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뜻인가?
롬 12: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쓴 글입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구원에 대한 교리적인 말씀이고, 두 번째는 12–16장은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인 성결에 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의 첫 단어인 ‘그러므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접속사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는 ‘영적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는 ‘일(work)’, ‘섬김(service)’, ‘예배(worship)’라는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세 의미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평일에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2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자주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나의 뜻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결혼을 할 때, 진로를 결정할 때, 사람을 만날 때, 사역의 방향을 정할 때,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길이 주님의 뜻입니까?”
기도는 열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답을 마음속에 정해 놓고, 하나님께 통보하듯이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뜻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세 가지 기준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첫 번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구세군 교리 1조). 성경은 진리의 영원한 표준이며 척도이고 다림줄입니다.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음이 뜨겁고, 상황이 열리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어두운 길을 걸을 때 등불이 없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쉽게 길을 잃습니다. 내 감정이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내 경험이 최종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욕망이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이고 방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먼저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말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내 뜻이 다듬어지고, 내 욕심이 걸러지고, 내 길이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4:3절에 하나님의 뜻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먼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what we do)보다 ‘우리가 누구인가'(who we are)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취보다 우리의 성품을, 우리의 일보다 우리의 존재를 먼저 보십니다.
디모데후서 2:20–21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깨끗한 그릇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깨끗하게 구별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두 번째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나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길입니다. 나의 성공을 과시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사역할 때나 사업을 할 때나,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BAM이란 말이 있습니다. Business as Mission의 약자로서 비즈니스가 선교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비즈니스 자체가 선교란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기 고집을 믿음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처럼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기만을 하며 사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기만은 자신을 속이면서도 스스로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겉으로는 옳은 말을 하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 욕심, 자기 판단, 자기 계획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고 내 이름만 남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성공은 자기가 영광을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 번째 기준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나 개인의 만족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먼저 구원받은 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며, 하나님의 의와 평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하나님의 뜻은 나만 잘되는 길이 아닙니다. 나만 편안해지는 길도 아닙니다. 나만 인정받고, 나만 높아지고, 나만 유익을 얻는 길도 아닙니다. 개인의 감정이 공동체의 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일을 망쳐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공동체를 살리고, 이웃을 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더 넓은 자리로 이끄십니다. 나의 유익만 보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나의 문제만 붙드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나의 만족만 구하는 자리에서 이웃의 생명과 공동체의 회복을 구하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천국문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개인 입장 불가, 단체입장 환영’
나의 뜻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나의 뜻은 내 유익을 먼저 계산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지 나의 뜻인지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늘 이렇게 기도하며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 뜻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까?
주님, 이 일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입니까?
주님,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길입니까?
이 세 가지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설 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나의 욕심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는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나의 계획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오해하는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나의 뜻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내 욕심을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내 계획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착각했으며,
내 이름을 높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할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걸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길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나의 이름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구하게 하시며,
나의 나라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지혜서의 세 가지 지혜 (잠 9:10, 욥 1:1, 전 12:13)
구약성경 39권은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나눕니다. 이중 시가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말합니다. 시가서 가운데 특별히 욥기, 잠언,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부릅니다. 지혜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 권은 모두 지혜를 말하지만, 각각 다른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잠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일상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욥기는 삶의 질서가 무너지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 필요한 ‘고난 중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전도서는 해 아래 인생의 허무를 깊이 성찰하게 하며, 그 허무를 넘어 하나님과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해 위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입니다. 호크마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호크마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고, 그 분별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결국 이 세 권의 지혜서는 모두 한곳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경외’입니다. 잠언도 하나님 경외에서 시작하고, 욥기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 경외를 붙들며, 전도서도 인생의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님 경외를 선포합니다.
