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공의와 사랑이다. 공의와 사랑은 검의 양날과 같고, 동전의 양면과 같다. 공의 없는 사랑은 ‘무법주의’이고, 사랑 없는 공의는 ‘율법주의’이다. ‘사랑 없이 공의’만 강조하면 인간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의 없이 사랑’만 강조하면 세상은 무질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고전14:10) 아이의 잘못을 방치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공의에 따라 그를 징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공의와 사랑’은 십자가에서 만난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아모스 (Amos)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5:24)
아모스는 공의의 선지자이다. 아모스는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북왕국의 부패를 지적하였다. 성경에는 의라고 번역되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로 ‘체테크’와 ‘미쉬파트’이다. 체테크는 ‘공의’이며 영어로 ‘Righteousness’이다. 공의란 관계적인 의이다. 의로운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의인이 된다. 미쉬파트는 ‘정의’이며 영어로 ‘Justice’이다. ’공의‘가 공동체 안에서 구현될 때 ’정의‘라고 한다. 정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함은 물론 각자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정의의 실천은 특히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의의 실천은 특별히 힘 있는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아모스가 활동할 때는 여로보암 2세 때이다. 그는 오랫동안 통치하고 북왕국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렸다. 북왕국은 영토를 넓히고 물질적으로도 풍요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죄를 범했다. 우상을 숭배한 것과 사회정의를 구현하지 않은 죄이다. 우상숭배를 하는 본질적인 목적은 자기만 잘 먹고 잘 사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의 신은 너희의 배이다”(빌3:19)라고 했다. 자신의 배를 위하여 살다보니,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았다.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발생된 줄 아는가? 산업혁명이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만을 위하여 돈을 벌었다. 천민자본주의가 ’공산주의‘라는 사생아를 낳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개인의 공의를 넘어 사회의 정의를 원하신다. 구약 시대의 사회적 약자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기득권 자가 이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일 때만이 비로소 사회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
호세아 (Hosea)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아모스가 공의를 외쳤다면, 호세아는 사랑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할 것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신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지만 고멜은 세 자녀를 낳고 떠나버린다. 그러나 그는 부정한 고멜을 용서하고 그녀를 다시 맞아들인다. 인애란 히브리말로 ‘헤세드’이다. 헤세드란 하나님의 언약을 바탕으로 한 ‘은혜, 긍휼, 자비, 인애, 사랑’ 등을 뜻한다.
하나님은 자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보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 2: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영적 외도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고멜이 호세아를 떠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바로 그 사랑이 ‘헤세드’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죄 지은 인간들에 대하여 재앙을 내리기 전에 회개를 촉구하시고 기다리는 분이다.
미가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1977년 1월 20일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취임할 때 미가서 6장 8절을 펼쳐 놓고 선서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겸손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 흙은 Adama이고 사람은 Adam이다. 라틴어로 사람은 Homo이고, 흙은 Humus이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겸손(Humility)이다. 겸손은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흙임을 깨닫는 것이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다. 교만한 자는 자신이 의인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겸손한 자는 죄인임을 고백한다. 교만한 자는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겸손한 자는 자격이 없음을 인정한다. 교만한 자는 자기의 자격으로 살기에 감사하지 않지만,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에 날마다 감사하며 산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 (출 17:8-16)
지난달에는 구세군의 상징 중 유니폼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유니폼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봉사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국제구세군에 속한 사람이다.’ 오늘은 ‘구세군 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태극기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국기이다. 국기 안에는 그 나라의 역사, 전통, 문화, 사상 등을 요약되어 있다. 태극기를 잘 분석하면 대한민국을 알 수 있다. 태극기의 시효는 1882년 박영효 수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처음 사용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배 안에서 박영효가 국기를 그려 보이며 영국 공사 애스턴과 선장 제임스의 의견을 들어 팔괘가 그려진 기를 사괘로 정리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일본에 도착해 고베의 숙소였던 니시무라야(西村屋)에 이 기를 내걸었다. 국기의 개념이 약한 시대에 영국공사의 조언으로 단숨에 디자인한 것이 오늘의 태극기이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해낸 것이다.
호주기
호주 국기에는 영국의 국기인 ‘Union Flag’가 있다. 아직도 호주가 영연방 국가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영국은 ‘United Kingdom’으로 4개 왕국(웨일즈, 북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연합한 국가이다. 영국 국기 안에는 스코틀랜드의 ST Andrew 십자가, 잉글랜드의 ST George 십자가, 아일랜드의 ST Patrick 십자가가 함께 모여 있다.
