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섬김의 리더십, 김민제
‘섬김의 리더십, 김민제’
구세군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처음으로 김민제 사관님을 만났다. 그때 그는 섭외부 서기관이었고,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시즌에 거리의 모금 대신 본영에서 서신 모금을 담당했다. 그는 인자했고, 세심했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분이었다. 모금의 방법을 설명할 때에도 단순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과 태도를 함께 전해주었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눈빛 하나에도 사람을 세우려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1988년 12월, 나는 시카고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나는 시카고 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사관님은 올림픽을 마치고 시카고로 오셔서 한인영문을 개척하셨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 묵묵히, 그러나 뜨겁게 그 길을 걸어가셨다.
그분의 섬김의 리더십은 시카고 교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앞에서 명령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먼저 섬기며 길을 여는 지도자였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고, 그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공동체는 살아났다.
그렇게 시작된 시카고 한인영문은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 교회의 뿌리에는 김민제 사관님의 눈물과 기도, 그리고 조용한 헌신이 깊게 스며 있었다. 그는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웠고, 사람을 통해 공동체가 자라도록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늘 한결같았다. 어디에 있든, 어떤 역할을 맡든, 그는 늘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세우는 일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고, 동시에 더 좋은 길을 걸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김민제 사관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분의 믿음, 그분의 헌신, 그분의 리더십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음 세대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Servant Leadership, Colonel Paul Kim
I first met Colonel Paul Kim when I was attending the Salvation Army College. At the time, he was a secretary in the Public Relations Department, and I was still a student. During the Christmas Kettle Appeal season, instead of collecting money on the streets, we were in charge of collecting letters at headquarters.
He was kind, meticulous, and, above all, a man who valued people. When explaining fundraising methods, he didn’t just teach simple techniques; he also conveyed the heart and attitude behind them. His every word, his every look, was filled with a sincere desire to build people up.
In December 1988, I met him again in Chicago. I was studying at the Chicago College ahead of the Seoul Olympics, and Officer Kim, after completing the Olympics, came to Chicago to pioneer the Korean Corps. Building a new community in a foreign land was never easy, but as always, he walked the path quietly, yet passionately.
His servant leadership deeply touched the Korean community in Chicago. He was not a leader who commanded from the front, but a leader who served from the lowest position and paved the way. Wherever he touched, people found comfort, and wherever his footsteps took them, the community was revived.
From this beginning, the Chicago Korean Corps grew into a model church in the community. Deeply embedded in the roots of that church were the tears, prayers, and quiet devotion of Colonel Paul Kim. He didn’t build a church; he built people, and through them, he enabled the community to grow.
Looking back, his life remained consistent. No matter where he was or what role he held, he always put loving and building up those entrusted to him by God first. Therefore, whenever I think of his name, my heart warms, and at the same time, I feel a renewed determination to walk a better path.
Colonel Paul Kim left us with so much. His faith, his dedication, and his leadership live on, and they will continue to be a beacon, illuminating the path of the next generation.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3-8)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올해는 시드니에서 20회 성시화 대회가 3월 6-8일까지 열렸습니다. 2007년 3월에 성시화 깃발이 높이 올라가고 20년째가 되었습니다. 그저께와 어제는 새순교회에서 집회가 있었고, 오늘은 성시화 행진이 시내에서 있습니다. 성시화의 모토는 ‘전교회가 전복음을 전시민에게’ 전하는 운동입니다. 미국에서도 18명, 한국에서 12명의 대표가 참석해서 ‘국제 성시회대회’도 같이 열렸습니다. 성시화 대회는 개인의 거룩을 넘어 도시의 거룩을 위한 연합 운동입니다.
올해는 평택 순복음 교회를 섬기는 강헌식 목사님이 강사였고, ‘부흥 어게인’ 찬양팀 17명이 합류해서 찬양으로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씀을 들고, 같은 찬양을 불렀지만 모두가 같은 은혜를 받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들리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것을 듣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예배를 드리고, 같은 말씀을 듣지만 모두가 같은 반응은 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4종류의 ‘마음 밭’의 비유가 나옵니다. 같은 씨를 뿌리지만 마음의 밭에 따라서 결과는 다릅니다. 길가는 마음이 굳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돌밭은 말씀을 기쁘게 받지만 뿌리가 없어 금방 흔들립니다. 가시밭은 세상의 염려와 욕심이 말씀을 막아 열매가 없습니다. 옥토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입니다. 마음 밭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 단어를 붙잡고 갑니다. καρδία(카르디아) 마음, καθαρός(카타로스) 청결, ὄψονται(옵손타이) 볼 것이다’ 입니다.