- 일상의 지혜(잠언)
잠언의 지혜는 ‘일상의 지혜’입니다. ‘일상의 지혜’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현실 세계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잠언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말하고, 선택하고, 일하고,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실제적인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지혜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지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잠언의 핵심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지식과 지혜는 조금 다릅니다. 영어로 지식은 Knowledge, 지혜는 Wisdom입니다. 지식의 知는 ‘알지’로 안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듣고,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의 智는 지혜지로 ‘슬기롭다, 통찰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뜻과 방향을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달을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智慧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깨닫고 바르게 판단하며 삶에 적용하는 슬기입니다. 知識은 머리로 아는 것이고, 智慧는 마음과 삶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知識은 아는 힘입니다. 智慧는 바르게 사는 힘입니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잠언서는 기본적으로 ‘인과응보의 법칙의 지혜’입니다. 어떤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결과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법칙입니다. 정직한 길은 생명으로 향하고, 교만한 길은 넘어짐으로 향합니다. 부지런함은 열매를 맺게 하고, 게으름은 궁핍을 가져옵니다. 온유한 말은 사람을 살리지만, 함부로 내뱉는 말은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무질서하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안에 질서를 두셨고, 그 질서 안에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있습니다.
- 고난 중의 지혜(욥기)
욥의 지혜는 ‘고난 중의 지혜’입니다. 잠언이 삶의 질서와 원리를 말한다면, 욥기는 그 질서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지혜를 묻습니다. 욥기의 지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인생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삶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욥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었고, 자녀를 잃었으며, 건강을 잃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기보다 정죄를 받았습니다. 욥기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러한 단순한 해석을 거부합니다.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을 때, 믿음은 어떻게 서 있어야 합니까? 욥기의 지혜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욥기는 1-2장, 3-31장, 32- 37장, 38장-42장으로 나눕니다. 1-2장은 욥의 고난의 시작입니다. 3-31장은 욥의 3친구와 욥과의 변론을 합니다. 욥의 3친구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하여 욥을 공격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욥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32-37장은 이들의 공방전을 보고 있던 어린 엘리후가 일어나 욥의 3친구를 책망하고, 자신이 죄 없음을 주장하는 욥의 어리석음도 지적합니다. 그리고 38장에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등장하여 욥의 질문에 대답 대신 되묻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창조의 질문을 하지만 욥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야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고백은 욥기의 깊은 결론을 보여 줍니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완전히 설명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는 것처럼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은 인과율의 신앙을 해체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창조자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인과응보의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욥기의 지혜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탄이 하나님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 1:9-10)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만 믿는 믿음은 아직 깊은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복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좋은 말을 들을 때는 ‘아멘’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노멘’이면 안 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할렐루야’고, 그렇지 않을 때는 ‘놀랠루야’라고 하면 안 됩니다. 고난이 유익이 되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욥기의 지혜는 ‘고난 중의 지혜’입니다. 대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합니다. 이 지혜는 눈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머물게 합니다. 이것이 욥기가 가르치는 깊은 지혜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지만,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인과율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 해 위의 지혜(전도서)
전도서의 지혜는 ‘해 위의 지혜’입니다. 전도서는 ‘해 아래’의 허무를 철저히 보여 주고, 그 허무를 넘어 해 위의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지혜서입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 허무 속에 머물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조주를 기억할 때 인생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킬 때 자신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해 아래의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성공도 죽음 앞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할 때 인생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혜자도 죽고, 어리석은 자도 죽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습니다. 권력자도 죽고, 이름 없는 사람도 죽습니다. 전도서의 결론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전도서는 죽음의 현실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인간은 죽음을 기억할 때 삶을 겸손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죽음학(Thanatology)이란 학문이 있습니다. 죽음학은 죽음을 배워서 죽음을 잘 맞이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오늘을 더 진실하게 살도록 돕는 학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죽음학’의 권위자는 서울대 의대의 정현채 명예교수입니다. 이분은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후세계, 근사체험, 유체이탈 등을 연구하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했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오늘의 삶이 달라집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방향입니다. 이것은 소멸설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두려움이 더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옥과 천국이 있으면 어떡하지?”