다섯 개의 남십자성과 호주 전체의 땅을 상징하는 왕 별이 있다. 왕 별은 7각이다. 6각은 6개 주를 의미하고, 나머지 하나는 2개의 준 주를 의미하고 있다. 세계 국기 가운데 별이 정 중앙에 있는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이다. 다윗의 별은 육각이다. 다윗이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도 없다.
구세군기
구세군인을 상징하는 것이 군복이라면, 구세군을 상징하는 것은 군기이다. 구세군 군기는 빨강, 파랑, 노란 삼원색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앙에는 ‘Blood and Fire’가 있다. 처음 군기가 등장하는 것은 1878년 9월이었다. 구세군은 1865년에 동부 런던 기독교 부흥 협회(East London Christian Revival Society)에서 1867년에 동부 런던 기독교 선교회(East London Christian Mission)로 1869년에는 기독교 선교회(Christian Mission), 급기야 1878년에 구세군(Salvation Army)으로 변경했다.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모든 조직도 군대식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 해부터 군복도 입기 시작했고, 그해 9월에 처음으로 군기도 사용했다. 캐더린 부드는 영국 중부에 위치한 코벤트리(Coventry) 영문에 군기를 수여했다. 당시는 중앙에는 별이 아니라 태양이었다. 구세군이 인도에서 선교를 할 때 선교지역인Parsees 사람들이 태양신을 믿고 있어서, 1882년 태양에서 별로 변경하였다. 처음에는 별의 각이 달랐지만, 후에 8각으로 규격화가 되었다. 8각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승리
군기를 코벤트리(Coventry) 영문에 수여하면서 캐더린 부드는 ‘군기는 승리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This flag is an emblem of victory.”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아말랙과 전투할 때 모세가 배후에서 손을 들었을 때 여호수아가 승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비록 여호수아가 최선에서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 전투의 승패는 배후에서 기도하는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승리 후 그곳에 단을 쌓는다. 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이다. 전쟁을 할 때 지역을 점령하면 제일 먼저 깃발을 올리다. 6.25 때 북한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중앙청에 인공기를 올렸다.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9.28 수복을 하고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올렸다. ‘이곳은 우리 땅이다, 우리가 주인이다’라는 것을 알리는 상징이다. 세계는 지금 약 240개의 국가가 있다. 이 중에 구세군이 활동하는 곳은 131개국이다. 마게도냐 사람이 사도바울에게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한 것처럼 지금도 구세군의 손길을 기다리는 많은 나라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구세군의 삼색 군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한다. 푸른색은 하나님의 성결, 빨간색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노란색은 성령의 불을 의미한다. 구세군의 모든 행사나 예식은 군기 아래서 행하여진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군대’인 구세군이 전진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성결 (Holiness of God the father)
푸른색은 ‘성부 하나님의 성결’을 뜻한다. 구세군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구원과 성결이다. 성결이란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거룩이란 ‘분리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희랍어 ‘에클레시아’이다. 이 말은 ‘안에서 밖으로(out of)’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to call)’를 의미하는 동사 칼레오가 합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밖으로 불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밖으로’는 ‘세상 밖으로’, 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밖으로’를 뜻한다. 그리고 ‘부르다’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뜻한다. 교회는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다.
성결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Ongoing) 성령의 역사이다. 성결은 우리의 안에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고, 그를 닮아 가는 것이며, 성령 충만한 것이다. 모두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구원도 성령의 역사이며, 성결 역시 성령의 역사이다. 롬15:16절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살후2:13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보혈 (Blood of Christ)
붉은 색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뜻한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흘려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예물 가지고 와서, 그 예물에 안수를 할 때 예물과 자신이 동일시되고, 예물이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그들은 매년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는 스스로가 제사장이 되고,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이제 우리는 그 피로 구원받았고, 그 피로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그 피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다. ‘구원받았다, 의인이 되었다. 죄사함 받았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영생을 얻었다, 거듭났다, 새사람, 영의 사람이 되었다’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불 (Fire of Holy Spirit)
노란 색은 성령의 불을 뜻한다. 성령의 불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열왕기 상 18장의 갈멜산 대결이다. 백성들을 어느 때까지 기웃거리겠는가?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쫓으라 백성들에게 꾸짖고,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를 갈멜산 꼭대기에 단을 쌓고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고 대결을 시작하였다. 바알을 섬기는 450명이 먼저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며 그래도 안되니 자기 몸을 해하며 바알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이어서 엘리야가 기도할 때 강력한 불이 임하는 순간 이스라엘에 부흥이 임했다. (왕상 18:39). 하나님과 우상의 중간에서 머뭇거리던 백성들이 이젠 하나님께 엎드려 여호와가 참 신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모든 기적과 부흥을 이루는 원동력은 성령의 힘이다. (슥 4:6 ) 기독교 역사는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불의 혀와 같이 임하자, 겁을 먹고 숨어 있던 이들이 밖으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선교사로 떠났던 웨슬레는“인디언들은 내가 구원하는데, 나는 누가 구원하겠는가”고 괴로워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올더스게이트 (Aldersgate)에서 성령체험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감리교를 창시했고, 18세기의 영국을 살렸다.
