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대조하며,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시편 150편을 다섯 권으로 나눌 때, 시편 90편은 4권(90-106편)의 첫 번째 시에 해당된다. 시편의 제목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이다.
1. 영원과 티끌
2절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라, 3절에는 인간은 ‘티끌’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유일무이한 존재인 반면에 인간은 유한하여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했고, 곡을 할 때도 ‘I Go’라고 했다.
오래전 초등학생인 조카가 물었다. “삼촌 나는 늙어가는 거야, 젊어가는 거야”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신체가 자라는 것을 성장이고, 마음이 자라는 것은 성숙이라고 한다. 인간은 25세가 되면 성장은 멈추지만, 성숙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아. 인간은 배우는 한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거야.”
인간은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늙어가지만, 배움이 계속되는 한 익어간다. 늙은 노인이 있는가 하면, 익은 노인도 있다. 우리는 익은 노인을 ‘어르신’이라고 한다. 사람은 60이 넘으면 절대로 남의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결코 변하지 않는다. 배움을 포기한 사람은 늙은 사람이다. 늙은 청년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모르는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모르는 줄 알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란 말도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란 말도 있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란 뜻이다.
2. 영원과 순간
4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천년이 엄청나게 긴 시간이지만 주께서는 밤의 한순간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아서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버린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어느 청년이 이 말씀을 읽고 용기백배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께는 천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오랜 시간입니까?”, “내게는 천년은 하루와 같은 시간이다” 청년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 하나님께 백만 불이라는 돈이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백만불이 내게는 1불 정도 되지” 청년이 하나님께 부탁했다. “하나님, 저에게 1불만 주세요” 하나님께서 대답했다. “그래 주고 말고, 하루만 기다려라”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인은 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인데 자랑할 거라고는 수고와 슬픔뿐인데, 그런 시간마저 날아간다’ 고 했다. 인간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2015년 유엔의 새로운 연령 구분에 따르면 18~65세는 일괄적으로 ‘청년(Youth)’으로 분류하고, 66~79세 연령대는 ‘중년(Middle)’이다. 8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노인(Old)’이고, 100세를 넘으면 ‘장수 노인(Long lived elderly)’이라고 칭한다.
3.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마지막 17절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다. 지식은 인간이 노력해서 습득하는 것이고,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은총은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 20대에는 20 km로 달리고, 40대에는 40 km로 달리며, 60대에는 60 km로 달린다. 김동길 교수는 올해 93세이다. 그는 나이의 속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30대까지는 천천히 가더니, 40부터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하여 숨 쉴 사이도 없이 41,42,43… 50이 되고, 50부터는 중간에 다리를 놓고 건너뛰어, 50, 55, 60이 되고, 60은 아예 중간 다리도 없이 60 그리고 70이 되고, 70부터는 눈을 몇 번 껌벅껌벅하였더니 80이 되었다고 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안다. 신학 용어에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라는 뜻이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세상 속에서 인정받기 위한 삶을 산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소망의 하나님 (로마서 15:13)
9월 7일 ‘파라마타 미션’(Parramatta Mission)의 CEO인 Keith Hamilton을 만났다. 파라마타 미션은 시드니 서부 지역에 500 여명의 직원과 많은 자원 봉사자가 70 개 이상의 센터에서 식사, 숙박 및 정신건강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선교센터 벽에는 ‘HOPE’라고 쓴 큰 글자가 있다. 파라마타 미션은 소망을 포기한 사람에게, 소망을 되돌려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데로 생각한다. 로마서 15장 13절에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새번역 성경에는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1. 절망이 아니라 소망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6:19)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게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절망이란 ‘본래의 자신을 잃어 버린 상태’라고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은 ‘영혼의 닻’이라고 했다.
영국의 상징주의 화가 와트(Watts)는 눈에 수건을 두른 여인이 지구본 위에 앉아서 비파를 연주하는 그림을 그렸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분위기인데 작품의 제목은 ‘HOPE’이다. 19세기 후반의 영국 경제는 공항을 겪고 있었고, 와트 자신도 손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절망적이 상황에서 그림을 그렸다. 하늘에는 해도 달도 별도 없다, 비파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다. 물질의 줄이 끊어지고, 남편의 줄이 끊어지고, 자식의 줄도 끊어지고, 건강의 줄도 끊어졌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소망의 줄’로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판도라 상자’가 있다.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가 호기심으로 상자를 여는 순간, 악한 것들이 빠져 나가자 너무 놀라 뚜껑을 닫았다. 모두 나가고 희망만 남았다. 희망은 오늘을 사는 힘의 원천이다.