둘째는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난다고 보는 방향입니다. 이것은 환생과 윤회의 사상입니다. 불교에서 업보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업은 원인이고 보는 결과입니다. 업보 사상은 대체로 인과율의 법칙을 강조합니다. 현생에서 좋은 씨를 뿌리면 환생할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불교는 자력종교로 Bottom-up의 Do를 강조합니다.
셋째는 기독교는 죽음을 말할 때 두 가지를 함께 붙듭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와 유한함을 직면하게 하는 엄숙한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의 소망입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 부활하여 새 예루살렘에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기독교는 타력종교로 Top-Down의 Belief를 강조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결정한다”는 광고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걸겠습니까?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전도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전도서가 가르치는 지혜는 분명합니다. 해 아래의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성공도 죽음 앞에서는 한계를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 3:11). 인간은 시간 속에 살지만 영원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땅을 밟고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기억할 때 인생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킬 때 인간은 자신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해 아래의 것을 집착하지 말고, 해 위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전도서가 가르치는 지혜입니다.
결론: 지혜는 하나님 경외로 모입니다.
지혜서 3권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욥기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보여 줍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 가지 지혜가 모두 필요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갈 때는 잠언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과 눈물의 시간을 지날 때는 욥기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허무와 죽음의 현실을 마주할 때는 전도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절망을 넘어 희망의 나라로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희망은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참된 희망은 오히려 절망의 한복판에서 드러난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무엇을 붙들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자리에서 희망은 시작된다.
키에르케고르, 빅터 프랭클, 위르겐 몰트만은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을 살았지만 모두 절망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보았고,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로 보았으며, 몰트만은 미래의 약속을 잃어버린 상태로 보았다. 이 세 사람의 사상은 희망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 키에르케고르: 희망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병은 절망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단순한 우울감이나 슬픔으로 보지 않았다. 절망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을 만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때 절망에 빠진다.
사람은 때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해서 절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를 거부하며 절망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자기 뜻대로만 살려고 하다가 절망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절망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기 이해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에게 희망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스스로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절망에서 벗어난다.
키에르케고르의 희망은 매우 실존적이다. 그는 군중 속에 숨어 사는 신앙을 거부했다. 그는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한다고 보았다. 희망은 남들이 믿으니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서는 것이다. 절망은 나를 무너뜨리지만, 믿음은 나를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에게 희망은 ‘믿음의 결단’이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용기이다.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이다.
- 빅터 프랭클: 희망은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았다. 그는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견디는 것을 목격했다. 프랭클은 그 차이가 단지 체력이나 운에만 있지 않다고 보았다. 결정적인 차이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였다.
프랭클에게 인간은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고, 권력만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로고테라피의 핵심이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잃을 때 무너진다. 반대로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견딜 힘을 얻는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다. 가족, 직업, 원고, 이름, 자유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한 가지는 빼앗기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을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이다. 이것이 프랭클이 말한 인간의 마지막 자유이다.
그에게 희망은 환경이 바뀌기 전에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 응답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고통을 견뎠고, 언젠가 수용소의 경험을 강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사명으로 바꾸었다.
프랭클에게 희망은 ‘의미의 발견’이다. 삶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응답하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프랭클의 의미는 ‘사명’과 깊이 연결된다. 하나님은 고통 없는 삶만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도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 인간은 상처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고, 상실 속에서도 책임질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를 살리는 사명을 붙들 수 있다.
- 몰트만: 희망은 하나님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힘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전쟁과 포로 생활을 경험한 신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 절망과 폭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절망이 아니라 희망에서 찾았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은 ‘희망의 신학’이다.
몰트만에게 희망은 인간의 심리적 위로가 아니다.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단지 과거에 일하신 분이 아니라, 미래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한 분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장차 온 세상이 새롭게 될 하나님의 미래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희망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바꾸는 힘이다. 참된 기독교 희망은 “언젠가 천국에 가겠지”라는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믿기 때문에 오늘 불의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몰트만의 희망은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본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 밖에 계시지 않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하신다는 증거이다. 부활은 그 고통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그래서 기독교 희망은 십자가 없는 낙관주의도 아니고, 부활 없는 비관주의도 아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의 희망이다.