2001년 영국의 사관대학(ICO)에서 공부할 때 그의 생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예배당 입구에는 웨슬레 동상이 있다. 예배당 옆에 웨슬레 생가가 있다. 침실, 거실, 서제, 부엌 등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한 작은 방에 ‘Power Room’라고 써 있었다. 그가 기도하던 ‘기도실’이다. 안내하던 사람이 ‘감리교의 힘’은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났고,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기 안의 ’Blood and Fire’ 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불’을 뜻한다. 구세군의 모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한 손에는 빵, 한 손에는 성경’ 그리고 군기 안에 있는 ‘혈화” 이다. ‘혈화’는 ‘혈화기’, ‘혈화 정신’ ‘혈화 병사’, ‘혈화 구세군’ 등에 다양하게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구세군인은 성령의 불을 품고 구원받지 못한 자를 찾아 세상으로 나가는 ‘구세군의 정신’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탐꾼을 도운 라합의 믿음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다.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해 주신 것들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은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 ‘유한한 것이 아닌 영원한 것’,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 등을 말한다. 실상이란 단어는 ‘히포스타시스’로서 본질, 기초, 확신, 근거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믿음이란 미래적인 것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도 했다. ‘바라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본질상 같은 이야기다. 천국, 지옥, 사탄, 천사 등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고,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다.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영적인 세계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며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하느니라.”(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을 오늘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정의와 함께 16명의 믿음의 거장을 언급하고 있다. 15명의 남자와 1명의 여성, ‘라합의 믿음’이 소개되어 있다.
라합은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한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기’이다. 2장은 가나안 입성의 첫 관문이 되는 여리고 성에 관한 이야기다. 싯담에서 여호수아는 2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다. 이들이 간 곳은 기생 라합의 집이었다.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갔다는 것을 알고, 여리고 왕이 병사를 보냈다. 하지만 라합은 정탐꾼을 감추고 보호해 주었다. 왜 라합은 적군의 정탐꾼을 도와주었을까? 2장 9절 이하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홍해를 가르고, 대적하는 왕들을 진멸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가나안 백성은 떨고 있었다. 가나안 사람의 마음을 10절에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여리고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
1) 듣고 믿는 믿음
라합의 믿음은 듣고 믿는 믿음이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곳에 도마가 없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했지만 도마는 자신이 직접 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에 넣어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얼마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했다.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이때 도마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도마가 유일하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마16:16)라고 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절)고 하셨다. 시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이 경험과 지식만을 의지하면 ‘믿음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듣고 믿는 믿음은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이다.
2) 행함 있는 믿음
믿음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Invisible Faith)과 ‘보이는 믿음'(Visible Faith)이 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마음의 믿음’이고, 보이는 믿음은 ‘손의 믿음’이다. ‘손의 믿음’을 ‘행함’이라고 한다. 참된 믿음은 마음과 손이 함께하는 믿음이다. 둘은 수레와 앞뒷바퀴와 같고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야고보는 라합의 행함을 강조한 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5-26).
마음과 손은 유기체로 연결되어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거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에서 손으로 가는 거리”라고 한다.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길이 ‘성결의 길’이다. 성결은 잡힌바 된 잡은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성결의 길’에는 은퇴가 없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역에는 ‘현역과 은퇴’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현역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은퇴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3) 순종하는 믿음
순종의 반대는 불순종이다.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죽음이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불순종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경험과 지식이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목수 출신인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사무엘상 15장에는 사울이 아말렉과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사무엘은 사울을 축복하며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고 전리품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울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고 좋은 양과 소들은 가지고 돌아왔다. 양과 소의 소리를 듣고 놀란 사무엘이 사울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자,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15:15절)라고 했다. 사울은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만 가지고 왔다고 보고했다. 사무엘은 사울의 악함을 꾸짖으시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보다 나으니라”(삼상15:22)고 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기생 라합은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다.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았다.(마1:5) 보아스는 다윗의 조부가 되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1-22). 기생이었던 라합이 다윗의 4대 선조 할머니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간 5명의 여인 중, 두 번째 사람이 되었다.
•족보 장에 등장 : 마태복음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믿음 장에 등장 :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행함 장에 등장 : 야고보서 2:25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