2. 야망이 아니라 소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야망은 나의 꿈이고, 소망은 하나님의 꿈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없다. 우리가 무릎 꿇는 순간부터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교만한 자는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다.(벧전5:5)
5년 전 구세군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인도했던 찬양 사역자 ‘장종택 목사’가 집회 중에 아픈 자녀를 위하여 기도부탁을 했다. 그때 장목사는 ‘정직한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썼다. 의례적으로 대답 말고, 정말 기도해 주는 기도가 ‘정직한 중보기도’이다. 구세군 본부에서 근무를 할 때 매주 기도회가 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기도의 제목을 말하면 기도해 주는 것이다. 바로 위의 형이 심장이 문제가 있어서 이름을 말하며 기도해 달라고 했다. 옆에 있던 ‘Mandy’가 형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외국인이 한국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1주일 후에 정확하게 형의 이름을 발음하며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 것이다. 그녀는 정직한 중보기도를 했다. 정직한 중보기는 기도 후 궁금해 하는 기도이다.
지난 금요일 알파에서 가르쳤던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같이 배웠던 두 명이 더 배석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면서 호주에서 하이라이트가 뭐냐고 물으니, 학교에서 성지순례 갔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앞에 앉은 분은 선교지에서 선교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10여 년 전 만난 아프가니스탄 여인을 위해서 아직도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좋겠지만, 만약 못 만나더라도 천국에서 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했다.
서울 대학교에 행복연구센터가 있다. 행복연구센터장인 최인철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행복은 ‘의미와 재미’가 만날 때 발생한다고 했다. 의미는 있는데 재미가 없으면 삶이 너무 무겁고, 재미는 있는데 의미가 없으면 삶이 너무 가볍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의미만 있고 재미가 없으면 설교가 너무 무겁고, 재미는 있는데 의미가 없으면 설교가 너무 가볍다. 설교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으면 짧기라도 해야 한다.
3.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 3)
베드로 전후서는 일명 ‘소망의 서신’이라고 한다. 시대적 배경은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될 때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산 소망’을 굳게 잡음으로 닥쳐올 핍박을 이겨내라고 권면하는 서신이다. 산소망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이다. 현실에 이기지 못하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다. 물고기가 작더라도 살아 있으면 역류할 수 있지만, 큰 물고기라도 죽어 있으면 현실의 물결에 쓸려간다.
인도에 간디가 있다면, 남아프리카에는 만델라가 있다고 할 정도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백인 정부는 그는 28년을 감옥에 투옥시켰다. 세계 여론은 복역 기간이 마치고 나오는 그의 모습을 궁금해 했다. 3번의 강산이 변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출옥하였다. 취재 기자들은 한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5년 정도면 폐인이 되는데 어떻게 27년간 복역을 하시고 이렇게 건강할 수 있습니까“,
“저는 교도소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있어 교도소는 저주의 장소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흑백문제를 종식시켰다. 유엔은 넬슨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선포하였다.
시편 39:7절에 시인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세상의 줄이 다 끊어지더라도 소망을 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할일이 있다는 것이다.요엘서 2:28장 성령의 선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은 약속은 사도행전 2장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전2:17)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어제의 이야기가 아닌 내일의 이야기를 한다.
세계관의 영적 필요성
1. 세계관(Worldview)이란?
세계관(Worldview)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 즉 ‘세상을 보는 관점’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계관은 바꾸거나 고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안경과 같아서, 누구나 세계관을 통해 가시적, 비가시적 세계를 보고 인식하게 된다. 세계관은 삶의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이다. 예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세계관이 있다. 세계관을 크게 3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Theism), 부정하는 무신론(Atheism) 그리고 ‘신의 유무를 모르겠다’는 불가지론(Agnosticism)이다.
1) 유신론(Theism) – 창조론(Creation)
유신론은 일신론(Monotheism), 다신론(Polytheism), 범신론(Pantheism)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일신론은 기독교, 유태교, 모슬렘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가 누구이냐?’ 이다. 유대교는 좋은 사람, 모슬렘은 선지자, 기독교에서는 예수는 구세주이시고,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다. 다신론(Polytheism)은 고대부터 세계 각 곳에서 인류에게 인기가 많았던 신관이다. 고대 이집트, 바벨론, 희랍, 로마 등은 모두 다신론을 믿어왔다.
범신론(Pantheism)은 세계밖에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닌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과 자연법칙을 신이라 하거나, 모든 것 안에 신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Pantheism’은 그리스어 ‘pan’(모두, 모조리)와 ‘theos’(신)의 합성어에서 찾을 수 있다. 범신론은 신과 우주와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 그 동일성을 설명하는 세계관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어서, 그 속에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창조론을 믿고 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과 동물 등을 각각 창조했음’을 믿는다. 창세기 1장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고 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은 창조자이다. 여기서 창조란 단어는 ‘바라'(Bara)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 때 사용한다. 유에서 유를 만들 때는 ‘아사'(Asah)이다.
