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 (南史) 동이열전 (東夷列傳)
‘남사’는 중국의 남조에 대해 쓰여진 역사서이다. 이대사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고, 그의 아들 이연수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십사사 중의 하나로, 총 80권 중 본기는 10권, 열전이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의 남조에 해당하는 나라인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조령이나 상주문의 많은 부분을 깎아 서사에 중점을 두어, 기술된 총 분량은 단대사인 송서, 남제서, 양서, 진서를 합한 것의 절반 정도이지만, 단대사 4서에서 볼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은행전의 증보 등에 그러한 것이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열전 제69는 동이열전(東夷列傳)이다.
○ 내용
– 본기
송본기上제1 – 무제・소제
송본기中제2 – 문제・효무제・전폐제
송본기下제3 – 명제・후폐제・순제
제본기上제4 – 고제・무제
제본기下제5 – 폐제 울림왕・폐제 해릉공왕・고종 명황제・폐제 동혼후・화제
양본기上제6 – 무제 상
양본기中제7 – 무제 하
양본기下제8 – 간문제・원제・경제
진본기上제9 – 무제・문제・폐제
진본기下제10 – 선제・후주
– 열전
.列伝第一 后妃上 – 宋孝穆趙皇后・孝懿蕭皇后・武敬臧皇后・武張夫人・文章胡太后・少帝司馬皇后・文元袁皇后・孝武昭路太后・明宣沈太后・孝武文穆王皇后・前廃帝何皇后・明恭王皇后・後廃帝陳太妃・後廃帝江皇后・順陳太妃・順謝皇后・斉宣孝陳皇后・高昭劉皇后・武穆裴皇后・文安王皇后・鬱林王何妃・海陵王王妃・明敬劉皇后・東昏褚皇后・和王皇后
.列伝第二 后妃下 – 梁文献張皇后・武徳郗皇后・武丁貴嬪・武阮修容・簡文王皇后・元徐妃・敬夏太后・敬王皇后・陳武宣章皇后・文沈皇后・廃帝王皇后・宣柳皇后・後主沈皇后・張貴妃
.列伝第三 宋宗室及諸王上 – 劉道憐・劉道規・劉義慶・劉遵考・劉義真・劉義康・劉義恭・劉義宣・劉義季
.列伝第四 宋宗室及諸王下 – 宋文帝諸子・孝武諸子・孝明諸子
.列伝第五 – 劉穆之・徐羨之・傅亮・檀道済
.列伝第六 – 王鎮悪・朱齢石・毛脩之・傅弘之・朱修之・王玄謨
.列伝第七 – 劉敬宣・劉懐粛・劉粋・孫処・蒯恩・向靖・劉鍾・虞丘進・孟懐玉・胡藩・劉康祖
.列伝第八 – 趙倫之・蕭思話・臧燾
.列伝第九 – 謝晦・謝裕・謝方明・謝霊運
.列伝第十 – 謝弘微・謝荘・謝朏・謝譓・謝哲・謝顥・謝覧・謝挙・謝嘏・謝僑
.列伝第十一 – 王弘・王錫・王僧達・王融・王微・王遠・王僧祐・王籍・王瞻・王沖・王瑒・王瑜
.列伝第十二 – 王曇首・王僧綽・王倹・王騫・王規・王暕・王承・王訓・王僧虔・王慈・王泰・王志・王筠・王彬・王寂
