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행복론
공자, 플라톤, 부처, 예수의 행복론
정치사상사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주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고전적인 질문의 하나이다.
행복 (幸福, happiness)은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좋은 감정으로 심리적인 상태 및 이성적 경지 또는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과 여유로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상태는 주관적일 수 있고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또한, 행복은 철학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엄밀하며 금욕적인 삶을 행복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광의로 해석해,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생물에도 이에 상응하는 상태나 행동, 과정이 있을 수도 있다. 생물의 행복감에는 만족감의 요소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나 인간의 경우 만족감 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행복감에 영향을 미친다.
○ 공자의 행복론
공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가난한 사람도 가난을 즐기며 배움을 좋아하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일상의 행복은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행복이었다.
유가 (儒家)의 창시자 공자 (孔子, BC 551 ~ BC 479)가 인 (仁)의 가치를 강조한 것 또한 ‘행복한 삶’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적 행복’은 ‘유가적 좋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논어 (論語) 모두 (冒頭) 편인 학이 (學而)편 1장, 곧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불역열호. 유붕자원방내불역낙호. 인불지이부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 3구절이 구체적인 공자의 행복관을 내포하고 있다.
‘논어’에는 인간에 대하여 새로운 자각을 한 각성된 지식인 공자에 의해 변화된 시대의 행복론이 전개되어 있다. 공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가난한 사람도 가난을 즐기며 배움을 좋아하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일상의 행복은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행복이었다. 행복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행복한 사람 공자가 ‘논어’에서 제시한 행복론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많은 공감을 던져 주고 있다.
이처럼 공자에게 ‘행복은 호학을 통해 올바르게 사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서 호학 (好學), 즉 죽도록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공자 스스로 높이 산 만큼 공자의 행복은 분명히 호학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행복이 꿈꾸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행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공자가 누렸던 행복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알고,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서 얻어진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서로 경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한편 유교 오경 (五經)중 하나인 ‘서경’에는 사람의 행복을 다섯 가지로 구체화하고 있다.

1.오래 사는 것
2.부자로 사는 것
3.편안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
4.덕을 좋아하며 사는 것
5.목숨을 잘 마감하는 것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서경’의 내용 중 하나이면서 현대인들의 최대 욕망인 ‘부자로 사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부분과 상충된다.
○ 플라톤의 행복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Platon)이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여러 주장들이 엇갈리지만 오늘날 대개는 기원전 428년에서 427년 사이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가 여든 한 살 또는 여든 살까지 산 것으로 보고, 그가 죽은 해를 기원전 348년 또는 347년으로 잡는다.
플라톤의 행복론은 그리스 고유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으로 온갖 다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몫을 누리면서 다른 것들과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모습이고 사람이 또 본래 살아야 할 모습이며 나라가 추구해야 할 가장 올바른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을 플라톤은 ‘정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의롭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정의롭고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은 받으시 행복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그리스 공동체란 발칸반도 곳곳에 산재한 각각의 도시국가들이 제 나름의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다른 이웃 도시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고, 행복한 나라라 함은 한 도시국가에 속하는 여러 다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들이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않고, 그들 각자의 본성과 소질에 맞게 자기 역할을 최고의 상태로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면서 그 나라 전체의 평화와 평온을 이룩하며 사는 것이다.
요컨데 사람이 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하고 자기가 누려야 할 것을 잘 누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공존해 가는 것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인간 각각의 내면의 행복한 상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세 가지 측면, 즉 냉철한 이성의 측면과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는 기개의 측면, 그리고 감각적인 욕심과 충동에 따라 살려는 욕망의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런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분이 인간 영혼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이 나머지 부분을 억누르거나 지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플라톤이 이성주의자라고 해서 개인 내면의 이성이 나머지 기개나 충동을 억눌러서 금욕적으로 사는 것을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한 삶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자리에 가면 욕망의 측면이 조화를 이끌어 가면서 잘 놀아야 하고 자존심 내세우거나 용기를 발휘해야 할 곳에서는 기개의 측면이 그렇게 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적으로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훼손됨이 없이 각각의 부분이 마치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면서 때로는 빠른곡, 때로는 평정한 곡을 연주하듯 내적인 조화를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제멋대로 본능을 충족시키거나 금욕주의자처럼 일체의 본능을 따르지 않거나 하는 것은 모두 행복한 삶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행복론은 인간의 다층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 있는 매우 균형잡힌 행복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행복론’에서 행복을 위한 조건 5가지를 말했다.
