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인간의 세 종류의 관계 (요일 4:7-10)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간(間)은 ‘사이와 관계’라는 뜻으로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3종류의 관계가 있다. 위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옆으로는 사람과 수평적 관계, 안으로는 나와 내면적 관계이다. 하나님과 관계는 대신관계, 인간과 관계는 대인관계, 나와의 관계는 대아관계이다.
1. 대신관계 (對神 關係)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창1:27)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영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Life)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이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성결이다.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 하나님과 대화는 기도이다. 도적이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온 것은 우리에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주기 위해서 오셨다.(요10:10) 풍성한 생명이란 생명을 받은 자가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살 수 있는 성결을 의미한다.
2. 대인관계 (對人 關係)
인간은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이다. 사회적 존재는 너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 십계명의 1-4계명은 대신관계에 이어서 5-10계명은 대인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바울 서신의 구조를 보면 전반부는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후반부는 생활에 대하여 설명했다. 대신관계가 신앙이라면 대인관계는 신앙생활이다. 하버드대학에서 724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75년간 ‘행복의 비결’에 대하여 연구했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인 ‘로버트 왈딩어’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좋은 관계이다. 첫째 좋은 관계는 행복도를 높이고, 수명도 길다. 둘째 좋은 관계는 양보다 질이다. 셋째 좋은 관계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두뇌도 보호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었다. 사람과 관계의 단절은 불행이고, 관계의 회복은 행복이다.
3. 대아관계 (對我 關係)
인간은 ‘심리적 존재(Psychological Being)’이다. 한문에 나를 뜻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다. 오(吾)와 아(我)이다. 조선시대 이덕무라는 사람의 호는 오우아(吾友我)였다. ‘내가 나를 벗 삼는다’는 뜻이다. 자기가 자기를 원수로 삼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벗 삼아 잘 지낸다는 뜻이다. 성경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에서 인간을 영-혼-육의 삼중구조로 나누었다. 여기서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푸쉬케(ψυχὴ)가 영어로 ‘혼’(Psyche)이다. ‘혼’이란 용어를 ‘마음(Mind)’ 혹은 ‘정신'(Soul)이라고 한다. 심리학(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마음. 정신, 혼이고, ‘logos’는 지식. 연구를 뜻한다.
심리학(Psychology)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아가 행동을 예측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심리학의 아버지는 독일의 심리학자 겸 철학자인 ‘빌헬름 분트'(Wundt)이다. 그를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것은 분트로부터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리하여 과학의 영역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심리학을 배울 때는 인문학 분야였고, 딸이 시드니 대학 심리학과에 입학 때는 Art와 Science로 2원화 되어 있었다. 그 후 시드니 대학은 심리학과를 Science Faculty로 통합하였다.
세 종류의 관계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때 전인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창1:27),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사랑하셨다.(요일4:9)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할렐루야, 할렐루야 (시편 150편)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긴 책이 시편이고, 가장 긴장은 시편 119편(176절)이고, 가장 짧은 장은 시편 117편(2절)이고, 한 가운데 있는 장은 118편이다. 시편 150편은 모세 5경을 본받아 5권으로 분류되어 있다. (1권 : 1-41 / 2권 : 42-72 / 3권 : 73-89 / 4권 : 90-106 / 5권 : 107-150) 각 권의 마지막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문구로 마무리한다. 특별히 시편 146-150편, 다섯 편을 ‘할렐루야 시편’이라 부른다.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기 때문이다.
1. 할렐루야 (Hallelujah)
‘할렐루야’란 ‘여호와(야)를 찬양하라(할렐루)’라는 뜻이다.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발음이고, 알렐루야는 라틴어 발음이다. 찬양(Praise)과 경배(Worship)와 찬송(Hymn)이란 용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찬양과 경배는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자랑하고 선포하여 높이는 것이고, 경배는 예배와 같은 의미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찬양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고, 찬송은 노래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 ‘성가대’라고 했지만 지금은 ‘찬양대’라고 한다. 성가는 거룩한 노래라는 의미가 있으나, 찬양의 본래 의미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찬양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섭리사역에 대한 응답이다. 찬양과 관련하여 고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예배 전에 ‘준비찬양’이란 말을 사용한다. 찬양이란 무엇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집회의 마침을 위한 기도가 아닌 것과 같다.
2. 헨델의 메시야, 44곡 ‘할렐루야’
헨델의 대표적 작품인 메시아는 전체 53곡으로, 3부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제1부는 1곡-21곡 ‘예언과 탄생’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예언과 탄생, 제2부는 22곡-44곡 ‘수난과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인간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의 죽음, 제3부는 45곡 – 53곡 ‘부활과 영생’은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 특별히 2부의 마지막 곡인 ‘할렐루야’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곡이다.
5년 전에 ‘국제 장애인의 날’을 즈음하여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세계최초로 ‘수어합창단’과 ‘시드니 필하모니아 합창단’의 합동공연이 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의 만남이다. 청각장애인이란 눈으로 듣고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선택한 작품은 ‘헨델의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음악 장르상 ‘오라토리오’이다. ‘오라토리오'(oratorio)는 성악의 일종으로 줄거리가 있는 곡의 모임이지만 배우의 연기는 없다.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오페라에 비하여 작품 스케일이 크지 않고, 독창보다는 합창이 중시된다.