몰트만에게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신앙’이다. 현재의 고통이 마지막이 아니며, 하나님의 미래가 오늘의 현실을 새롭게 부르고 있다는 믿음이다.
맺음말
기독교의 희망은 ‘잘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긍정이 아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신다’는 믿음이다. 현실은 여전히 어두울 수 있다. 병은 낫지 않을 수 있고, 상실은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며, 세상은 여전히 불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현실이 마지막이라고 믿지 않는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었듯이, 우리의 고난도 끝이 아니다. 무덤이 예수님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었듯이, 절망도 우리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라고 말한다. 프랭클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십자가 너머 부활의 미래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이 세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들을 때, 우리는 희망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희망은 절망이 없는 삶이 아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들려 다시 일어나는 삶이다. 희망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지만, 고통이 마지막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희망은 오늘의 눈물 속에서도 내일의 부활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
-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소년, 죽음의 질문을 품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치료자이다. 그는 훗날 로고테라피, 곧 의미치료의 창시자가 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깊은 질문, 청소년기의 철학적 탐구, 의학과 심리학의 공부, 그리고 나치 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을 통과하며 형성된 삶의 증언이었다.
프랭클은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나도 언젠가 죽는다. 그렇다면 죽을 것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었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을 묻는 질문이었다. 삶이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면,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고통과 상실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이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화살이 되었다.
그가 다섯 살 때의 한 장면은 그의 내면에 깊이 새겨졌다. 아버지가 잠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압도적 신뢰를 경험했다. 누군가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확신, 자신이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은 훗날 죽음의 공포를 마주할 때도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했다. 인간은 신뢰 속에서 죽음을 견디는 힘을 배운다. 프랭클의 어린 시절 경험은 그가 훗날 절망 속에서도 인간의 의미와 존엄을 붙드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 프로이트의 도시 빈에서 인간을 배우다
프랭클이 성장한 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도시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 특히 리비도라는 성적 에너지가 인간 행동의 중요한 동력이라고 보았다. 젊은 프랭클은 응용심리학을 독학하며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안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단지 본능이나 생물학적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에 점차 의문을 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단순한 연소 과정, 산화 과정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생명도 결국 생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식의 환원주의적 해석이었다. 그러나 프랭클은 여기에 저항했다. 삶은 산화 과정 이상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단지 본능에 끌려가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묻고 책임을 선택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15세 무렵 이미 “삶의 의미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의를 할 정도로 조숙한 사상적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프로이트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고, 프로이트는 그에게 친필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젊은 프랭클의 글에 감탄했고, 그의 글이 정신분석학 관련 잡지에 실리도록 도왔다. 프랭클은 훗날 프로이트의 학문과는 결별했지만, 인간적으로는 그를 존경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 프로이트와 아들러를 넘어 의미의 심리학으로 나아가다
프랭클은 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정신의학과 신경학을 전공했다. 그는 인간 마음의 고통을 단지 철학적 주제로만 다루지 않고, 의학적이고 임상적인 현실 속에서 다루고자 했다.
처음에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배웠지만, 곧 프로이트의 이론만으로는 인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인간을 쾌락과 본능, 특히 리비도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이해했다면, 프랭클은 인간 안에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쾌락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 인간은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사랑을 선택하고, 자기희생을 감당하며, 진리를 위해 불이익을 감수한다. 이것은 쾌락 원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후 프랭클은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들러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을 권력 의지, 우월성 추구, 목표 지향성으로 설명했다. 프로이트가 인간을 본능의 노예로 보았다면, 아들러는 인간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보았다. 프랭클은 한동안 아들러 학파에 몸담았지만, 그 역시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인간은 단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고,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을 가장 깊이 움직이는 힘은 의미라는 것이 프랭클의 확신이었다.
