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중국) 제자백가의 사상 3 – 도가의 사상
[목차]
– 도가
– 도가의 사상
.노자
.관윤
.열자
.양주
.직하의 도가들
.장자
– 도가
도가는 황로학(黃老學) 또는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한다. 도가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예악(禮樂: 예법과 음악), 형정(刑政: 정치와 형벌, 정치와 행정)의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어린 아이의 천진성으로 복귀하여 무위자연의 사회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노자의 이른바 도덕(道德)은 보통 말하는 도덕(Virtue)이 아니고, 유가의 이른바 인의(仁義)라는 도덕의 상위개념으로서 도(道, Tao)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본체임과 동시에 인성론(人性論)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뒤이어 전국시대에서는 장자(莊子)가 나와 도가철학의 인식론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만물제관(萬物齊觀) · 시비양행론(是非兩行論)을 주창하고 가치의 전환을 부르짖음으로써 평등 · 자유 · 무욕을 강조했다.
열자(列子)는 노자를 이어 형이상학적으로 기화(氣化)를 상세히 논하고, 허무청정(虛無淸淨) · 전성보전(全性保眞)을 주장함으로써 신비적 · 은둔주의적 철학 사상으로 기울어졌으며, 이 계통에 있는 양주(楊朱)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이기쾌락주의(利己快樂主義)적인 독선에 빠졌다.
유가가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적극적인 면을 계승하여 형성된 것과 반대로 도가는 그 소극적인 면을 이어 무위자연의 사상체계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도교(道敎, Taoism)는 후한(後漢) 때 노자를 천존(天尊)으로 받들어 조직한 종교이지만, 도가자체는 종교가 아니다.
– 도가의 사상(道家-思想)
유가(儒家)사상과 아울러 후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가사상이다. 도가사상은 노자(老子)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노자는 공자보다 선배로서 공자는 일찍이 노자에게 예를 배운 일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이것이 후대 유가의 사고방식에 매우 대립적 입장에 서는 사상인데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 중에는 도가사상에 대하여 말한 바가 없다.
맹자 시대에 유가에 대립한 것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었다. 오늘날 양주는 도가의 일파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논어에도 맹자에도 노자에 관한 사항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초 유가와 강하게 대립한 학파는 묵가였다. 그 때문에 노자는 공자보다 훨씬 뒤의 전국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馮友蘭의 말). 그렇지만 논어(論語)를 읽으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憲問扁). “원(怨)을 갚는 데 덕으로써 한다”는 것은 노자(老子)에 보인 말이다(63장). 또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분은 순(舜)이었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노자의 ‘무위’를 생각게 한다. 또 논어의 증자(曾子)의 말에 ‘도를 지녀(有)도 없는 듯 덕이 실하여도 허(虛)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있다(泰伯篇). 유무(有無), 허실은 이것 역시 노자에서 자주 보는 대립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논어에 노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노자적인 사고법이 전연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楊子江 남쪽의 대국)의 사람이라고 한다. 남방 초국 문화는 북방의 문화와 처음부터 달랐다. 북방의 풍토에서 생긴 시경(詩經)과 초(楚)의 풍토에서 생겨난 초사(楚辭)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초사의 대표작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읽으면 초조(焦燥)해 하고 있는 굴원에 대하여 굴원의 누이가 고독한 성실함을 지키지 말고 세속 사람들과 동화(同化)되는 것이 좋다고 타이른 말이 있다. 초사의 하나인 ‘어부사(漁父辭)’에서 홀로 결백함을 지키려 고민하는 굴원(屈原)에게 어부는 세속의 진애(塵埃)와 탁한 것을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도가적이다. 논어(論語)에는 초(楚)의 광인(狂人)을 가장한 접여(接輿)라는 인물이 정치의 이상에 불타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공자에게 지금의 정세는 정치에 종사하는 것이 위험하니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초(楚)나라 격조의 노래로 비판하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초(楚)의 지방에는 옛부터 도가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인생관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가사상도 그러한 사회적, 지리적 배경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노자(老子)에 실린 글은 때때로 압운(押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철학시로서 전해진 것이 어느 시기에 산문으로 정리된 것같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노자의 사상을 노자 개인의 철학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거기에는 많은 인생의 철학이 압축·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남방 초에서 발생한 생활철학, 그것을 전한 철학시(哲學詩)가 어느덧 <노자>에 종합된 말로 응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인생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린 노옹(老翁)의 말이라 하여 추앙되다가 나중에 아예 노자(老子)라는 개인의 철학처럼 굳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가사상은 인간에게 분수를 지키고 무욕(無欲)하는 생활을 하라고, 또 정치적 혼란에 직면해서는 은둔자로 생활하는 등 일견(一見)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가르쳐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사상은 후대에 있어서 문학자에게 많이 애호되었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 보이듯이 훌륭한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문학작품을 낳았다. 