.列伝第十三 – 王誕・王藻・王瑩・王亮・王華・王琨・王恵・王球・王景文・王蘊・王奐・王份・王琳・王銓・王錫・王僉・王勱・王質・王固
.列伝第十四 – 王裕之・王鎮之・王韶之・王悦之・王准之
.列伝第十五 – 王懿・到彦之・垣護之・張興世
.列伝第十六 – 袁湛・袁豹・袁淑・袁顗・袁粲・袁彖・袁昂・馬仙琕・袁君正・袁枢・袁憲・袁敬・袁泌
.列伝第十七 – 孔靖・孔琳之・殷景仁
.列伝第十八 – 褚裕之・褚秀之・褚淡之・褚球・褚湛之・褚彦回・褚玠
.列伝第十九 – 蔡廓・蔡興宗・蔡約・蔡撙・蔡凝
.列伝第二十 – 何尚之・何偃・何戢・何求・何点・何胤・何炯・何昌㝢・何敬容
.列伝第二十一 – 張裕・張永・張岱・張緒・張完・張充・張瓌・張率・張盾・張稷・張嵊・張種
.列伝第二十二 – 張邵・張敷・張冲・張暢・張融・張宝積・徐文伯・徐嗣伯
.列伝第二十三 – 范泰・荀伯子・徐広・鄭鮮之・裴松之・何承天
.列伝第二十四 – 顔延之・沈懐文・周朗
.列伝第二十五 – 劉湛・庾悦・顧琛・顧覬之
.列伝第二十六 – 羊欣・羊玄保・沈演之・江夷・江秉之
.列伝第二十七 – 沈慶之・宗愨
.列伝第二十八 – 柳元景・柳世隆・柳惔・柳惲・柳偃・柳盼・柳憕・柳忱・柳慶遠・柳津・柳仲礼・柳敬礼
.列伝第二十九 – 殷孝祖・殷琰・劉勔・劉悛・劉孺・劉覧・劉遵・劉苞・劉絵・劉孝綽・劉瑱
.列伝第三十 – 魯爽・薛安都・鄧琬・宗越・呉喜・黄回
.列伝第三十一 斉宗室 – 蕭道度・蕭道生・蕭遙光・蕭遙欣・蕭緬・蕭景先・蕭赤斧・蕭諶・蕭誕・蕭坦之
.列伝第三十二 斉高帝諸子上 – 蕭嶷
.列伝第三十三 斉高帝諸子下 – 蕭映・蕭晃・蕭曄・蕭暠・蕭鏘・蕭鑠・蕭鑑・蕭鋒・蕭鋭・蕭鏗・蕭銶・蕭鉉
.列伝第三十四 斉武帝諸子・文恵諸子・明帝諸子 – 蕭子良・蕭子卿・蕭子響・蕭子敬・蕭子懋・蕭子隆・蕭子真・蕭子明・蕭子罕・蕭子倫・蕭子貞・蕭子岳・蕭子文・蕭子峻・蕭子琳・蕭子建・蕭子夏・蕭昭秀・蕭昭粲・蕭宝義・蕭宝玄・蕭宝源・蕭宝寅・蕭宝攸・蕭宝嵩・蕭宝貞
.列伝第三十五 – 王敬則・陳顕達・張敬児・崔慧景
.列伝第三十六 – 李安人・戴僧静・桓康・焦度・曹武・呂安国・周山図・周盤龍・王広之
.列伝第三十七 – 荀伯玉・崔祖思・蘇侃・虞悰・胡諧之・虞玩之・劉休・江祏
.列伝第三十八 – 陸澄・陸慧曉・陸杲
.列伝第三十九 – 庾杲之・王諶・孔珪・劉懐珍
.列伝第四十 – 劉瓛・明僧紹・庾易・劉虯
.列伝第四十一 梁宗室上 – 蕭景・蕭懿・蕭敷・蕭暢・蕭融・蕭宏
.列伝第四十二 梁宗室下 – 蕭秀・蕭偉・蕭恢・蕭憺
.列伝第四十三 梁武帝諸子 – 昭明太子・蕭綜・蕭績・蕭続・蕭綸・蕭紀
.列伝第四十四 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 – 哀太子大器・尋陽王大心・南海王大臨・南郡王大連・安陸王大春・武烈世子方等・貞恵世子方諸・愍懐太子方矩
.列伝第四十五 – 王茂・曹景宗・曹義宗・席闡文・夏侯詳・吉士瞻・蔡道恭・楊公則・鄧元起・張恵紹・張澄・馮道根・康絢・昌義之
.列伝第四十六 – 張弘策・庾域・鄭紹叔・呂僧珍・楽藹
.列伝第四十七 – 沈約・范雲
.列伝第四十八 – 韋叡・裴邃
.列伝第四十九 – 江淹・任昉・王僧孺
.列伝第五十 – 范岫・傅昭・孔休源・江革・徐勉・許懋・殷鈞
.列伝第五十一 – 陳伯之・陳慶之・蘭欽
.列伝第五十二 – 賀瑒・司馬褧・朱异・顧協・徐摛・鮑泉
