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지상중계(7)
하나님, 그 이름의 신비함
정미연 박사(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던 모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새로운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여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너를 보내신 이가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출 3:13)
이 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어 יהוה로 대답하신다. 문법적으로 היה 는 동사며 אהיה(ehyeh)는 1인칭 미완료(imperfect) 시제이다. 여기서 히브리어의 동사의 시제 중에는 ‘완료’와 ‘미완료’가 있다. 과거/현재/미래에 상관없이 어떠한 행동이 완료되었는지 아닌지를 구별한다. 따라서 출애굽기 3장에 사용된 אהיה는 ‘나는 ~이었다’(I was), ‘나는 ~이다’(I am) 그리고 ‘나는 일 것이다’(I will be) 등으로 이해가 가능한 즉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이 단어가 3번 쓰이는 것은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영문 번역을 보자.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thou shalt say unto the sons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여기서 יהוה라는 단어가 한국어 성경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이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직역을 해볼 필요가 있다. 곧 יהוה는 영어로 ‘I am that I am.’ 혹은 미래형으로 ‘I shall be what I shall will be’; ‘I shall be what I am’; ‘I shall become what I choose to become’로도 가능하다. 한국어로 번역해 보자면 ‘나는 나다.’ 혹은 ‘나는 나로서 존재할 것이다’; ‘나는 선택하는 대로의 존재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설명할 때 ‘I am’ 다음에는 이름을 나타내는 보어가 나와야 하는데 하나님의 대답은 달랐다. 이러한 이름 표현은 ‘이름을 규명하지 않은 이름’(a name that does not name) 내지 ‘이름 없는 이름’(nameless name)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막연하게 이렇게 이름을 말씀하셨을까? 이것은 곧 이름이자 이름이 아니다. 이 대답을 들은 모세는 아마도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모세는 ‘해와 달의 신’이라든지 적어도 ‘나일강의 신’이라는 명칭들에 익숙했을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답 ‘나는 나다’(I am who I am)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이름은 기본적으로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존재적 의미를 가진다. 또한 ‘나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존재다’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가령 ‘나는 남자다’라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나는 아름답다’는 것은 ‘못나지 않다’는 의미가 당연히 포함된다. ‘나는 젊다’는 것은 늙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나는 나다’라는 의미는 ‘나는 나 이외의 그 어떤 존재도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이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름, 구약윤리의 사상적 토대
이런 심오한 뜻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 ‘야훼’(YHWH)가 성경에서 특별히 많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강조되는 장면들이다. 특히, 이방 여인 룻이나 라합이 다윗 왕조의 혈통을 잇는 조상으로 언급될 때, 이 하나님의 이름이 다윗 왕조의 혈통의 순수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하실 때도 많이 언급된다. 하나님의 이름 ‘야훼’(YHWH)는 구약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위대하시다, 강하시다, 반석이시다, 깃발이시다, 아도나이시다’ 등 하나님의 모든 호칭들보다 뛰어난 이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절대 주권의 하나님의 이름’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 ‘거룩하신’이름이 구약의 윤리적 사상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욥기 38장부터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물으시는 말을 핵심을 정리해보자
“네가 누구관대 나에 대하여 판단하느냐?”
“네가 선과 악을 네가 아느냐?”
인간의 복과 재앙,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상대적이면서 제한적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통하여 모든 선과 악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과 논쟁과 질문에 대해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욥은 지극히 실존적이고 실용적인(practical) 관점에서 선과 악을 바라보고 판단했다. 욥의 친구들 역시 무지하긴 마찬가지였다.
욥기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선과 악을 바라보는 인간의 윤리적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진정한 윤리적 관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잠언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 곧 ‘윤리의 기본’이라는 것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네가 선과 악을 아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야훼’(YHWH)께서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안에서 ‘선과 악’, ‘옳고 그름’, ‘무엇이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되는 것은 선이고 벗어나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선과 악이 하나님과 따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과 악이 먼저 있고, 선이 하나님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선과 악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 먼저 존재한다면 이성이 하나님의 위에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절대적 기준이고, 하나님으로 인해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이 간단한 진리가 기독교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도 실천하지 못하거나, 안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행하는 많은 행동 가운데는 하나님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이외의 어떤 것들’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녀 교육이라든가, 교회에서의 제자 훈련 등에는 우리가 좋다고 이미 판단한 것들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다음 우리의 생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거나 언급할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해석과 판단의 잘못된 습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위가 지속된다면, 해석학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우리의 행위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향한 역방향 접근법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지?’
‘하나님의 성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지?’
‘지금 이 행동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거지?’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했을 때, 이러한 질문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지금 이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표현되었는가?’를 역으로 되짚어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특히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경우 신앙을 바탕으로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다.
정미연 박사 (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국 이민 1.5세 출신의 차세대 신학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몰링 칼리지 전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기간 동안에는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지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역한다. 세계침례교연맹, 아태침례교연맹, 로잔회의 세계선교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