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호주를 호주로 만든 세 사람
1월 26일은 ‘Australia Day’이다. 오늘은 호주의 건국과 관련된 3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는 호주를 영국영으로 선포한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ip), 둘째는 근대호주의 발판을 마련한 제 5대 총독인 ‘러크란 맥콰리’ 총독(Governor Lachlan Macquarie) 그리고 호주에서 첫 예배를 인도한 리차드 존슨 목사(Rev. Richard Johnson)이다.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ip)
1788년 1월 18일에 아서 필립 제독(Captain Arthur Philip)이 11척의 배에 죄수 788명을 포함한 1,500여명과 함께 1770년에 ‘쿡 선장'(Captain Cook)이 다녀갔던 ‘보타니 만’에 도착한다.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이동한 곳이 지금의 ‘록스’(Rocks) 지역이다.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필립 제독은 1월 21일 맨리에 갔다. 그곳에서 근육질의 원주민들을 보고 ‘맨리’(Manly)라며 감탄하였다. 그곳이 지금의 ‘맨리’이다.
필립 제독은 1월 26일 록스에 영국국기를 높이 올리며 영국 영임을 선포하고, 당시 ‘영국 내무부장관'(British Home Secretary)이었던 ‘로드 시드니'(Lord Sydney)의 이름을 기념하여 ‘시드니’(Sydney)로 명명하고 NSW 주 1대 총독이 되었다. 시드니에서의 임기(1788-1892)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 1814년에 고향인 ‘바스’(Bath)에서 죽었다. 사후 200주년이 되는 2014년 7월 9일, 그는 영국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안치되었다. 묘비에는 ‘NSW 주 초대 총독 그리고 근대호주의 창립자'(The First Governor of New South Wales and Founder of Modern Australia)라고 기록되어 있다.
러크란 맥콰리 총독 (Governor, Lachlan Macquarie)
필립제독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긴 사람은 제 5대 총독인 ’러크란 맥콰리‘(Lachlan Macquarie)이다. 그는 재임기간(1810-1821) 동안 호주를 불모의 유형지에서 ’기회의 땅‘으로 만들었다. 호주에서는 ‘맥콰리’라는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맥콰리 대학, 맥콰리 은행, 맥콰리 St. 등 다양한 곳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맥콰리 포인트’이다. 맥콰리 총독이 영국에 다녀올 때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부인을 위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필립 제독이 호주를 개척한 사람이라면, 제 5대 총독인 ‘러크란 맥콰리’는 근대 호주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의 묘비에는 근대 호주의 초석을 놓았다는 의미에서 ‘호주의 아버지'(The Father of Australia)라고 새겨져 있다.
리차드 존슨 목사(Rev, Richard Johnson)
1787년 5월 13일 영국을 떠난 함대가 호주 대륙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 함대에는 한 사람의 목사만이 승선이 허용되었는데 그는 영국 성공회에서 선출해서 보낸 리차드 존슨 목사(Rev. Richard Johnson)이다. 그는 1753년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나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한 아주 진실하고 겸허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전쟁터에서의 규율과 훈련을 다 지켜야하는 군목으로서의 대우를 받았으며, 승선 후부터 ‘보타니 만’(Botany Bay)에 도착할 때까지 매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도착 후 첫 예배는 1788년 2월 3일 주일, ‘리차드 존슨‘ 목사는 시편 116편 12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시드니 중심부인 헌터와 블라히 스트리트(Hunter & Bligh Sts) 모퉁이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설교를 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편 116:12) 당시는 제목없이 본문 중심으로 설교했다. 본문이 곧 설교 제목이고 내용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큰데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할 지를 모르는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마치 1620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하여,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마침내 추수할 때의 감격과 감사하는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들은 1787년 5월 13일 출항하여, 1788년 1월 18일 첫 배가 보타니 만에 도착했다. 무려 8개월의 긴 항해 끝에 도착한 신대륙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첫 번째 예배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시편 116편은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학자들은 아마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 기록한 시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자식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아버지 다윗의 심정을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시인은 절망에 빠져 낙심하며 모든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여 사망의 고통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 뭔가 해 드리고 싶은데 해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두 가지 일을 하겠다고 했다.