.列伝第五十三 – 王神念・羊侃・羊鴉仁
.列伝第五十四 – 江子一・胡僧祐・徐文盛・陰子春・杜崱・王琳・張彪
.列伝第五十五 陳宗室諸王 – 陳擬・陳詳・陳慧紀・陳昌・陳曇朗・陳伯茂・陳伯山・陳伯固・陳伯恭・陳伯仁・陳伯義・陳伯礼・陳伯智・陳伯謀
.列伝第五十六 – 杜僧明・周文育・侯瑱・侯安都・欧陽頠・黄法𣰰・淳于量・章昭達・呉明徹
.列伝第五十七 – 胡穎・徐度・杜稜・周鉄武・程霊洗・沈恪・陸子隆・銭道戢・駱文牙・孫瑒・徐世譜・周敷・荀朗・周炅・魯悉達・蕭摩訶・任忠・樊毅
.列伝第五十八 – 趙知礼・蔡景歴・宗元饒・韓子高・華皎・劉師知・謝岐・毛喜・沈君理・陸山才
.列伝第五十九 – 沈炯・虞茘・傅縡・顧野王・姚察
.列伝第六十 循吏 – 吉翰・杜驥・申恬・杜慧度・阮長之・甄法崇・傅琰・虞愿・王洪範・沈瑀・范述曾・孫謙・何遠・郭祖深
.列伝第六十一 儒林 – 伏曼容・何佟之・厳植之・司馬筠・卞華・崔霊恩・孔僉・盧広・沈峻・孔子袪・皇侃・沈洙・戚袞・鄭灼・張譏・顧越・沈不害・王元規
.列伝第六十二 文学 – 丘霊鞠・檀超・卞彬・丘巨源・王智深・崔慰祖・祖沖之・賈希鏡・袁峻・劉昭・鍾嶸・周興嗣・呉均・劉勰・何思澄・任孝恭・顔協・紀少瑜・杜之偉・顔晃・岑之敬・何之元・徐伯陽・張正見・阮卓
.列伝第六十三 孝義上 – 龔穎・劉瑜・賈恩・郭世通・厳世期・呉逵・潘綜・張進之・丘傑・師覚授・王彭・蒋恭・徐耕・孫法宗・范叔孫・卜天与・許昭先・余斉人・孫棘・何子平・崔懐順・王虚之・呉慶之・蕭叡明・蕭矯妻羊氏・公孫僧遠・呉欣之・韓係伯・丘冠先・孫淡・華宝・解叔謙・韓霊敏・劉渢・封延伯・呉達之・王文殊・楽頤之・江泌・庾道愍
.列伝第六十四 孝義下 – 滕曇恭・陶季直・沈崇傃・荀匠・吉翂・甄恬・趙拔扈・韓懐明・褚脩・張景仁・陶子鏘・成景儁・李慶緒・謝藺・殷不害・司馬暠・張昭
.列伝第六十五 隠逸上 – 陶潜・宗少文・沈道虔・孔淳之・周続之・戴顒・翟法賜・雷次宗・郭希林・劉凝之・龔祈・朱百年・関康之・漁父・褚伯玉・顧歓・杜京産
.列伝第六十六 隠逸下 – 臧栄緒・呉苞・徐伯珍・沈麟士・阮孝緒・鄧鬱・陶弘景・諸葛璩・劉慧斐・范元琰・庾詵・張孝秀・庾承先・馬枢
.列伝第六十七 恩倖 – 戴法興・徐爰・阮佃夫・紀僧真・劉係宗・茹法亮・呂文顕・茹法珍・周石珍・陸験・司馬申・施文慶・沈客卿・孔範
.列伝第六十八 夷貊上 – 林邑国・扶南国・中天竺国・師子国
.列伝第六十九 夷貊下 – 高句麗・百済・新羅・倭国・扶桑国・河南王・宕昌国・鄧至国・武興国・荊雍州蛮・豫州蛮・高昌国・亀茲・于闐・波斯国・蠕蠕
.列伝第七十 賊臣 – 侯景・熊曇朗・周迪・留異・陳宝応
○ 남사[南史] 열전 제69 동이열전(東夷列傳)
1. 서(序)
2. 고구려(高句麗)
3. 백제(百濟)
4. 신라(新羅)
1. 서(序)
1)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朝鮮)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기자(箕子)의 교화(敎化)를 입어 그 문물(文物)이 예악(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
위(魏)의 시대에는 조선(朝鮮)의 동쪽에 있는 마한(馬韓)· 진한(辰韓)의 무리가 대대로 중국(中國)과 왕래하였다.