- 마음(καρδία)
첫번째 단어는 ‘마음’은 καρδία(kardia)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예수님 시대 종교적 분위기에는 ‘겉의 정결’이 강했습니다. 손 씻음, 음식, 의식적 정결, 외적 규례 등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마음의 정결’을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데 속으로는 불신이 커질 때, 겉으로는 봉사인데 속으로는 원망이 자랄 때, 겉으로는 미소인데 속으로는 미움이 굳을 때, 겉으로는 겸손인데 속으로는 교만이 자랄 때, 외식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회칠한 무덤’(마 23:27)과 같다고 책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삼상 13절에 블레셋과 전투를 앞두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고, 15장에는 아말렉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무 전리품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고 다윗에게로 옮겨집니다.
16장에 사무엘은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6-7) 사무엘은 그곳에 없었던 8번째 막내아들인 다윗이 오자 그의 중심을 보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 청결(καθαρός)
두 번째 단어인 ‘청결’은 καθαρός(katharos)은 단순히 ‘더럽지 않다’는 의미를 넘어, 오염되지 않음, 정화됨, 그리고 섞이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한 번도 더러워진 적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졌으나 씻겨진 상태, 혼합되었으나 다시 정화된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청결은 도덕적 완벽함이 아니라, 흩어졌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는 단일한 시선의 회복입니다.
지난 주는 3박 4일 동안 울릉공에서 ‘구세군 친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전체 주제는 ‘Cruciform’이었습니다. cruciform의 기본 뜻은 “십자가 모양의, 십자가 형태를 띤”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단순한 모양을 넘어 ‘십자가적 삶’, 즉 자기희생 겸손 사랑 고난을 통한 순종 과 같은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닮은 삶을 가리킬 때 ‘cruciform’ 또는 ‘cruciform life’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지막 시간에 요한 웨슬리의 기도문을 읽으며 헌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에게 감동적인 문장은 “Let me be put to work for you or set aside for you. Praised for you or criticized for you” (일을 해도 주님을 위해서 하고, 일을 내려 놓아도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고, 칭찬을 받아도 주님을 위해서 받고, 비난을 받아도 당신을 위해서 받게 하소서) 기도문을 읽을 때 고전 10:31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저는 사관으로 현역이든지, 은퇴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청결은 다른 욕망과 섞여 탁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 즉, 청결은 투명한 ‘마음의 렌즈’와 같습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혼합되지 않고, 희석되지 않고, 분열되지 않고, 두마음을 품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단일한 마음’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정화(淨化), 정서적 해소, 감정의 배출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상한 감정을 배출함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카타르시스는 마음의 청결함과 깊이 연결된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영적 카타르시스입니다. 눈물은 마음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솔직한 토로는 영혼의 정화입니다. 마음이 정화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겉을 꾸미는 종교’가 아니라 ‘속을 새롭게 하는 종교’입니다.
- 볼 것이다(ὄψονται)
세 번째 단어는 ‘볼 것이다’는 ὄψονται(opsontai)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 경험’이 아니라 ‘관계적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삶 속에서 인식하는 것 즉,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눈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외의 것들로 마음이 흐려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욥기는 총 4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장: 욥의 고난 시작
욥은 동방의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된다. 사탄은 그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은 욥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조건으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와 재산, 건강을 모두 잃지만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3–37장: 논쟁과 고난의 대화
욥은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며 친구들과 논쟁을 시작합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욥은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후반부에는 엘리후라는 젊은 인물이 등장하여 고난의 교육적 의미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설명합니다(32-37).