결국 그는 프로이트와도, 아들러와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힘을 ‘의미를 향한 의지’라고 보았다. 이 사상은 훗날 ‘로고테라피’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빈의 심리학은 흔히 세 흐름으로 말해진다. 첫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둘째는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셋째는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이다. 프랭클은 빈 심리학의 세 번째 학파를 세운 인물이 되었다.
- 청소년 자살 예방과 의미치료의 실천
프랭클은 이론에 머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사상을 검증하고 발전시켰다. 당시 빈에서는 성적표가 나오는 시기에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는 현상이 있었다. 성적, 실패, 가족의 기대, 미래에 대한 압박이 청소년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프랭클은 무료 상담센터를 열어 이들을 도왔다. 그의 상담의 핵심은 과거의 원인을 파헤치는 데만 있지 않았다. 그는 내담자에게 미래를 묻게 했다.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떠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의 상담을 잘 보여 준다. 프랭클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왜 상처받았는가가 아니었다.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아직 남아 있는 책임은 무엇인가, 아직 만나야 할 사람과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가 중요했다.
그는 자살을 고통이 너무 커서 발생하는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물론 고통은 심각한 원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문제는 삶의 의미가 증발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고통이 있어도 의미가 있으면 인간은 버틸 수 있다. 반대로 고통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도 의미를 잃으면 인간은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인간은 쉽게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프랭클은 암벽등반도 좋아했다.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공포에 대면하는 훈련이자, 자기 한계를 육체로 실험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위험과 두려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그가 말한 자아초월의 한 형태였다. 인간은 자기 안에 갇힐 때 무너지지만, 자신을 넘어서는 의미를 붙들 때 살아난다.
- 의사가 된 프랭클, 영혼을 돌보는 의학을 꿈꾸다
1930년 프랭클은 빈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 정신적 고통을 겪는 환자들을 임상 현장에서 만났다. 이 경험은 그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했다.
1937년 그는 개인 진료실을 열었다. 그는 단지 정신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 그의 중요한 저서 제목 가운데 하나인 ‘의사에 의한 영혼의 돌봄’은 그의 관심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인간을 병리적 증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며, 영혼의 깊은 차원에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프랭클은 당시 유럽을 휩쓸던 민족주의와 전체주의 이념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상과 체제의 부속품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며, 인간은 자신의 삶 앞에서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이 신념은 곧 다가올 나치의 폭력 앞에서 더욱 절실한 현실이 되었다.
- 나치의 빈 점령과 유대인 의사 프랭클의 선택
1938년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빈의 유대인들은 급격히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 의사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의사로 활동할 수 없었고, 제한된 역할만 허용되었다. 프랭클 역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통제를 받았다.
1940년, 35세의 프랭클은 유대인 환자를 돌보는 병원의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나치의 논리는 잔혹했다. 병든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정신질환자는 국민 전체의 부담이라는 식의 비인간적 사고가 퍼져 있었다. 프랭클은 이러한 시대 속에서 많은 유대인 정신질환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는 의학이 생명을 선별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의학은 인간을 제거하는 체제의 하수인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사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시기 프랭클은 자신의 삶에서도 중요한 만남을 경험했다. 그는 틸리를 만났고, 1941년 12월 결혼했다. 틸리는 임신했지만, 나치는 유대인의 출산을 금지했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향한 아픔은 프랭클의 삶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에게 가족은 사랑의 자리였고, 동시에 나치 폭력의 잔혹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자리였다.
- 미국 비자 앞에서 부모 곁에 남기로 하다
프랭클에게 한때 빈을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이미 프로이트도 빈을 떠난 뒤였다. 프랭클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비자가 프랭클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부모는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는 깊이 고민했다. 자신이 떠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부모는 남겨져야 했다. 결국 프랭클은 비자를 포기하고 부모 곁에 남기로 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삶이 만나는 결정이었다. 그는 의미란 편안한 선택이 아니라 책임 있는 선택 속에서 발견된다고 보았다. 부모 곁에 남는 것은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삶 앞에서 해야 할 응답이었다.