진(晋)이 [양자(揚子)]강(江) 이남으로 옮겨간 후부터 바다를 건너 사절(使節)을 파견한 나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있었는데, 송(宋)· 제(齊) 시대에도 계속하여 직공(職貢)하였으며, 양(梁)나라가 흥기하자 [조공(朝貢)이] 더욱 빈번해졌다.
2) 부상국(扶桑國)이란 옛날에는 듣지 못하던 나라이다. 양(梁)나라 보통(普通) 연간(A.D. 520~526; 高句麗 安藏王 2~8)에 어떤 도인(道人)이 스스로 그곳에서 왔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매우 합당하므로 함께 기록한다.
2. 고구려(高句麗)
1) 고구려(高句麗)는 요동(遼東) 동쪽 천리 밖에 있다. 그 선조의 출자에 대한 서적은『북사(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 산에서] 흘러 나온다.
한(漢)· 위(魏) 시대에는 남으로는 조선(朝鮮)· 예맥(獩貊), 동으로 옥저(沃沮), 북으로 부여(夫餘)와 인접하였다.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 아래에 있다.
국토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서,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비록 토저생활(土著生活)을 하고 있지만 좋은 토지는 없어 그들의 습속에 음식을 아껴 먹고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한다.
왕의 궁실 왼편에 큰 집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또한 영성(零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지낸다.
사람들의 성질은 포악하고 성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2) 벼슬아치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鄒加)· 주부(主簿)· 우태(優台)·조의(皁衣)· 선인(先人)이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언어나 생활 관습은 부여(夫餘)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 및 의복은 서로 달랐다.
본래 5족(族)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신노부(愼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처음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이 나왔으나 미약하여지자, 계루부(桂婁部)에서 왕위(王位)를 차지하였다.
[그 나라는] 관리를 설치할 적에 대로(對盧)가 있으면 패자(沛者)를 두지 않고, 패자(沛者)가 있으면 대로(對盧)를 두지 않는다.
3) [그들의] 습속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부락(部落)마다 남녀가 밤마다 떼지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유희를 즐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경우 한쪽 다리는 펴며, 길을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하듯 빨리 간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대회(大會)가 있다. 그들의 공식(公式)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 주부(主簿)의 머리에 쓰는 것은 [중국(中國)의] 책(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변,弁)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 평의(評議)하여 중죄(重罪)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몰수한다.
4) 그 나라의 습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야합(野合)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한 뒤에는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데에 곽(椁)은 쓰지만 관(棺)은 사용하지 않는다.
후장(厚葬)하는 풍속이 있어서 금· 은과 재화를 모두 장례에 소비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氣力)을 숭상하여 활· 화살· 칼· 창을 잘 쓰고, 갑옷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시켰다.
5) 진(晋)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A.D.413; 高句麗 長壽王 1)에 고(高)[구(句)]려왕(麗王) 고련(高璉)이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쳤다.
진(晋)나라는 련(璉)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都督營州) 제군사(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려왕(高麗王)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송(宋)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련(璉)에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의 벼슬을 더 주고, 다른 관직은 모두 그래도 인정하였다.
[영초(永初)] 3년(A.D.422; 高句麗 長壽王 10)에 련(璉)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A.D.424; 高句麗 長壽王 12)에 련(璉)이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므로,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왕소자(王邵子) 등을 파견하여 노고를 치사(致謝)하였다.
6) 원가(元嘉) 15년(A.D.438; 高句麗 長壽王 26)에 풍홍(馮弘)이 위(魏)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고려(高[구(句)]麗)의 북풍성(北豊城)으로 달아나서, [송 문제(宋 文帝)에게] 표문을 올려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하였다.
문제(文帝)는 왕백구(王白駒)와 조차흥(趙次興)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에게 [풍홍(馮弘)을 송나라로] 보내 주도록 하였다. 련(璉)은 [풍(馮)]홍(弘)이 남쪽(송나라)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손수(孫漱)· 고구(高仇) 등을 보내 기습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왕(王)]백구(白駒) 등은 휘하의 7천여명을 통솔하여 [손(孫)]수(漱)를 생포하고 [고(高)]구(仇) 등 2명을 살해하였다.
련(璉)은 [왕(王)]백구(白駒)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 하여, 그들을 체포해서 송나라로 압송하였다.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고구려)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 [왕(王)]백구(白駒)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었다.
[고(高)]련(璉)이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다.
