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라파엘로 (Raphael, 1483 ~ 1520)의 변화산의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변용 (Trasfigurazione)
변화산의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변용은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유작이다. 현재 이탈리아 로마 시 안에 위치한 바티칸의 바티칸 미술관 피나코테카에 전시되어 있다.

– 그리스도의 변용 (Trasfigurazione)
.제작: 1518 ~ 1520년
.크기: 410 x 279cm
.소장: 바티칸 미술관
가로 279cm, 세로 410cm의 거대한 유채 패널화로 라파엘로가 제자와 조수의 도움 없이 혼자 그리기 시작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림을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라파엘로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성취를 집대성한 걸작으로 모나리자 이전에 16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화였다 (most famous oil painting in the world).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 (이: 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예술가·화가이며, 흔히 라파엘로 (Raffaello)라고 불린다.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인 《아테네 학당》이 특히 유명하다.
만년에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 (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37세로 요절하였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현대 초기 미술을 큐비즘(입체파)이라 하는데, 근대주의 미술의 표본적 그림이라 할 정도도 사실적인 극치가 잘 나타났다. 피카소의 그림이 다방면 입체감이 뛰어난데, 라파엘로 작품 역시 그에 못지않게 입체감이 살아 있고, 특히 원근감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환상적이다.

– 그림의 여정
1515년에 교황 레오 10세의 부재상, 수석 조언자(vice-chancellor and chief advisor)인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는 프랑스 나르본의 대주교였다. 그는 라파엘로에게 나르본 대성당의 제단화 제작을 요청한다. 1516년 12월, 로마에서 레오 10세와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피렌체의 산 로렌초 대성당의 외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와 만났다. 그리고 이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라자로의 부활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드로잉은 하겠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겠다고 했고 결국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절친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리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세바스티아노는 ‘라자로의 부활’을 완성했고 그 그림은 현재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각각 시스티나 경당과 교황의 방에 그린 그림으로 경쟁했던 것처럼 간접적인 2차전이 된 셈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 로마 고대 유물 발굴의 총 책임자, 도시 계획가로 매우 바빴던 라파엘로는 1518년 7월까지 그림을 시작하지 못했다.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그림에 착수하면서 제자와 조수의 도움 없이 혼자 그리기로 결심했다. 작업을 시작하고 열정적으로 매달렸으며 그림은 여러차례 변형을 거쳐 마침내 최종 모습에 다다랐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폐렴으로 사망한다. 라파엘로 사후 며칠 동안 그의 머리맡에 ‘그리스도의 변용’이 놓여있었으며 1주 후 바티칸에서 전시되었다. 1972-76년에 그림을 복원할 때 확인된 사실은 그림의 대부분을 라파엘로가 완성했으며 왼쪽 아래의 일부만 제자들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 판정되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이 그림을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본래 목적지였던 나르본으로 보내지 않았고 자신이 소장하기로 했다. 추기경은 조반니 바릴레에게 액자를 조각하게 하여 그림을 보관했다. 그리고 교황이 되자 로마의 몬토리오에 있는 산 피에트로 성당 제단에 그림을 옮겨 걸었다. 그리고 그림의 사본은 라파엘로의 제자 조반 프란체스코 페니에게 명하여 나폴리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림은 1774년에 스테파노 포치에 의해 모자이크로도 만들어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왼쪽 끝 복도 회랑 제대에 걸려 있다. 세바스티아노의 ‘라자로의 부활’은 예정대로 나르본으로 갔다.
1797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바티칸에서 예술품을 압수해 파리로 가져가기로 했다. 1799년 2월에는 교황 비오 6세와 조약도 체결하여 압수를 공식화한다. 전문가 위원회는 당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여겨진 라파엘로의 가능한 모든 그림을 수집품에 포함시켰고 ‘그리스도의 변용’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1797년 그림은 루브르로 옮겨져 전시된다. 위원회를 이끌던 장 바티스트 위카 (Jean-Baptiste Wicar)는 신고전주의 화가였으며 다른 위원인 장 그로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였다. 1801년에 루브르의 그랑 갤러리에서 대규모의 라파엘로 전시회를 열어 라파엘로의 그림 20여 점이 전시된다. 1810년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을 묘사한 벤자민 직스의 그림에도 ‘그리스도의 변용’이 보인다.
그림이 대중에 공개되며 프랑스와 영국의 화가들은 라파엘로의 그림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다비드와 그로, 앵그르는 프랑스의 예술적 이상을 라파엘로의 그림에 두며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영국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그림을 보고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로서의 첫번째 강의의 주제를 ‘그리스도의 변용’으로 잡았다. 화가 조셉 패링턴은 일기에 이 그림을 보자 다른 1급으로 평가 받는 그림들이 힘과 활력이 부족해보인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1815년에 그림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원래 위치했던 산 피에트로 성당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로마 사도 궁전에 있다가 결국 피타코테카로 이동하여 현재에 이른다. ‘폴리뇨의 성모’, ‘오디 제단화’를 옆에 거느리고 전시되어 있으며 라파엘로 태피스트리도 함께 있다. 피타코테카의 이 거대한 방은 라파엘로의 독무대다.