38–42장: 하나님의 응답과 욥의 회복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나타나 창조 세계의 신비와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욥의 인과응보의 법칙의 질문에 대답대신, 창조의 법칙으로 재질문을 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은 그의 친구들을 책망하고 욥을 회복시키십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욥은 이전보다 2배의 축복을 받으며 욥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오늘의 말씀을 3단어로 요약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음은 인간의 ‘인격의 중심’입니다. 청결은 투명한 ‘마음의 렌즈’입니다.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 모두 청결한 자의 축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3-7)
산상수훈(마 5–7장)은 ‘구원의 법’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성결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서론인 8복에서는 세상이 말하는 복과 전혀 다른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고, 많이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며, 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팔복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 다섯 번째 복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놓여 있습니다. 앞의 네 가지 복은 주로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복에 이르러, 이 내면의 복은 이제 바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마음이 사람을 향한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긍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8복을 ‘8개의 따로 떨어진 복’으로 이해하지만, 8복은 단계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품고 확장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8복은 따로 다로 분리된 복이 아니라 연결된 복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있는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따로 떨어진 9개의 덕목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Fruit)’ 안에 있는 9가지 표현입니다. 즉, ‘열매들(fruits)’이 아니라 ‘열매(fruit)’ 단수입니다.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성경이 말하는 긍휼(엘레오스)은 상대의 연약함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실제 행동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NIV 성경에서는 긍휼을 ‘the merciful’이라 했고, 공동번역에는 ‘자비’라고 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긍휼은 순간적인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보실 때, 굶주린 무리를 보실 때, 죄인들을 보실 때마다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다 보면, 이 사람의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는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을 때, 단순히 안타까워하는 정도를 넘어 마음 깊은 곳이 움직이는 ‘자비’를 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말하는데, 이 마음이 바로 긍휼한 마음입니다.
호주 오기 전날 2월 25일 구세군 연탄봉사를 갔습니다. 서울에는 아직도 달동네가 여러곳 있습니다. 달 동네는 달이 가까운 산동네입니다. 구세군에서는 매년 어려운 곳을 찾아가 연탄 나눔 행사를 합니다. 올해는 홍제동 ‘개미마을’이었습니다. 구세군인들 뿐 아니라 서대문구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이 왔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아주 춥지는 않았습니다. 연탄은 일렬로 줄을 서서 나르기도 했고, 또 가파른 계단이 있는 곳에는 지게로 나르기도 했습니다. 연탄을 다 나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가벼웠습니다. 구세군이 나눈 연탄으로 따뜻한 겨울을 지낼 수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이 봉사를 통하여 저는 하나님의 긍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호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 말씀은 단순한 모방의 요청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선택적인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본질적 표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비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한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큰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라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주인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이라는 작은 빚을 진 동료의 목을 잡고 갚으라고 다그치며 옥에 보냈습니다. 주인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책망하며 그를 잡아 감옥으로 보냅니다. 왜입니까? 자기가 받은 자비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3)
갈릴리 호수가 살아 생명력이 넘치는 것은 받은 만큼 계속하여 흘려보내기 때문이고, 사해가 죽은 것은 받기만 했지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저장고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입니다.
-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강하고도 깊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실수하면 금방 정죄합니다. “왜 저렇게 했을까?” “저건 틀렸어.” “저 사람은 안 돼.” 우리는 너무 쉽게 심판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판단은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판단은 관계를 끊습니다. 판단은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듭니다. 판단은 사람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반면에 긍휼은 무엇을 합니까? 긍휼은 닫힌 문을 다시 엽니다. 긍휼은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긍휼은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킵니다. 긍휼은 죄인을 죄에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게 하는 힘이 됩니다. 심판은 관계를 끊지만, 긍휼은 관계를 다시 열고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자격을 따지면 누구도 긍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보셨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저 사람은 긍휼이 필요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긍휼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힘입니다. 긍휼은 공동체를 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한국에서 첫번째 주일은 양화진에 가서 오전 8:30분에 백주년 기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전 10:00에는 옆에 있는 절두산 가톨릭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예배 분위기는 개신교가 가톨릭 같고, 가톨릭이 개신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가톨릭 미사에서 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가기 전에 설교한 팔복의 4번째 복인 의와 관련된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정의와 의’에 대해서 구분을 하였습니다. 정의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라면, 의는 ‘정의에 긍휼’이 포함된 것이라며 자신의 간증을 하였습니다.
“제 사택이 성북동에 있는데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비싼 차를 받았습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습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차 뒤 유리창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여인이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투는 저에게 복음과 같이 들렸습니다. 고소를 하거나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앞에 기사에게 차가 손상된 곳이 없는 것 같으니 그냥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해서 가는 차량에 몇 번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신부지만 차량이 밀릴 때는 신경질도 많이 내고, 조금 늦게 가는 차에게 클랙슨을 누르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리 급하더라도 클랙슨을 누른 적이 없고, 왠만한 일은 다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심판하는 정의가 아니라 긍휼이 있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입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무법주의’고, 사랑이 없는 공의는 ‘율법주의’입니다. 사랑과 공의가 만난 곳이 ‘십자가’입니다.