또 그 사상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화되었을 때 불교철학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禪)과 도가의 사상과는 근저에 있어서 통하는 것이 있다. 또 한편 도가의 철학에 불교의 형태를 받아들여서 민중종교로서의 도교가 성립하였다. 후세의 중국 민중사회에 도교가 준 영향은 크다. 도가사상은 예컨대 감필체(減筆體)라고 칭하는 공간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 수묵화나 무도의 일종인 권법에도 영향을 주었고 지극히 중국적인 동시에 지극히 동양적인 유현(幽玄)한 특성을 낳는 근원이 되었다. 도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아직도 알 수 없는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것은 주로 은자의 철학으로서 설명되기 때문에 주장한사람의 성격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중국 학자들의 평가에 의 하면 도가사상은 몰락 귀족의 사이에서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그 철학에는 준열한 역사와 풍토 위에서 생활한 서민들의 지혜도 혼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몰락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노장의 철학을 사랑하여 뛰어난 시를 지은 도연명(陶淵明)도 몰락 귀족이었다. 도가의 시조로 여겨지는 노자(老子)의 사고방식에는 유물적(唯物的)인 요소도 보였지만 장차 그 사상은 열자(列子)에서 장자(莊子)를 거치면서 매우 유심적(唯心的)인 철학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그 사상 내용은 참으로 동양적이며 또한 전인류의 지혜로서도 손색없는 독특하고 훌륭한 철학인 것이다.
○ 노자(老子)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老子 韓非列傳). 첫째로 이이(李耳, 자는 담(聃=老聃)를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예(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언(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에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주(周)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진(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에 노자라고 하면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하는 이이(李耳)를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이라고 하는 인물은 도가의 사상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 사상의 시조로서 공자보다도 위인(偉人)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일지도 모르겠다. 펑유란(馮友蘭)은 노자가 전국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지만 노자에게 특정 개인을 상응시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벌써 종교적 신앙에 빠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요약한 바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고 결론 지은 것은 사가(史家)로서 올바른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노자의 말이라고 하여 오늘날 <노자>(<老子 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상·하 2권 81장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기술되고 있는 사상은 확실히 도(道)의 본질, 현상계의 생활하는 우수한 철학인 것이다. 예컨대 도를 논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기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자랑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수장(首長)이지만 자기를 만물의 주재로는 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일반적으로는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해는 뛰어난 것이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 의 미신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强)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을 권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사람들은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확실히 유심적인 것이다.
○ 관윤(關尹)
주(周)의 철학자. 성은 윤(尹). 이름은 희(喜)이다. <사기>에 의하면 노담(老聃)은 주(周)의 쇠함을 보고 주를 떠나려고 관소(關所)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인 윤희(尹喜)에게 권고받아 <도덕경> 5천여 언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관령 윤희가 즉 관윤(關尹)으로 노자의 제자가 된다고 한다. <장자(莊子)>의 ‘천하편(天下篇)’에 관윤의 말이라 하여, 사람은 아집(我執)을 버리면 자연(自然)대로의 동작이 발휘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동(動)하기 물과 같고, 그 고요함이 거울과 같으며, 적(寂)함이 청(淸)과 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불이편(不二篇)’에는 ‘관윤(關尹)은 청(淸)을 귀히 여긴다’고 평하고 있다.