14절과 17절에 자신의 서원한 것을 갚겠다고 했고, 17절에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했다. 서원이란 하나님과 한 약속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사람”(시 15:4)이라고 했다.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리는 사사시대 입다가 한 서원을 기억한다. “주께서 제게 확실한 승리를 주셔서 암몬 사람을 이기게 하시면, 제가 무사히 돌아올 때에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나오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희생 번제로 바치겠습니다.”(삿 11:31). 입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암몬을 물리치고 돌아오는데, 그를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남독녀이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참담해 하는데 오히려 딸이 아버지를 위로하며,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어 드린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무슨 서원인지 알 수 없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는 지키겠다고 했다. 14절 한번으로 부족하여, 17절에 재차 서원을 지키겠다고 했다. 또한 시인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다짐했다. ‘감사로 예배’ 드리고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도리이고, 구원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롬 14:7-8)
우리는 지금 고 000 형제님의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51년간의(1968년)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현대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반 정도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정말 아쉽고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불행은 짧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어 죽음 앞에 서서야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가족이 떠나고 나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상이란 학교에 등록해서 다양한 과목을 배웁니다. 내가 잘하는 과목도 있지만 못하는 과목도 있습니다. 필수과목도 있지만 선택과목도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과 같은 좋아하는 과목도 있지만, 슬픔과 불행과 같은 싫어하는 과목도 있습니다. 인생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과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대충대충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졸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게을리 했는가를 깨닫고 후회합니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알자스와 로렌’ 지방이 있습니다. 프랑스 영이었으나 후에 독일이 점령하게 됩니다. 주인공인 ‘프란츠’는 불어 수업시간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불어는 언제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업시간을 늦고, 집중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벨’ 선생님이 중대한 발표를 하게 됩니다. “내일부터 새로운 선생님이 올 것이고, 오늘이 프랑스어로 공부하는 마지막 수업이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불어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프란츠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적인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일보다 모르는 일이 많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교만한 자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는 자이고, 어리석은 자는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번에 Nursing Home에 임종을 앞둔 분을 병문안 간 적이 있습니다. 입구에 이런 글귀가 써 있었습니다.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변화 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화를,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 순간 고 000 형제님의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다르면 죽음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죽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살아야 될 이유와 죽어야 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할 때, 죽음의 순간에 비겁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스테반은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 것이고, 중심이 이동된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죽음에 관하여 연구한 세계적인 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가 70세가 되던 해에 썼던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The Wheel of Life)란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사람은 죽음을 선고 받는 그 순간에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녀가 쓴 ‘인생수업’이란 책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전도서 7장 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끝에서 처음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면, 죽음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명철이 있다면, 하늘에서 땅을 보는 혜안이 있다면 지금과 같이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유가족과 조문객들에게 큰 위로와 함께 우리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사야서의 주제는 ‘이사야’의 이름과 일치한다. 이사야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전반부에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인 1-39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이고, 후반부인 40-66장에서는 전반부의 암담하고 우울한 내용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한 희망찬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다. 이는 구약 39권(1-39장)과 신약 27권(40-66장)의 구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1. 일어나라(Arise)
“일어나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잘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마가복음 5장에 12살 회당장이 딸이 죽은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울며불며 통곡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비웃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외쳤다. 달리다굼은 아람어로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이다. 소녀는 일어나 걸으니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막 5:35-43).
은사운동이 한창일 때 서있는 사람을 넘어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시드니에도 그런 분들이 온 적이 있다. 나 역시 집회에 참석해서 넘어진 적이 있다.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은사운동하는 사람들의 주 메뉴 중에 하나이다. 문제는 넘어졌다가 일어나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구세군 김석태 사령관은 이 운동을 보시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기독교는 넘어진 자를 일으켜야 하는데, 왜 멀쩡한 사람을 자꾸 넘어뜨리는지 모르겠네”라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오늘의 본문을 무척 좋아한다. 어른들이 이름 지을 때는 이름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이름은 부르기 편하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좋은 것 같다. 나는 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호주에 와서는 더욱더 그랬다. ‘환기’란 이름은 한국인도 부르기 쉽지 않은데, 호주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 이사야 60:1을 읽는데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그날은 이 말씀이 가슴을 뛰게 하였다. 혹시 아버님께서 이 말씀을 알고 내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가 혼자 감탄을 했다. “빛날 煥에, 일어날 起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할렐루야.”
2. 빛을 발하라(Shine)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으로 표현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그리고 마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어둠 속에서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빛이 올 때이다. 어둠 안에서 아무리 어둠과 싸워도 어둠은 어둠일 수밖에 없다. 밖에서부터 오는 빛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죄인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3일 만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이다. “사람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5:15)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의 자녀로서 구원의 빛을 비추고, 사랑의 빛을 비추고, 용서의 빛을 비추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8월 15일은 광복절’(光復節)이다.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빛이 다시 찾아온 날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틸지 못하고, 일본 천황은 전격적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히로시마에는 ‘Little Boy’가, 나가사키에는 뚱뚱하다고 해서 ‘Fat Man’이란 원폭이 떨어졌다. 히로시마에서는 원폭으로 약 20만 정도가 죽었다. 이중 군인, 군속, 징용 등으로 끌러간 한국인 2만명 정도나 포함되었다. 히로시마 시에서는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취지로 ‘평화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평화공원 내의 박물관에는 원폭이 떨어질 때 멈추었던, 8시 15분을 가리키는 커다란 시계가 있다. 1970년에 ‘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했으나, 시의 반대로 ‘평화기념공원’ 안에 설치하지 못했다. 나는 공원 밖에 외롭게 서있는 위령비를 보고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위령비는 1999년 7월 21일 공원 내로 이전되었다.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사왕 고레스를 통해서 해방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은 연합군을 통해서 어둠에 있던 우리나라를 빛으로 인도하셨다. 그 후 자유 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한 한국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해 주는 나라로, 선교 받던 나라에서 선교하는 나라로 변했다. 반면에 북한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자들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니까 그렇다고 치고, 정말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유물론자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 같다. 어젯밤 꿈에 김동길 교수가 내 장인어른으로 나왔다. 전날 그의 유투브를 본 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는 작금의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다”고 말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3.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다 (God’s Presence)
우리는 ‘영광’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다. 영광이란 뜻의 헬라어 독사(δόξα) ‘거룩, 위엄, 거룩한 영예, 찬양, 경배’라는 의미와 함께 ‘가장 영광스러운 상태, 가장 고귀한 상태’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독사’(δόξα)의 히브리어는 ‘카보드’로 문자적으로는 ‘무겁다’란 의미이다. 영광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감사와 찬양’을 의미한다.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부모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둘째 하나님의 ‘현존 혹은 임재(Presence)’를 의미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고(출 24:16-17), 성전을 봉헌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출 40:34-35). 셋째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자체를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이나 회당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키파'(Kipa)를 써야 한다. 오래 전 성지 순례를 갔을 때 통곡의 벽 입구에 서 있는 유태인에게 물었다. “키파는 왜 써야 합니까”. 그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머리 위에 하나님의 임재(Divine Presence)를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Fear of God)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니다. 빛을 받아야 빛을 비출 수 있는 존재이다. 빛이신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할 때만이 가능하다.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성도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거하는 ‘거룩한 성전’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여호와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서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확장하는 빛의 사자들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