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대인 관계의 첫 계명
호주는 5월의 둘째 주일을 Mother’s Day, 9월의 첫째 주일을 Father’s Day로 지킨다. 한국은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지킨다. 어버이날은 본래 Mother’s Day에서 유래되었다. Mother’s Day는 미국에서 안나 자비스 (Javis)라는 여성이 본인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서 어머니가 좋아했던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비롯되었다. 1914년 미국 국회에서 5월 둘째 주일을 Mother’s Day로 결정한 후 호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구세군 가정단에 의해 1930년 6월 15일을 어머니주일로 지킨 것이 시초가 되었다. 정부는 1956년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공포하고 지켜오다가, 1973년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회적인 사건을 지속적인 운동으로 활성화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승화시키면 국경일이 된다.
어버이날이면 왼쪽 가슴에 달아주는 ‘빨간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건강을 비치는 사랑’, ‘존경’, ‘모정’, ‘사랑과 애정’ 등을 의미한다. ‘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 ‘감사’, ‘열애’, ‘아름다움’ 등을 뜻한다. 노란색은 ‘거절’, ‘거부’, ‘경멸’이며, 파랑색은 ‘행복’이다. 또 보라색은 ‘자유’, ‘변덕’이며, 흰색은 ‘추모’, ‘깨끗함’, ‘절개’, ‘순수한 사랑’ 등을 의미한다.
오늘 새벽에 쓴 글이다. _ 2021년 5월 9일
오늘은 Mother’s Day이다.
사랑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랑에는 분명 온도 차이가 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하여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할 수가 없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사이에는 너무 많은 온도차이가 있다. 부모 마음을 1/10만 헤아려도 효자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독일 속담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한 아버지가 열 아들을 키울 수는 있으나 열 아들이 한 아버지를 돌보지 못한다.’ 자녀들은 연금 받는 부모는 오래 살기 원하지만, 재산 많이 부모는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란다고 한다.
부부는 무촌이다. 사랑하면 한 몸이라서 무촌이고, 헤어지면 원래 아무 사이가 아니라서 무촌이다. 자식은 헤어져 살든 함께 살든 1촌이다. 효자 자식도 결혼하여 2촌쯤 되고, 자기 자식을 낳으면 4촌쯤으로 멀어지며, 손자가 생기면 8촌쯤으로 더 멀어진다고 한다. 성서에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지만, 다윗은 끝까지 아들인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했다. 압살롬이 죽자, 다윗은 자신이 대신 죽었어야 한다며 통곡한다. 이것이 부모 사랑이다.
고려에 고려장이란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장 (高麗葬)은 고려 시대에 늙고 병든 부모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에 가서 버렸다는 전설제도이다. 아들이 어미를 지게에 매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때 어미는 계속 가는 길의 나뭇가지를 꺾었다고 한다. 아들이 “왜 가지를 꺾습니까?” 묻자 “혹시 네가 돌아갈 때 길을 잃어 버릴까봐 표시를 해놓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공경’은 유교의 ‘부모공경’과는 차이가 있다. 유교의 효는 ‘인본적인 차원’의 효이지만, 기독교의 효는 ‘신본적인 차원’의 효이다. 인본적인 효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뿌리를 두고, 신본적인 효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공경이라는 말의 원어는 ‘카페트’로서 무겁다는 뜻이다. 우리 몸의 내장 중에 가장 중요한 ‘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모든 지체가 중요하지만 간이 망가지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그만큼 부모를 귀중히 여기고 잘 보살피라는 것이다.
10계명은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로 분리된다. 대신관계란 하나님과 관계이고, 대인관계는 인간과 관계이다. 1-4계명까지는 대신관계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까지는 대인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제 5계명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대인관계의 첫 계명이다. 첫째란 단어는 프로테 (πρώτη)로 순서로서 첫 번째가 아니라,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유교에도 효는 백행지원 (百行之源)이란 말이 있다. 효가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 나라에도 충성하고, 다른 사람들을 공경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 공경은 대인관계의 첫 계명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의 비결이다.
성경의 3장 16절
1. 요한복음 3장 16절 (세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이란 단어는 헬라어 ‘코스모스 (Cosmos)’이다. 코스모스는 질서, 규칙, 조화 등의 의미이다. 코스모스의 반대의 말은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 (Chaos)이다. 하나님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의 상태인 ‘카오스’에서 말씀으로 ‘코스모스’를 만드셨다. 카오스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코스모스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창조의 질서’가 깨지면서 ‘카오스’가 되었다. 인간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갈 때에 ‘코스모스’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2. 고린도 전서 3장 16절 (사람)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은 거룩이란 단어인 하기오스 (αγιος)와 영이란 단어인 프뉴마 (πνευμα)의 합성어로서 ‘거룩한 영’이란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거룩한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성도라고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다. (롬 8:9) 거룩함의 뜻을 가진 ‘하기오스’는 그 의미가 ‘구별’이란 뜻에 집중된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육신을 갖고 있지만 육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다. 성령은 보혜사로 우리를 도우시고, 상담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대언해 주신다.
3. 디모데 후서 3장 16절 (성경)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은 ‘Testament, Covenant’라고 하는데, ‘언약’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약속이다. 강력한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이신 말씀을 의지하여 하는 기도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 언약은 ‘모세의 언약’ (출 24:8)과 ‘새 언약’ (렘 31:31, 눅 22:20)에 입각하고 있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모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구세군 11개 교리문 중 첫 번째는 ‘성서론’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성서는 ‘잣대, 기준’ (Canon)이다.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내적신앙과 외적실천의 표준이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까?
구세군에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 치료시설을 운영한다. 자발적으로 입소한 사람들은 약 10개월간 12단계를 거치면 완치되어 출소할 수 있다. 중독이란 자기도 자기를 어찌할 수 없는 상태이다. 12단계 중에 처음 3단계만 잘 통과하면, 나머지 9 단계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 1단계는 자기가 중독자를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단계는 중독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3단계는 절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단계이다. 자신의 한계와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손을 들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벧전 5:5) 창세기 3장 인간의 타락과 창세기 11장 언어의 분열은 교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거스틴의 제자가 질문하였다.
“선생님,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이 무엇입니까?”
“첫째도 겸손이다.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도 겸손이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다.”
“선생님 한 가지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까?”
“자기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교만한 놈이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정신병자가 스스로 정신병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라고 경고했다.
링컨은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 보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못쓰는 것은 검소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것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낙타의 눈’을 갖는다. 낙타의 눈은 구조적으로 올려다보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C. S. 루이스는 “교만한 사람은 위를 쳐다 볼 수 없다”고 했다. 교만은 허풍과 허영, 시기와 질투, 비교와 위선, 열등감과 자랑과 같은 악덕이 한데 어울려서 만들어 낸 악성괴물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예레미야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자기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23-24) 자기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께서도 교만한 세리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4)고 말씀하셨다. 명예를 얻어 교만해 지면, 높아진 것이 아니라 낮아진 것이다. 부자가 되어 교만해 지면, 풍요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해진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교만해 지면,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이다. 헌금 많이 했다고 교만해 지면,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미가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 (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