1. 먹고 살만한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2.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받기에는 약간 처지는 용모
3. 자신이 자만하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4.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어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5.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 정도만 손뼉을 쳐주는 말솜씨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함에서 찾았다. 내게 없는 것을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나보다 많이 가진 자를 바라본다면 행복할 수 없다. 지금 내게 있는 것, 그것이라도 있음을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며 감사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욕심과 불만이 인간에게서 행복을 앗아간다. 인간에게서 행복을 빼앗아 가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비교의식, 열등감, 낮은 자존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의 요체는 ‘수분자족’ (守分自足, 분수를 지키고 스스로 넉넉함을 느낀다)이요 ‘수분지족’ (守分知足, 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을 안다) 이라는 동양적인 금언과도 일맥상통 (一脈相通)한다. 자기 분수와 직분, 자기 할 일을 잘 알고 그것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물론 수분자족하며 살자는 말은 자기는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수를 알고 그 정도로나마 만족 해야지 하는 패배주의적인 자기 위안 내지 자기 합리화로 들리기도 한다. 하기는 강자나 지배자는 수분자족 (守分自足), 수분지족 (守分知足)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말은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면서 하는 말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 이른바 수분자족 (수분지족)론은 약자에게만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들이 각각 제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코스모스를 이루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에게 요구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통치 계층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욕망과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 적성과 소질대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고, 군인 계층은 소질대로 용기와 명예를 가지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니 통치자의 역할을 넘보거나 생산자의 물건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나라를 잘 수호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신발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잘하면 당연히 그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는 서로의 적성과 소질을 실현해 가면서 서로 의지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적성과 소질은 각각 다른 뿐 어느 것이 보다 좋은 것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람 사는 사회를 채우고 귀하고 소중한 가치이고, 각자는 누구의 간섭이나 침해 없이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적성에 따른 고유한 역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 가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행복한 나라, 행복한 개인이다.
○ 부처의 행복론
불교적 관점에서의 행복의 성취는 ‘이고득락 (離苦得樂)’, 즉 ‘고를 떠나 행복을 얻는 것’이라 정의했다. 바꿔 말하면 고를 떠나고 낙을 얻는다는 의미다. 고를 떠나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고통 자체를 없앤다는 의미가 아니고 고통의 보편성을 자각하는데 있다. 즉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고통을 자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우리의 경험이 본질적으로 고통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어떤 감각기관이나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체득되는 순수한 만족감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다. 세 번째 의미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우리의 욕망과 집착에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행복은 ‘나눔’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삶이란 곧 수행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수행을 통해 나와 이웃의 진정한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 예수의 행복론
성경에도 복에 대한 숱한 언급이 있는데 예수가 직접 언급한 것으로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이른바 ‘팔복 (八福)선언’이 있다. 이 팔복은 예수의 행복론이 집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당시나 현세에서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복론을 제시했다. 팔복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등이 있는데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면 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론의 전제는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고 영화라는 것은 먼지처럼 무상하다는 인간의 조건에 근거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먼지처럼 가벼운 것을 깨닫고 가난한 자신의 실천적 조건을 수락한 사람이 결국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온유하다거나 자비를 행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성찰이고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하는 것이다. 일신의 영달이나 소유지향적 삶을 버리고 자비와 평화라는 가치를 추구할 때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행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삶이 힘겹기는 해도 자기 존재와 삶을 조정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길 때 불행은 조금씩 물러나고 행복이 증대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수를 포용하는 이타심의 발현이나,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관계의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예수가 주장하는 행복의 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 공자와 플라톤, 부처와 예수의 조화의 행복론

다양한 것들과의 관계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알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몫을 누리면서 다른것들과의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다.
정의롭다는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여러다른 계층 즉 정치하는사람 군사적계층, 생산자계층 들이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않고 그들의 각자의 본성과 소질에 맞게 자기 역할을 최고의 상태로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면서 그 나라 전체의 평화와 평온을 이룩하며 사는 것이다.
플라톤의 행복론의 요체는 수분자족 하며 살아야한다 라는 동양적인 금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분수와 직분 자기 할 일을 잘 알고 그것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사는것이다.
하늘의 별들이 각자 제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코스모스를 이루듯이 자신의 적성에 따른 고유한 역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 가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행복한 것이다.
상황에 맞게 최선의 행위가 구현될수 있도록 각각의 부분이 조화 군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플라톤은 무지가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한다.
앎은 반드시 실천을 담보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은 앎 자체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고 그 앎이 일러주듯이 도덕은 그자체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영혼의 감수성에 따라 제대로 그 모든것을 알면 결코 불행을 자초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 능력을 기르는 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의 길이다.
공자도 사람이 일흔의 나이가 되면 아무렇게 마음먹은 대로 해도 도에서 벗어 남이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마음공부를 잘하면 나중에도 고민하지않고 제멋대로 해도 그릇됨이 없다는 뜻이다.
공자나 플라톤의 생각 모두 성인의 경지이다.
그렇게 까지는 될수 없어도 생활속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를 존중하고 장점을 평가 하면서 자기 내면의 영혼의 감수성을 하나하나 키워 나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서로의 마음속에 갖고있는 그런 참된 감수성을 각자의 고유능력과 덕을 통해 키우고 나눠가지면서 사는 것이 공자나 플라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행복론의 요체이다.
예수와 부처의 행복론도 결론적으로 예수는 인간이 핍박과 장애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통하여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부처는 고통의 근원을 없앰으로써 스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와 플라톤의 행복론도 크게 다르진 않으나 인간의 ‘본마음’을 유지함으로 행복은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론을 관통하는 것은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고 옳음과 바름을 지향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