[원가(元嘉)] 16년(A.D.439; 高句麗 長壽王 27) 문제(文帝)가 위(魏)를 침략하고자 련(璉)에게 말을 보내라고 조서를 내리자, [련(璉)은] 말 8백필을 바쳤다.
7) 효무(孝武)(제,帝) 효건(孝建) 2년(A.D.455; 高句麗 長壽王 43)에 련(璉)은 장사(長史) 동등(董騰)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고, 국상(國喪) 3주기(周忌)에 대한 조문과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대명(大明) 2년(A.D.458; 高句麗 長壽王 46)에 또 다시 숙신씨(肅愼氏)의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헌상(獻上)하였다.
[대명(大明)] 7년(A.D.463; 高句麗 長壽王 51) 조서를 내려 련(璉)의 벼슬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올려 주고 여타의 관직은 모두 그대로 인정하였다.
명제(明帝) 태시(泰始) 연간(A.D.465~471; 高句麗 長壽王 53~59)에서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연간(A.D.473~476; 高句麗 長壽王
61~64)까지도 공물의 헌상이 끊어지지 않았다.
[련(璉)은] 제(齊)나라 때에도 한결같이 작위를 받았으며, [나이] 백여세에 죽었다.
8) 그의 아들 [고(高)]운(雲)이 왕위에 올랐다. 제(齊) 융창(隆昌) 연간(A.D.493; 高句麗 文咨王 2)에 [운(雲)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려왕(高麗王)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양(梁)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운(雲)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올려 주었다.
9) 천감(天監) 7년(A.D.508; 高句麗 文咨王 17)에 조서를 내려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내리고, 지절(持節)· 상시(常侍)· 도독(都督)· 왕(王)은 모두 그대로 인정하였다.
[천감(天監)] 11년(A.D.512; 高句麗 文咨王 21)과 15년(A.D.516; 高句麗 文咨王 25)에도 거푸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감(天監) 17년(A.D.518; 高句麗 文咨王 27) 운(雲)이 사(死)하고 그의 아들 [고(高)]안(安)이 왕위에 올랐다.
10) 보통(普通) 원년(A.D.520; 高句麗 安藏王 2)에 안(安)에게 조서를 내려 지절(持節) 독영평이주제군사(督營·平二州諸軍事)
영동장군(寧東將軍)의 봉작을 승습케 하였다.
[보통(普通)] 7년(A.D.526; 高句麗 安藏王 8) 안(安)이 졸(卒)하고 그의 아들 [고(高)]연(延)이 왕위에 올랐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므로, 조서를 내려 연(延)에게 작위를 승습케 하였다.
중대통(中大通) 4년(A.D.532; 高句麗 安原王 2)과 6년(A.D.534; 高句麗 安原王 4)·대동(大同) 원년(A.D.535; 高句麗 安原王 5)과 7년(A.D.541; 高句麗 安原王 11)에 거푸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태청(太請) 2년(A.D.548; 高句麗 陽原王 4) 연(延)이 졸(卒)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고(高)]성(成)에게 연(延)의 작위를 승습케 하였다.
3. 백제(百濟)
1) 백제(百濟)는 그 시초가 동이(東夷)의 삼한국(三韓國)인데, [삼한국(三韓國)의]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辰韓)이요, 또 하나는 변한(弁韓)이었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0은 각각 12국(國)이 있었고, 마한(馬韓)은 54국(國)이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萬餘家), 소국(小國)은 수천가(數千家)로서 모두 10여만호(餘萬戶)가 되었는데, 백제(百濟)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차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를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高)]구려(句麗)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리 밖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高)]구려(句麗)가 이미 요동(遼東)을 경략하자, 백제(百濟) 역시 요서(遼西)· 진평(晋平) 2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2) 진(晋) 의희(義熙) 12년(A.D.416; 百濟 腆支王 12)에 백제왕(百濟王) 여영(餘映)을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송(宋)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A.D.424; 百濟 久爾辛王5)에 영(映)이 장사(長史) 장위(長威)를 파견하여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3) 원가(元嘉) 2년(A.D.425; 百濟 久爾辛王 6)에 문제(文帝)가 조명(詔命)으로 겸알자(兼謁者) 여구은자(閭丘恩子)와 겸부알자(兼副謁者) 정경자(丁敬子) 등을 보내어, 칙지(勅旨)를 펴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 후 백제는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원가(元嘉)] 7년(A.D.430; 百濟 毗有王 4)에 백제왕(百濟王) 여비(餘毗)가 다시 공물을 바치므로,
[여(餘)]영(映)의 작호(爵號)를 승습케 하였다. [원가(元嘉)] 27년(A.D.450; 百濟 毗有王 24)에는
[여(餘)]비(毗)가 방물을 바치며, 국서(國書)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 역림(易林)· 식점(式占) 및 요노(腰弩)를 요구하자 문제(文帝)는 모두 들어 주었다. [여(餘)]비(毗)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경(慶)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4) 효무(孝武)[제(帝)] 대명(大明) 원년(A.D.457; 百濟 蓋鹵王 3) 에 사신을 보내어 벼슬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하자, 조명(詔命)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대명(大明)] 2년(A.D.458; 百濟 蓋鹵王 4)에는 경(慶)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인이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므로, 모두 벼슬을 높여줄 것을 구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모두에게 더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다.