○ 열자(列子)
이름은 어구(禦寇). 정(鄭)의 은자로서 기원전 4세기경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열자(列子)> 8편이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세의 위작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열자(列子)>의 사상을 남긴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열자>의 황제편을 보면 열자가 관윤(關尹)과 나눈 담화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관윤을 통하여 노자의 사상을 배운 사람이 아닌가 한다. 노자는 현상의 본원을 도(道)라고 불렀으나 열자는 도를 태역이라고 바꾸어 불러 천지만물을 생성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도가적 우주론을 노자 이상으로 깊게 구축한 것이 열자이다. 그리하여 우주간의 흐르는 법칙을 좇아 사는 것이 인간의 진실된 삶의 방법이라고 했다. <열자>의 ‘천서편(天瑞篇)’에 “정(靜)하고 허(虛)하면 그 거(居)를 얻으리라”하는 말이 있으나 <여씨춘추> ‘불이편(不二篇)’에는 “열자는 허(虛)를 귀히 여긴다”는 일언으로 평한다. 저 유명한 ‘우공이산(愚公移山)’ ‘기우(杞憂)’의 이야기는 <열자(列子)>에 실려 있는 우화(寓話)로서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적 우화가 풍부한 서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 양주(楊朱)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자(字)는 자거(子居). 위(衛)의 사람이다. 양주(楊朱)의 전기도 매우 애매하다. 묵적(墨翟)과 아울러 그의 설이 천하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맹자(孟子)>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세기로부터 3세기에 걸쳐 그 학설이 유행했던 것 같다. 펑유란(馮友蘭)은 도가사상의 출현을 묵자(墨子) 이후였다고 생각하여 양주(楊朱)를 그 시초를 삼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양주의 학설은 <맹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및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 보인다. 양주(楊朱)는 하나의 생명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생활의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생명을 기르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생명의 주체는 ‘나(我)’다. 그 ‘나’를 소중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자(老子)는 무아를 말하여 무아속에 개인의 존속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양주는 노골적으로 무엇이든 나를 위해서만 해야 한다는 위아(爲我)설을 말하였다. 그것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묵자(墨子)가 말하는 ‘겸애’의 생각과는 대조적이다. 양주의 이 주장은 한 마디로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설이라고 평가받고 있다(<淮南子>氾論訓의 楊朱評). <여씨춘추> ‘불이편(不二篇)’에 양주를 평하여 ‘양생(楊生)은 나(己)를 귀히 한다’고 이르는 것도 양주사상의 특색을 한 마디로 논한 것이다.
○ 직하의 도가들(稷下-道家)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 (전357∼전301) 때 제의 국도에 많은 학자가 모여 세상에서 ‘직하의 학(稷下學)’ 이라고 호칭되는 학문의 성시가 도래했다. 도가에는 팽몽(彭蒙), 전병(田騈), 신도, 환연(環淵) 등이 있었다. 팽몽은 전병, 신도의 선생이 되는 듯하다. 팽몽, 전병, 신도의 학설에 대해서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에 해설이 있고 전병, 신도, 환연에 대해서 <사기(史記)> ‘맹자(孟子) 순경(荀卿) 열전’에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연은 전병, 신도의 스승이었다는 말도 있다. <사기>는 이외에 접자(接子)라고 하는 도가의 이름도 든다. <장자> ‘천하편(天下篇)’에 의거하면 팽몽, 전병, 신도는 만물을 제(齊)하는 것을 도(道)라 하면서, 지(知)를 버리고 자기를 떠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에 대해 자기를 버리고 만물과 동화할 필요를 논하여 무아의 입장을 취한 것이긴 하지만 무아이면서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시 양주의 위아(爲我)를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만물을 제(齊)한다고 하는 것은 장자의 근본사상의 하나인데 그 싹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사기>에 의하면 신도는 조나라 사람으로 <십이론>을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불완전하나마 <신자>라고 하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후인이 모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병, 접자(接子)는 제나라 사람이라 하고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전병은 진병(陳騈)이라고도 하며, 환연에는 <상하편(上下篇)>이라고 하는 저서가 있었다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직가(稷家)의 묵가에 송견, 윤문(尹文)이라고 하는 두 학자가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이 묵가이면서도 도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음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송견, 윤문(尹文)은 ‘금공침병(禁攻寢兵)’을 창도하였다고 <장자> ‘천하편(天下篇)’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곧 묵가(墨家)의 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욕과천(情慾寡淺)’의 설을 창도했다고 <장자> ‘천하편’에 말했고, <순자(荀子)> ‘정론편(正論篇)’에서 송견은 모멸당해도 욕으로 삼지 않음을 주장, 이 마음이 사람을 전쟁으로부터 멀리하는 근본이라 생각했다 한다. ‘정욕과천(情慾寡淺)’ ‘견모불욕(見侮不辱)’의 생각은 참으로 도가적이다. 