- 체포와 수용소 이송, 이름 대신 번호가 된 삶
프랭클과 가족은 결국 체포되었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 감금되기도 했고, 이후 가족과 함께 기차에 실려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인간은 이름을 잃고 번호로 불렸다. 이름은 한 사람의 역사와 인격과 관계를 담고 있다. 그러나 수용소는 인간을 이름 없는 존재, 교체 가능한 숫자로 만들려 했다.
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여성 랍비로 알려진 레기나 요나스와 함께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려 애썼다. 수용소 안에서는 때때로 학술 강연이 열리기도 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적 자극과 정신적 활동은 사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무기였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인간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영혼의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은 육체의 생존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1943년, 프랭클의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며 고통의 심연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 아우슈비츠, 모든 것을 빼앗긴 자리에서 마지막 자유를 발견하다
프랭클은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의 어머니는 가스실로 갔다. 수감자들은 옷을 벗겨졌고, 소지품과 원고와 인간다운 품위를 모두 빼앗겼다. 프랭클에게 원고는 정신적 자식과도 같았다. 그 원고가 허망하게 사라졌을 때, 그는 자신의 사상과 미래가 함께 빼앗기는 듯한 상실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살아내야 했다. 이론은 쓰는 것이 아니라, 이론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조건이 거의 동일한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버티는 모습을 보았다. 그 차이는 단순히 체력이나 운만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였다.
그는 한때 수감자들이 성탄절이면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버텼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성탄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급격히 무너졌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직접적 폭력은 나치의 잔혹한 체제였지만, 프랭클은 절망이 인간의 생존 의지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희망이 꺾이자 몸도 무너졌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더 이상 버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떠오른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절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견뎌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오늘을 버텨야 하는지 잃어버릴 때, 인간은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프랭클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발견했다. 나치는 인간에게서 거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가족, 옷, 이름, 직업, 건강, 자유, 원고까지 빼앗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빼앗지 못했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을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였다. 지옥 같은 환경은 같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결정하는 존재였다.
- 사랑과 상상, 그리고 고통을 견디게 한 의미
수용소에서 프랭클은 아내 틸리를 떠올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와 대화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사랑은 현실을 넘어 그를 붙드는 힘이 되었다. 그는 그때 사랑이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고 높은 목표임을 깨달았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사랑은 고통 속에서도 인간을 의미로 이끄는 길이 된다.
또한 그는 상상을 사용하여 환경을 넘어섰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이 수용소의 비극을 강의하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지금의 고통을 단지 현재의 고통으로만 보지 않고, 언젠가 누군가를 살리는 증언으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이 상상은 현실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행위였다.
그는 죽음의 병이라 불리던 발진티푸스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해독제와 같았다. 원고를 다시 살리는 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일이었다. 40번째 생일을 맞을 즈음, 그는 자신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붙들었다. 글은 그에게 생존의 이유였고, 의미를 회복하는 도구였다.
- 해방, 그러나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상실
프랭클은 40세 무렵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호주로 탈출한 여동생을 제외하고, 그의 가족 대부분은 죽었다. 아내 틸리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깊은 상실 앞에 섰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는 대신 펜을 들었다. 함께했던 시간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지만, 그 사랑과 기억은 그의 사명 안에서 계속 살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증언으로 바꾸기로 했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사명이 되었다.
그는 9일 동안 수용소 경험을 기록했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판하려 했지만, 그 기록은 결국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수용소의 생생한 경험에서 길어 올린 압축된 진실이었다. 그리고 길을 잃은 수많은 영혼에게 등불이 되었다.
