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말의 부메랑의 법칙

오늘은 한글날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은 문자가 없어 한문을 빌려 사용하는 불편을 벗어던져버리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글을 만들었다.
1. 말은 힘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말에 힘이 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잠18:21)라고 했다.
야고보는 혀는 작지만 큰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키와 같고,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불과 같다고 했다.
세치도 안 되는 혀가 우리의 삶을 좌우한다. 말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무심코 뱉은 한마디의 말이 벼랑 끝에 선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간신히 지푸라기만 잡고 있는 사람을 천 길 낭떠러지로 내몰 수도 있다.
물리적 폭력은 앞에 있는 사람만 다치게 하지만, 언어폭력은 현장에 없는 사람까지 다치게 한다.
2. 말은 환경이다.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격이 형성된다. 환경이란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외적 요인’이다. 가장 중요한 환경은 무엇일까? 언어환경이다. 좋은 가정이란 좋은 언어가 있는 가정이고, 좋은 교회란 좋은 말이 있는 교회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고 했다. 긍정적인 언어 환경에 노출된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부정적인 언어 환경에 노출된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부정적인 사람은 말만 부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부정적이다. 사람은 말을 만들고, 말은 사람을 만든다. 유태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이 입안에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지배하지만, 말이 밖으로 나오면 말이 나를 지배한다.”
3. 말은 씨앗이다.
말씨는 ‘말의 씨’이다. 인간은 말의 씨를 뿌리고, 뿌린 씨를 거두며 산다. 긍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긍정의 열매를 거두고, 부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부정의 열매를 거둔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잠18:6) 말에는 ‘부메랑 법칙’이 있다. 타인에게 한 그 말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온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10:5-6). 현재의 나의 모습은 과거에 내가 뿌린 말의 씨의 열매이고, 미래의 나의 모습은 오늘 내가 뿌린 말의 씨의 열매가 될 것이다.
우리 이렇게 삽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 7:4)
초상집에서는 한 인생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어,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유익한 시간이 되는 셈이다.
1. 겉 사람이 아닌 속사람으로(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겉 사람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속사람 중심으로 사람이다. 겉 사람은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고, 속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다. 겉 사람은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이고, 속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겉 사람은 ‘상품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고, ‘작품 의식d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상품은 신상품이 나오면 가치가 떨어지고, 유통기간이 지나면 폐기처분이 되지만, 작품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치가 더해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고 작품으로 만드셨다. 그것도 단 하나밖에 없는 ‘걸작품’으로 만드셨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2. 옛 사람이 아닌 새 사람으로(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탄생 전인 BC와 탄생 후인 AD로 나누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는 후로 나눌 수 있다. 예수 믿기 전은 옛 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를 믿은 후는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중심이 이동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3. 육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으로(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이란 자기 생각을 말하고, 영의 생각이란 성령의 생각을 말한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자기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사이에서 계속된 갈등 속에 산다. 바울도 그랬다. 로마서 7장의 바울과 로마서 8장의 바울은 아주 다르다. 그 중심에는 성령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은 만남이다. 길을 걸으며 ‘오늘의 사람’을 만나고, 유적지를 방문해서 ‘어제의 사람’과 만나고, 그들의 만남을 통하여 ‘내일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인생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인생길은 장미빛의 아스팔트길이 아니다. 넘어야 할 산도 있고, 건너야 할 물도 있고, 지나야 할 광야도 있다. 모든 길에는 만남이 있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일상의 무료함을 벗어 던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냥 주어진 길을 걷는다. 하지만 무작정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신나게 먹고, 뜨겁게 기도하고,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2010년에 상영된 영화이다. 길버트는 안정적인 직장, 번듯한 남편,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언젠가부터 이게 정말 자신이 원하는 삶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짜 자신을 찾고 싶어서, 용기를 내어 일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무작정 떠났다. 2002년 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인 ‘마이클 쿠퍼’와도 이혼을 했다. 그녀가 방문한 3나라 모두 “I”로 시작한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동안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호세 누이스’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 후 그녀는 여행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호세 누니스’와 결혼도 했다. 2015년 그녀는 ‘피플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누니스는 나의 가장 소중한 여행 기념품”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던 그녀가 2016년 7월 1일 ‘페이스 북’을 통해서 이혼 소식을 전했다. “누이스는 지난 12년 간 정말 멋진 저의 배우자였고,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냈어요. 우리는 이별을 서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개인적인 이유로 헤어지기로 했어요.” 그녀는 글을 마치며 한편의 시를 소개했다.
이카루스의 날개(Icarus Wings)
그리스 신화에 하늘로 비상하려다 추락한 ‘이카루스'(Icarus) 이야기가 있다.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디에달루스(Daedalus)는 크레타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깃털을 밀납으로 하나씩 붙여서 날개를 만든다. 디에달루스는 밀납 날개의 특성상 일정한 고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부자는 날개를 달고 창공을 날기 시작했고 탈출을 성공한다. 아버지 뒤를 따라가던 이카루스는 날갯짓에 익숙해지자,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하늘 높이 비상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하늘 높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뜨거운 태양에 의해 깃털의 밀납이 녹으면서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잭 길버트'(Jack Gilbert)는 “추락과 비상”(Failing and Flying)이라는 시를 썼다. “모든 사람들이 ‘이카루스’가 날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사랑이 끝나거나 결혼에 실패하면 ‘사람들은 그것은 잘못된 거야, 그녀는 더 성숙했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잘못되어도 모든 것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시는 “나는 ‘이카루스’가 떨어지므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승리의 끝에 다다른 것이라 믿습니다.”라며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 시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하였다.
‘이카루스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날개가 있기에 비상할 수 있듯이, 날개가 있어 추락하는 것이다. 길버트는 ‘추락과 비상’을 반대개념이 아닌, 같은 의미로 보았다. 아마 엘리자베스도 그런 의미로 자신의 이혼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추락과 비상’이 같은 의미일까? 아니다. 분명 아닐 것이다. 방향 없는 비상은 목적 없는 추락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보내진 존재’이다. 보낸 분을 알지 못하면 인생은 방황한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표류하는 것이고, 하나님 있는 인생은 항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삶의 목적인 동시에 의미이다. 그분을 만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