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했고, 우리말은 ‘마음’이다. 카르디아의 어근은 ‘Cord’로서, ‘중심 (中心)’이란 의미이다. “코드 (Cord)가 같다, 다르다”란 말이 있다. “마음이 일치하다, 혹은 틀리다”란 뜻이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는 ‘진심의’ (Cordial), ‘일치’ (Concord), ‘불일치’ (Discord) 등이 있다. 마음이란 ‘카르디아’는 성경의 중심적인 단어로 850여 차례 나온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 (Heart)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마음 (Heart)이란 ‘혼’을 뜻하는 ‘푸쉬케’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의미하는 ‘영과 혼’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마음이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 것이고,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