5) 명제(明帝) 태시(泰始) 7년(A.D.471; 百濟 蓋鹵王 17)에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경(慶)이 사(死)하고 그의 아들 모도(牟都)가 왕위에 올랐다.
도(都)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모대(牟大)가 왕위에 올랐다.
6) 제(齊) 영명(永明) 연간(A.D.483~493; 百濟 東城王 5~15)에 대(大)에게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이라는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양(梁) 천감(天監) 원년(A.D.502; 百濟 武寧王 2)에 대(大)의 [장군(將軍)]호(號)를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올려 주었다.
얼마 뒤 고구려(高句麗)에게 격파되어 날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남한(南韓)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
7) 보통(普通) 2년(A.D.521; 百濟 武寧王 21)에 [백제]왕 여륭(餘隆)이 비로소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高[句]麗)를 무찌르며 [싸웠으나] 이제 비로소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하니, 백제(百濟)가 다시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해 양(梁) 무제(武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융(隆)을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보통(普通)] 5년(A.D.524; 百濟 聖王 2)에 융(隆)이 사(死)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명(明)을
지절(持節) 독백제제군사(督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8) [백제는] 도성(都城)을 고마(固麻)라고 하며, 읍(邑)을 담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안에는 22담로(檐魯)가 있는데, 모두 [왕의]자제와 종족(宗族)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백제인의 키는 크며 의복은 깨끗하다. 그 나라는 왜(倭)에 가까이 있는 까닭에 문신(文身)한 자들도 꽤 있다.
언어와 복장은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같다. 모(帽)를 관(冠)이라 부르고, 유(襦)를 복삼(複衫), 고(袴)를 곤(褌)이라고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泰)· 한(韓)의 유속(遺俗)이라고 한다.
9) 중대통(中大通) 6년(A.D.534; 百濟 聖王 12)과 대동(大同) 7년(A.D.541; 百濟 聖王 19)에 거푸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열반경(湼槃經) 등에 대한 의소(義疏)와 모시박사(毛詩博士) 및 공장(工匠)· 화사(畫師) 등을 구하므로 모두 공급하여 주었다. 태청(太淸) 3년(A.D.549; 百濟 聖王 27)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사신이 [국도(國都)에] 이르러 성궐(城闕)이 황폐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자, 후경(侯景)이 노(怒)하여 잡아 가두었다. 경(景)의 난리가 평정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신라(新羅)
1) 신라(新羅)의 선조에 관한 사적은『북사(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국토의 동쪽은 큰 바다와 연(沿)해 있고, 남과 북은 [고(高)]구려(句麗)· 백제(百濟)와 접하고 있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新盧)라 불렀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A.D.521; 新羅 法興王 8)에 성(姓)은 모(募), 이름은 태(泰)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2) 그 습속에 왕성(王城)을 건모라(健牟羅)라 부르며 그 읍(邑)이 [건모라(健牟羅)의]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邑勒)이라 하니, 이것은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啄評)과 52군데의 읍륵(邑勒)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五穀)을 심기에 적합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비단과 베를 생산한다. 소는 수레를 끌게 하고 말은 탄다. 남녀간의 구별이 엄격하다.
3) 그 나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 일한지(壹旱支)· 제한지(齊旱支)· 알한지(謁旱支)·
일길지(壹吉支)· 기패한지(奇貝旱支)가 있다. 그들은 관(冠)을 유자례(遺子禮)라 하며, 저고리(유,襦)를 위해(尉解), 바지(고,袴)를 가반(柯半), 신(화,靴)을 세(洗)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다. 문자(文字)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