- 로고테라피의 핵심: 의미의지, 응답, 고통 속의 의미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그의 삶에서 나온 사상이다. 그것은 단지 상담 기법이 아니라 인간 이해이다. 로고테라피의 핵심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인간에게는 ‘의미의지’가 있다. 인간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고, 아들러가 말한 것처럼 권력만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 삶이 의미 있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은 의미이다.
둘째, 삶의 의미는 매 순간 삶의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프랭클은 우리가 삶에게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삶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지금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느냐이다. 인간은 그 질문 앞에서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셋째, 고통 속에서도 의미는 피어날 수 있다. 프랭클은 의미를 발견하는 길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일하며 기여하는 ‘창조적 가치’, 사랑과 아름다움과 만남을 경험하는 ‘경험적 가치’, 바꿀 수 없는 고통 앞에서 태도를 선택하는 ‘태도적 가치’이다.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상황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마지막 자유이다.
그는 역설적 의도, 탈반영,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같은 치료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치료의 중심은 기법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의미 있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었다.
- 전후의 학문적 성취와 세계적 영향
전쟁 이후 프랭클은 다시 의학과 심리치료학의 길을 걸었다. 1955년 그는 빈 대학교 정교수로 승진했다. 1959년 그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현대의 고전이 되었다. 그는 29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절망에 빠진 세대에게 의미라는 구명줄을 던진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여러 나라에 로고테라피가 확산되었다. 그의 사상은 단지 정신의학의 한 분야에 머물지 않았다. 교육, 상담, 목회, 철학, 신학, 영성, 인문학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고통은 인간을 반드시 파괴하는가. 절망 속에서도 의미는 가능한가. 프랭클은 이 질문들에 자신의 삶으로 대답했다.
그는 비행 교습을 받아 68세에 비행 자격증을 받았고, 80세까지 등산을 했다. 이것은 단지 노년의 활동력이 아니었다. 그의 삶 전체에는 하나의 일관된 갈망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인간은 두려움 앞에서도 의미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인간은 현재 모습보다 더 높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이었다.
- 인간을 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다
프랭클은 인간을 실제보다 더 높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을 지금의 모습으로만 대하지 말고, 될 수 있는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담과 교육, 목회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시선만큼 자라난다. 누군가를 절망적인 존재로만 보면 그는 절망 속에 갇힐 수 있다. 그러나 그를 회복될 수 있는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면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프랭클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렇게 대하라고 말했다. 나 자신을 지금의 실패로만 규정하지 말고, 될 수 있는 존재로 대해야 한다.
그는 집단 유죄라는 개념에도 반대했다. 인간을 민족이나 집단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인간에게는 두 종류가 있었다. 고결한 사람과 저질적인 사람이다. 어느 민족, 어느 집단에도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존재한다. 환경이 인간을 완전히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론대로 산 사람
1990년 프랭클은 빈 대학교 강단에서 내려왔다. 1997년 그는 마지막 저서를 남겼고, 같은 해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의미의 불꽃은 묘지에 묻히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살아갈 이유를 묻게 한다.
프랭클은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다. 그는 삶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했다. 그는 가장 어두운 지옥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자를 포기하고 부모 곁에 남기로 한 용기, 수용소에서 마지막 자유를 붙든 태도, 해방 이후 상실 앞에서도 펜을 든 책임을 통해 로고테라피가 단지 학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인간이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품위를 잃지 않고 가스실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잔혹할 수 있지만, 숭고할 수도 있다. 인간은 무너질 수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지만, 마지막 자유만은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결론: 의미가 있는 사람은 고난을 견딜 수 있다
프랭클의 생애는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그는 이 질문에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답하지 않았다. 그는 수용소에서, 상실 속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으로 답했다.
시련 자체에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고통은 고통이고, 비극은 비극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위대한 서사로 바꿀 수 있다. 상황은 인간을 짓누를 수 있지만, 인간의 마지막 자유까지 완전히 빼앗을 수는 없다.
프랭클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의미를 향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절망이 깊을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론을 쓴 사람이 아니라, 이론대로 산 사람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로고테라피의 증명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