같은 무대에 두 사람의 지휘자가 동시에 지휘하는 ‘오라토리오’를 상상해 보았는가? 그랬다. 이번 2015년 12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메시아’ 공연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한 지휘자(Brett Weymark)는 ‘입으로 찬양’하는 단원을 위해서, 다른 지휘자(Alex Jones)는 ‘손으로 찬양’하는 단원을 위해서! ‘수어합창단’의 지휘를 맡은‘알렉스’도 청각장애인이다. 역시, ‘메시아’의 하이라이트는 44번 ‘할렐루야’이다. 장엄한 곡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렐루야’에는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1743년 3월 런던에서 이 오라토리오가 공연되었을 때, 배석했던 영국의 왕 조지 2세가 ‘할렐루야’를 듣고 그 곡의 웅대함에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자, 관객들도 모두 함께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지금도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 퍼지면 관객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3. 시편 150편
시편 1-2편이 전체 시편의 서론이라면, 시편 146-150편은 결론이다. 이중 150편은 다섯 편의 시중의 절정이며 전체 시편의 최종결론이다. 6줄에 13번이나 할렐루야를 반복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구약시대 성전 예배에서 사용하던 모든 악기가 다 등장한다. 나팔, 수금과 비파, 손북, 현악기와 퉁소 등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의 최종 결론은 시공간을 불문하고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분이기에,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이다.
성경 66권 중에 끝이 나지 않은 책이 2권이 있다고 한다. 신약성경은 사도행전이고 구약성경은 시편이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났지만 우리가 29장을 계속해서 써야 하고, 시편은 150편으로 끝났지만 우리가 151편을 계속해서 노래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사도행전 29장을 쓰며, 시편 151편을 노래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진리가 무엇이냐? (What is the Truth?)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께 한 질문이다.(요18:38) 철학에서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고, 논리학에서는 ‘논리의 법칙에 일치한 지식’이다. 한문으로 ‘진리'(眞理)는 ‘진짜 이치’이고, 영어의 진리(truth)는 ‘소유적 개념'(Having)이 아니라 ‘존재적 개념'(Being)이다. 동양에서는 길을 뜻하는 도(道)라고 한다. 진리의 일반 사전적인 뜻은 ‘참된 도리’이다. 진리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혹은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Plato and Aristotle)
플라톤은 ‘진리’는 보이는 ‘현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밖에 있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했다. 그는 형체를 지닌 세계를 ‘현상’으로 보고, 형체가 없는 세계를 ‘이데아’라고 했다. 이데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참 존재이지만, 현상은 시공간에 국한된 ‘질료’로서 헛된 존재로 보았다.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란 용어를 통해서 ‘이데아'(형상)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질료) 내부에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의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되어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나 학당’을 보면 두 사람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아테나 학당’은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총 54명의 학자들이 서로 토론하거나 깊은 사색에 빠진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중심부에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손바닥을 펼쳐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있다. 플라톤은 하늘과 땅을 분리한 ‘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 모든 것이 있다는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Augustine and Aquinas)
중세로 접어들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신학’으로 꽃을 피웠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이원론적인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White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믿음을 갖기까지 이성을 통한 처절한 ‘지적 방황’을 하였다. 어느 날 그에게 ‘계시의 말씀’이 찾아왔다. “들고 읽어라.”(tolle lege)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폈을 때 로마서 13: 12-14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철학이 어거스틴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성경’이 답을 주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12~14).
어거스틴이 플라톤 철학을 기반으로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처럼,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하여 신학을 재구성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에 밀려 유럽에서 잊혀졌다가, 중동에서 꽃을 피워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계시와 이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신학은 계시이고 철학은 이성이나,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았다. 모든 계시는 이성으로 모색하고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쓴 ‘신학대전’은 이성으로 계시를 설명한 책이다. 아퀴나스는 ‘스콜라철학자’이다. ‘스콜라’란 뜻은 본디 가톨릭교회나, 수도원에 부속된 학문 기관을 뜻하며, ‘학교'(School)의 어원이다. 스콜라 철학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로 이어진다.
헤겔과 마르크스 (Hegel and Marx)
근대가 되면서 ‘계시와 이성’은 ‘관념론'(Idealism)과 ‘실재론'(Realism)으로 발전했다. 관념론은 ‘인간의 정신’인 관념을 중시하고, 물질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실재론은 ‘실재’하는 것은 세계와 사물이고, 인간의 ‘의식’은 이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실재론이 조금 더 발전되면 정신은 물질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유물론’(Materialism)이 나온다. 서양 관념론을 완성한 사람은 헤겔이고, 헤겔의 좌파에 선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하여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절대정신’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 ‘포이에르바흐'(L. Feuerbach)의 유물론을 받아들여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역사와 사회를 해석했다.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했다.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자”란 뜻이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했다. 공자는 “아직 나는 진리가 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고, 부처는 “어떤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예수는 “내가 진리”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