- 긍휼은 긍휼로 응답한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긍휼이 단순한 덕목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여는 열쇠임을 보여줍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긍휼이 마음에 흘러넘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해 자연스럽게 자비와 이해와 용서를 흘려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긍휼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사람에게 긍휼로 응답하십니다.
심판이 아니라 긍휼을 선택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깊이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긍휼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긍휼 안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모두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넘어집니다. 우리는 실수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드십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선포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니라”
세상은 강한 사람을 복되다 하고, 차갑게 자기 영역을 지키는 사람을 지혜롭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긍휼은 심판을 이기며, 긍휼은 긍휼로 응답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긍휼 안에 끝까지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이 가득하여, 우리의 말이 긍휼이 되고, 우리의 눈빛이 긍휼이 되며, 우리의 손길이 긍휼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말 짧은 주례사
2026년 3월 14일 11시 ‘서성민 군과 조연수 양’ 주례사 창 2:24절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랑 서성민 군과 신부 조연수 양의 거룩한 언약을 맺고, 한 몸을 이루는 귀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복 주신 거룩한 언약입니다.
두 사람은 구세군 교회에서 누구보다 신실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섬겨 온 리더들입니다. 통역으로, 음향으로, 찬양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헌신하며 교회를 세워 온 귀한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지만 그동안 그러지 못해서 늘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결혼식에서 두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기회가 생겼습니다. 두 사람은 저에게 주례사를 짧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작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말 짧게 1시간만 하겠습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러시아 속담에 ‘바다에 갈 때 한 번, 전쟁에 나갈 때 두 번, 결혼을 할 때는 3번 기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두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며, 어쩌면 항해나 전쟁보다도 더 위험한 결혼을 기쁨으로 시작하게 된 날입니다.
성경은 결혼을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제도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혼이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곳에 들어올 때는 ‘너와 나’로 들어왔지만, 이곳을 나갈 때는 하나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혼의 본질을 세 단어로 보여 줍니다. 바로 떠남, 연합, 한몸입니다. 이 세 단어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떠남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부모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의 은혜를 잊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부모의 사랑 안에서 자라왔던 삶을 감사함으로 품되,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가정을 책임지는 독립된 존재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은 훌륭한 부모님 아래서 가정교육을 정말 잘 받고, 많은 사랑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두 사람이 자신의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누군가의 자녀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며, 장차 한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 연합
두 번째 연합은 단순히 함께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연합은 마음이 연결되고, 삶의 방향이 맞춰지고, 믿음의 중심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연합에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이해가 필요합니다. 둘째, 양보가 필요합니다. 셋째, 용서가 필요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기려 하기보다 양보해야 합니다. 서운함을 오래 붙들기보다 용서로 다시 손을 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의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만 바라보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주님을 바라보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할 때 연합이 깊어지고, 함께 예배할 때 사랑이 회복되며, 함께 말씀 앞에 설 때 가정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 한몸
마지막으로 성경은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결혼의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지만 여전히 둘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몸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상대를 남처럼 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 몸을 아끼듯 배우자를 아껴야 하고, 내 마음을 살피듯 배우자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이제부터 신랑의 기쁨은 신부의 기쁨이 되고, 신부의 눈물은 신랑의 눈물이 됩니다. 기쁠 때만 사랑하지 말고 어려울 때도 사랑하십시오. 건강할 때만 함께하지 말고 연약할 때도 함께하십시오. 좋은 날의 배우자만이 아니라 슬픈 날의 배우자도 되어 주십시오. 그때 비로소 두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한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떠남은 새로운 가정을 세우는 책임의 시작입니다. 연합은 서로의 이해, 양보와 용서로 이루어집니다. 한 몸은 하나님 안에서 맺는 거룩한 언약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인생길은 장미빛 아스팔트길이 아닙니다. 사노라면 건너야 할 물도 있고, 넘어야 할 산도 있고, 지나야 할 광야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잡은 손을 놓지 말고 천국까지 함께 완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축복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