그들은 묵가의 전쟁부정론의 근본에 도가적 생각을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 장자(莊子)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철학자. 이름은 주(周), 자는 자휴(子休). 송(宋)의 몽현(蒙縣)사람. 일설에는 양(梁)의 몽현(蒙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몽현의 ‘칠원(漆園)의 아전(吏)’이던 장자는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齊)의 선왕(宣王)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직하(稷下)의 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행동을 기록한 일화를 종합하여 보면 맹자보다 조금 후인 기원전 3세기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사기>에 의하면 장자의 학통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노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10여만 언의 ‘우언(寓言)’을 기록하여 노자의 도를 밝혔다고 한다. 오늘날 <장자(莊子)>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내편 7편은 주로 장자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여 장자의 사상을 아는 기본 자료로 간주된다. 외편·잡편은 장자의 후학의 무리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장자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제물론(齊物論)과 양생주론(養生主論)·소요유론(逍遙遊論)이다. 장자는 천지는 나와 아울러 생(生)하므로 만물은 나와 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체의 이(理)에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만물을 차별하여 시비를 벌이고 있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전체를 보지 않고 한 국부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가지여서, 죽는 것은 다만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세상의 현상은 한편으로 가한 것이 있으면 한편으로 불가한 것이 존재한다. 가부의 평가는 일방으로 편벽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천지만물을 투철하게 보면, 가(可)도 없고 불가(不可)도 없이 만물은 모두 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리고 만물에 동화하는 일 그것이 인간존재의 참된 존재 방법이며 궁극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명한 제물론(齊物論)으로서, 이러한 생각은 직하(稷下)의 도가에서 발하여 다시 더 철학적으로 심화된 것이다. 장자(莊子)는 또 ‘양생주(養生主)’ 편에서 “선을 하여도 명(名聲)에 가까이 함이 없이 몸(身=眞)을 보전할지어다”고 한다. 이 말은 양주가 말하였다는 전성보진(全性保眞)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소요유(逍遙遊)’편에서는 명(名)과 공(功)과 기(己)를 버리고 상대적 가치평가의 입장에서 떠나 천지의 사이를 소요하라고 설파한다. 이것은 시비의 판단이나 피아상대(彼我相對)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떠났을 때 비로소 천지만물과 일치하여 자연의 진성(眞性)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주만물에 미치는 도(道)의 본원의 자세를 말함에 있어서 장자는 여러 가지 우화를 인용하여 교묘하게 철학적 논지를 심화하여 간다. ‘소요유(逍遙遊)’에서는 붕(鵬)이라는 새를 매미와 뱁새로 대비시킨다. 그리하여 한정된 자기 세계에서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세계를 떠난 곳에서 보면 취할 것이 못되는 견해라고 하는 것을 교묘하게 예증(例 )하여 간다. 또 ‘제물론(齊物論)’에서는 어느날 장주(莊周)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나비가 된다. 그 때에 장주가 나비로 된 것인지 나비가 장주로 된 것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으나 참으로 유유하여 기분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 말을 하여 제물(齊物)의 경지를 설명하였다. 그러한 우화들은 훌륭한 픽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자(莊子)>는 철학서로서 우수할 뿐 아니라 문학서로서도 뛰어났다. 외편·잡편에서도 장자의 후학은 다시 많은 우화로 장자의 사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공자의 무리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희화화(戱畵化)한 비판을 가하였다. <장자>에 이르러 유가에 대항의식은 강렬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