2) 무신론(Atheism) – 진화론(Evolution)
무신론에는 자연주의(Naturalism), 염세주의(Pessimism), 허무주의(Nihilism), 무신론적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있다. 자연주의는 실제의 사물과 현상은 자연의 범위 안에 있다고 보고, 초자연적(Supernatural)인 존재나 힘을 믿지 않는다. 염세주의는 ‘비관주의’라고 하며, 세계는 원래 불합리하여 비애로 가득 찬 것으로서 행복이나 희열도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허무주의는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눈다. ‘실존’이란 말은 사고양태나 표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실존과 존재’는 다르다. 존재와 실존’의 차이는 무엇인가? 존재는 있는 것이고, 실존은 있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객관적 ‘크로노스’의 시간에 의미가 부여되면, 주관적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것과 같다. 그 의미는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간 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에, 인간에게만 ‘실존’이란 단어가 사용된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실존주의(實存主義)에서는 인간을 ‘피투적 존재(被投的 存在)’로 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존재를, 다시 스스로 던짐으로써 의미를 만들어간다. ‘피투적 존재’가 ‘기투적 존재'(企投的 存在)가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를 ‘실존’한다고 한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자기존재의 의미를 하나님 없이 찾으려는 사람들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자연주의는 진화론을 주장한다. 진화론이란 생물이 우연이 자연적으로 생기게 되었다고 보는 이론이다. 원자들의 무작위적인 반응에 따라 무기물에서 간단한 생물로 되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형태와 기능이 변하여 처음에는 간단하고 하등한 생물이던 것이 점차 복잡하고 정교한 고등생물로 되어 오늘날 이처럼 다양한 생물들이 있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3) 불가지론(Agnosticism) –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불가지론은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세계관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거짓 모습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불가지론자’이지만 아마 신이 있을 것이라 믿는 사람과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각각 ‘유신론적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로 불린다.
이들 중 ‘창조론과 진화론’을 절충하여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제시한 사람들이 있다. 몇 년 전 ‘지적설계론’과 관련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첫 장면은 비행접시가 등장하고 그곳에서 외계인이 내려와 검은 약을 마시고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그의 염색체 들이 물위로 흘러가면서 시작한다. 곧 이어 2089년 인류의 근원을 찾으려는 고고학자들이 각각 다른 지점에서 한 별을 지정하는 사인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하여 우주비행을 시작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인류를 창조한 엔지니어를 만나지만, 그가 창조자가 아님을 안다. 그들은 엔지니어를 창조한 존재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또 다른 행성으로 출발하면서 막을 내린다.
‘지적설계론’은 우주는 창조주가 ‘의도적으로 창조하였는지’,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히 진화되었는지’를 규명하려는 탐구이다. ‘지적설계론’은 현재의 진화론 과학이 생명의 기원과 복잡성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원래 다윈주의의 진화론에 도전을 하고, 창조론에 무게를 실어 주기 위한 이론이다. 그러나 ‘유신론 대 무신론’ 논쟁은 과학적인 증거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각각은 ‘창조론 대 진화론”이라는 아주 상반된 세계관(Worldview)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2. 기독교 세계관이란?(Christian Worldview)?
기독교 세계관이란? 그리스도인이 가진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이며’, ‘세계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알게 된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에서 왔다. 우리나라 성경은 처음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중국어로 基督 을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우리는 ‘기독’이라고 발음했다. 1882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로스 선교사가 누가복음을 번역을 했고, 1887년 신약성경젼서가 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1884년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1885년 아펠젤러와 언더우두가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조선으로 왔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세 차례 언급되었다. 사도행전 11:26, 26:28; 베드로전서 4:16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안디옥 사람들은 자기들과 말, 문화, 행동, 세계관 등이 다른 이상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은 안디옥에 살고 있지만, 안디옥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빌3:20)을 가지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크리스천은 누구인가? 로마서 8:9절에 크리스천의 정의가 정확하게 나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래서 고전3:16절, 고전 6:19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손님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계신다. 따라서 크리스천의 세계관은 내가 보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왜 청와대인가? 왜 백악관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 그 안에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다. 창세기 1:27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고,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고후 5: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롬 8: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느니라” 그래서 이제 우리는 벧전 2:9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빌3:20)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인이 바뀐 것이고, 중심이 바뀐 것이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빌1:21)
3.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시대정신 자체가 용어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구분도 불분명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시대정신이다. 철학적으로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칠 때이다. 니체를 일명 ‘망치철학자’라고도 한다. 그는 모든 ‘절대가치’를 망치로 쳐서 부셨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절대가치’가 사라지고 ‘상대가치’가 지배하는 ‘절대란 절대로 없는 시대’로서, 단순한 철학적 용어가 아닌 서구의 역사, 문화, 정치, 예술, 건축 등 모든 분야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 프리모더니즘(Pre-Modernism, 전근대)
‘프리모더니즘’은 근대 이전의 사회를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원시 사회, 고대 사회, 중세 사회를 의미한다. 프리모더니즘은 신과 같은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우주 만물이 상생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전 우주를 관통하는 목적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진리는 절대 권위를 가진 교회와 같은 곳을 통해서만 계시된다고 믿었다.
