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마 25:31-46)
저 개인적으로 호주 나눔선교회를 맡아 섬기면서 처음으로 지난 1월에 호주의 이웃 섬나라인 바누아투(Vanuatu)의 타나로 선교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시드니의 또 다른 두 선교단체와 함께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시골교회에 태양광 전기를 설치하는 일과 마을회관 겸 교회용도로 사용될 건물을 건축하는 미션을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골교회에서 마음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구경삼아 지켜보는 가운데 태양광 설치하는 일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함께 간 선교사님과 전도사님 그리고 집사님의 수고가 있었지만, 오히려 개인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면 오고가는 길이 너무 좋지 못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험난한 노정이었다. 어느 정도 영어를 사용하시는 그곳 현지 목사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밤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곳에 빛이 들어오게 되면 많은 일상의 변화가 있을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요한 나라 호주에 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그곳 바누아투사람들은 한마디로 가난했다. 그런데도 어느 해인가 영국 신경제재단(Nef, New Economics Foundation)에서 세계 178개국을 대상으로 행복한 지구 지수(HPI, Happy Planet Index)를 계산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1위가 바누아투였다. 국내총생산(GDP)은 전 세계 233개 국가 중 207위에 불과한 이 나라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그리고 부자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
시드니로 다시 돌아온 나는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자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어 음부에 가게 되었을까? 유대사회에서 누가보아도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자가 되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즐기며, 한마디로 하나님 주신 복을 마음껏 누렸을 뿐인데 그가 죽어 음부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라움을 넘어 쇼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뜻밖에도 우리 모두가 닮고 싶은 삶의 모습은 거지 나사로가 아니라 부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품에 안은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보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4-26). 이 정황을 볼 때에 부자는 한눈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자가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집 대문에서 구걸하던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임을 알아보았다. 결국 하나님을 아노라고 했던 유대인 부자의 삶의 문제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못했던 단지 이 이유 하나가 죽어 천국을 가지 못하고 고통의 지옥으로 가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영원한 삶의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아직 기회가 있는 자신의 형제들이 이곳 음부에 오지 않도록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간구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살아있는 동안 모세와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어차피 죽은 나사로가 살아가서 이야기 한다고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제자의 삶은 목사가 되는 것도 신학교 교수가 되는 것도 교회의 직분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주의 제자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신학교 교수가 되는 것도 교회의 직분을 가지는 일도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의미 있는 종교행위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가난한 소자하나를 돌보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성경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강도를 만나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을 때에 그 곁을 지나가게 되는 당시 세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 지나가게 된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두 번째 지나가게 된 사람은 레위인 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섬기는 종교지도자의 역할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성전 안에서는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 가운데 만나게 된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세 번째는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이라 멸시했던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를 보자마자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처치를 하고 주막에까지 데리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그를 부탁하고 자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 올 때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부분이 생긴다면 본인이 지불하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떠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랄 뿐이다. 만약 그 강도만난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가던 그들 자신의 부모 형제였다면 누구나 사마리아인과 같이 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선한 사마리인의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어라고 율법사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찾아와 다행히 중요한 질문을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있는지 어떻게 이해하는지 물으시자 그 율법사의 대답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장)라고 정확한 대답을 한다. 그렇다! 이 간단한 내용이 바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은 별개의 두 개 계명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계명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간에 ‘또한’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다. 헬라어로는 ‘메눈게’라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아니 확실히’, ‘아니 오히려’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의미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도와주는 그것이 곧 하나님 사랑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 곧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그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 결론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의 주로 오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결과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삶과 같이 나누이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기준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 충격 받게 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4-40). 복 받을 자의 기준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일’라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그저 고개 숙여 경배할 뿐이라는 생각이듭니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영벌에 처해지는 염소 같은 인생을 산 자들에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심을 본다.
가난 자들과 고아와 과부에게 그 토록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아마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선포되어 지기를 원하시는 전능자의 간절한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의 삶을 시작케 하신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 앞에 깨어 가난한 이웃사랑을 통한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이용호 목사(시드니 달란트교회 / 호주나눔선교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