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삼일절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삼월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103년 전 오늘,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행적을 기억합니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질 때에 인구의 2%도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분연히 일어나 그 물결의 선봉에 서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주님,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물결에 쓸려가지 말게 하시고 세상을 주님께 인도하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9:3-4).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던 날입니다.
산하에 뿌린 그들의 피가 독립의 씨앗이 되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건립되고 국내외적으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서,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과 오늘의 사관의 만남입니다.
희망에는 장애가 없다
베드로 전후서는 ‘소망의 서신’이다. 시대적 배경은 본격적인 기독교의 박해가 시작될 때로,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으로 닥쳐올 핍박을 이겨내라고 권면하는 서신이다. 산소망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고, 현실의 장애를 이기지 못하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다. 작은 물고기라도 살아 있으면 역류할 수 있지만, 큰 물고기라도 죽어 있으면 현실의 물결에 쓸려간다.
1. 희망 발전소 – 강영우 박사
2009년 4월 4일 강 박사를 벨모아 서문가든에서 만났다. 그가 좋아했던 성경구절이 있다. 창세기 1장 27절과 로마서 8장 28절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비전’을 주었고, 로마서는 비전을 이루려다 보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주었다. 넘어진 자가 실패한 자가 아니라, 일어나기를 포기한 자가 실패한 자이다. 강 박사는 절망 속에서 꽃피운 자신의 삶을 ‘노 웨어 (No where)’가 아니라 ‘나우 히어 (Now here)’라는 했다. 그의 유작은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가 희망만 보며 살았다.
2. 희망 전도사 – 닉부이치치
2012년 3월 3일 닉부이치치를 만났다. 시티에 있는 구세군 교회에서 시드니의 5개 교회가 연합하여 ‘찬양의 축제’를 가졌다. 그는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을 읽게 된다. “누구의 죄로 인하여 맹인이 되었는가?”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말씀하셨다. 닉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누구의 죄 때문에 내가 사지 없이 태어난 것인가? 그후 닉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life without limits’ 책을 썼다. 모든 것이 한계일 것 같은데, 그는 한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3. 희망 천사 – 이희아
2014년 12월 8일 이희아씨를 만났다. 그녀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선천성 1급 지체 장애인’, ‘미소 천사‘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등. 그녀는 장애를 축복으로 승화시킨 ‘희망 천사’이다. 2014년 12월 13일 토요일 밤 8시에 시드니 올림픽 경기장에서 ‘북한 대 호주 농아 친선축구 경기가 열렸다. 호주 농아 축구단은 35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북한농아축구단’은 2013년에 창단되었다. 그날 하프타임 시간에 이희아 씨는 베토벤의 ‘환희’를 치며 ‘희망을 연주’하였다. 그녀의 꿈은 통일이고,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김구 할아버지이다. 두 손가락으로 연필쥘 힘이 없어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가 그녀를 희망천사로 만들었다.
전쟁의 명분들
임진왜란 (AD 1592) – 정명가도 (征明假道)
임진왜란의 키워드는 “정명가도”이다. 정명가도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명나라를 치는데 필요한 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한 말이다. 조선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이를 빌미로 “임진년 (1592)에 ‘왜놈’들이 난을 일으켰다”하여 “임진왜란”이 부른다.
임진왜란 (1592-1598) 7년 동안 지속되었다. 임진왜란을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나눠 불러야 한다. 임진년 (1592)에 전쟁이 발발하고 1년 만에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나라와 일본의 평화협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자 정유년(1597)에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박살내며 재침을 시작하니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한국영화 사상 관객을 가장 많이 동원했던 ‘명량’은 바로 “정유재란” 중 “명량해전” (1597)을 소재로 하고 있다. 원균을 대신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노량해전” (1598)을 끝으로 임진왜란은 7년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실 햇수로 7년이지만 실질적인 싸움은 2년에서 2년 반 정도 남짓하다.
병자호란 (AD 1636) – 친명배금 (親明排金)
임진왜란 중 선조는 의주로 도망가고, 아들인 광해군은 동분서주하며 활약했다. 전쟁 후 선조보다 광해군의 인기가 높아지자, 선조는 그를 경계하다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 그는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정책”을 펼치며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조정은 친명 대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왕으로서 입지는 위태하였다.
국제정세는 조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급속하게 약화되었고, 북방의 “후금”은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중립정책”을 펼쳤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은 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때에 1624년 인조반정에 불만을 품고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었다.
드디어 1627년 3월 1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한다. 후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내려와 평양이 함락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을 한다. 결국 조선은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형제의 의’를 다할 것을 “연미정” (燕尾亭)에서 “정묘화약” (丁卯和約)을 맺었다.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1636년 (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청” (淸)으로 바꾸고 “형제 관계”를 “군신 (君臣)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면서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이란 “병자년에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청은 빠른 속도로 한양을 향하여 돌진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할 시간이 찾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하였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결국은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 (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갖추게 된다. 한국 역사를 보면 두 번의 큰 굴욕이 있다. 첫째는 1637년 2월 24일, “삼전도 굴욕”이고, 둘째는 1910년 8월 29일, 일제에게 주권을 빼기고, 대한제국이 멸망했던 “경술국치”이다.
한국전쟁 (AD 1950) – 남북통일 (南北統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갈라진 이후,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나라는 세웠지만 두 나라 정상은 “통일”을꿈꾸고 있었다. 드디어 김일성은 스탈린의 재가를 얻고,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에 삼팔선을 넘어 무력침공을 감행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되고, 낙동강 지역까지 파죽지세로 밀려내려 갔다. 유엔군은 낙동강을 마지노선으로 삼고, 전열을 정비한 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0월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빼앗긴다. 같은 해 3월, 서울을 재 수복하지만, 전쟁은 3.8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하는 “고지전”으로 바뀌었다.
이후 “휴전” 이야기가 오갔지만 특별한 진전은 없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자 급물살을 타고,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休戰協定)이 이루어진다. 휴전협정은 한국의 자의로 맺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했지, 결코 “휴전”을 원치 않았다. 아직도 한반도는 “휴전 (休戰) 중”이다.
므깃도 전투 (BC 609) – 앗수르가도 (假道)
남유다 요시야 왕 때에 앗수르는 쇠퇴해 가고 있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등장했다. 바벨론을 견제하고자 애굽은 앗수르를 도우려 북진했고, 앗수르의 회복을 원치 않았던 요시야 왕은 “므깃도”에서 애굽 왕 바로느고 (Pharaoh Neco)와 맞부딪쳤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대하 35:21, 왕하 23:29) 요시야 왕이 제안을 거부하자, 느고는 유다를 침공하고 요시야 왕은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한다.
이후 유대는 애굽의 속국이 된다. 요시야 왕이 죽고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지만, 느고는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위에 올린다. 드디어 BC 605년 세계역사를 바꿀 전투가 “갈그미스”에서 있었다. 애굽과 바벨론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맞섰고,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이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앗수르 는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고,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도권을 바벨론에 빼앗겼고 약소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BC 605은 “느브갓네살” 원년으로서 “갈그미스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유다를 공격했다. 느브갓네살 왕은 “여호야김” 왕을 비롯하여 많은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