자연과 인간 사회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행위를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사회 구조가 단순하고, 개인의 권리보다는 전통적 사회 질서가 중시되며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연 집단으로서의 촌락이나 혈연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커다란 사회적 역할을 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등장으로 이성 중심적 사고의 전통이 마련되었고, 자연 및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덕도 발전하게 되었다.
2) 모더니즘(Modernism, 근대)
모더니즘은 신이 아닌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시대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씨를 뿌려, 계몽주의 시대에 꽃을 피었고, 산업혁명으로 열매를 맺었다. 산업혁명 이후 발전되는 기계와 산업구조로 인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와 시대정신이 창조되었다. 인간의 인격이 존중되었으며, 기술의 발달로 삶은 편리해 졌고, 의학의 발전으로 수명도 늘어났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1,2차 세계 대전을 통하여 위기를 맞게 된다.
문명국이라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전쟁 후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더니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한데 모은 것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이란 말에 ‘뒤’나 ‘후’를 뜻하는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든 용어이다. 말 그대로 모더니즘 이후에, 모더니즘과 상반되는 특징을 갖는 작품이나 작가, 혹은 취향이나 태도 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 ‘건축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능 중심의 모더니즘 건축양식과는 다르게, 본래의 목적이나 기능과 상관없이 새로운 모양과 형태로 건축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프랑스와 리요트르’가 문화에 접목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리요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담론들'(Meta-Narratives)에 대한 불신’이라고 정의했다. ‘거대담론’이란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권위, 사상, 이념, 진리 등을 말한다. 이 시대는 ‘거대담론’이 해체되고, ‘주관적, 상대적, 다원적, 복합적’ 등의 단어로 대체되어 혼합주의(Syncretism), 다원주의(Pluralism), 세속주의(Secularism), 상대주의(Relativism), 해제주의(Deconstructionism) 등의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와 상반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종교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이다. ‘종교 혼합주의’란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와 서로 혼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종교는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도 샤머니즘과 혼합한 기복주의, 불교의 고행주의와 혼합한 수도원주의의 명상 운동, 감정과 직관주의와 타협한 신비주의, 이성과 합리주의와 혼합한 자유주의 등이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참 종교를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인정한다. 따라서 ‘구원’은 종교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길이 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한 것과 같다. 하지만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믿는 기독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상이다. 알랑 레이스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배타주의 (Exclusivism), 포괄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가 그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의 배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세계관의 영적 필요성
초대교회 이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기독교는 끊임없는 공격과 질문에 답해야 한다. 모더니즘 시대의 문화를 획일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비판하며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 하면서 기독교는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세속정부는 종교를 넘어, 인종을 넘어, 문화를 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지 갈등하거나 대립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시대는 ‘절대’란 단어는 해체되고, ‘주관적, 상대적, 다원적, 복합적’ 등의 단어가 일반화되었다. 이제 ‘성과 속’, ‘선과 악’, 심지어 ‘남과 여’의 구분도 불분명해졌다. 혼탁한 시대 속에서 기독교는 진리를 ‘방어'(Defense)하고 ‘제시'(Presentation)해야만 한다. 변증학(Apologetics)이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공격’에 대한 방어(Defending)와 ‘긍정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Presenting)하는 학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logos)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apologia)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변증학’이란 용어가 파생된 것은 그리스어 ‘아폴로기아(apologia)’로, 이는 변호(defense), 즉 ‘법정에서 피고의 무죄를 증명하는 논리 정연한 주장 또는 논증이나 신념의 정확성에 대한 입증’을 말한다.
법정에서 유죄를 주장하는 행위를 ‘카테고리아'(kategoria), 변호(Defense)하는 행위를 ‘아폴로기아'(Apologia)라고 한다. ‘카테고리아’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공격하다’와 ‘질문하다’는 뜻이다. 이에 반하여 ‘아폴로기아’는 ‘공격에 방어’와 ‘질문에 대답’한다는 의미이다. 변증은 논쟁이 아니라 소통이다. 변증으로 상대방을 압도하여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게 하는 방법이다.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진리를 소개하는 변증학은 시대의 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교회 잘 다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헌금을 많이 낸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봉사 많이 한다는 이야기는 더욱더 아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세계관’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란, ‘인간은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의 다양한 질문에 ‘예수’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다르다면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살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하여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바울은 살아야 될 이유와 죽어야 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겠는가?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