– 그림 자체에 대해서
그림은 위 아래로 나뉜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큰 삼각형 구도를 이루어 안정적이다. 그림 꼭지점에 위치한 그리스도는 환하게 빛나며 강한 신성을 보여주며 그의 초자연적인 광휘는 우측 멀리 보이는 동틀 무렵의 빛과, 아랫부분의 달빛과 대조를 이룬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여성을 포함한 전경의 인물들의 키아로스쿠로는 제자들의 몸짓과 표정을 강조하며, 신과 인간, 평온과 당혹이 대비되어 더욱 신이 강조되고 있다. 공중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림 최종단계까지 수많은 라파엘로의 숙고 끝에 결정된 것이다. 그림의 구도, 광선, 채색, 입체감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림의 윗부분은 마태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기적 중 하나인 변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 우측의 인물은 선지자 모세이며, 좌측은 엘리야이다. 이들을 대동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앞에 나타났다. 아랫부분은 사도들이 악마에 사로잡힌 (간질 발작) 한 소년을 고치지 못하던 중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치료되는 모습이다. 엎드렸던 소년이 일어나 입을 벌리며 악마가 떠나는 모습을 그린다.
라파엘로는 사라센의 반복적인 공격에서 나르본 시가 구원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변용과 소년의 치유로 묘사했다. 그림 왼쪽 아래의 물에 비친 달빛은 전통적으로 악마에 사로잡힌 것, 간질과 동일시 된다. 그림 하단의 인물들의 양식화되고 뒤틀린 포즈는 라파엘로가 자신이 완성한 하이 르네상스의 절정을 무너뜨리고 매너리즘의 효시가 된 예시중 하나다. 또한 그림의 긴장감과 빛을 활용한 강한 명암 대비는 바로크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의 라파엘로는 빛과 어두움의 강한 대조보다는 조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라파엘로의 이런 변형된 자신만의 스푸마토는 우니오네 (unione)라고 부른다. 조금씩 점점 변화해간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레오나르도보다 더 강렬한 키아로스쿠로를 구사하고 있어 훗날의 루벤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라파엘로의 방’ 초기작인 ‘성체논의’, ‘아테네 학당’처럼 교회와 그리스 철학이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전면에 배치하면서 이상적 세계의 구현을 추구한 과거와도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바사리는 이 그림을 묘사하며 이런 말을 했다. ‘흰 눈과 같이 하얀 옷을 입은 그리스도는 고개를 든 채 양팔을 벌리고 있으며 삼위일체의 위계를 묘사함으로써 라파엘로 예술의 완벽함을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전력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묘사한 듯 하다. 결국 이 작품이 자신의 절필이 되고 말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변용’은 명화가 가져야만 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 변화산의 그리스도 (c.1519-1520) Oil on panel Vaticano, Pinacoteca Apostolica Vaticano, Rome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 17: 1-5)
이 모든 정황은 그리스도가 선지자, 예비자 교사의 지위를 넘어서는 구속자 즉 메시아 자신임을 선포하나 다름이 없다. 이때부터 마태와 마가의 서술은 보다 극적이고 힘차고 선언적으로 바뀐다. 병자를 치료하는 등의 행적에서 벗어나 이제 엄위하고 힘있는 가르침이 전면에 부상한다. 옥스퍼드 성경지침서에서 지적하듯 복음서 내용은 눈에 띄게 비극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예수님은 이제 점점 홀로 버려지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흩어졌을 때 그 고독은 절정에 달한다. 그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린 작가 라파엘 (Raphael, 1483 ~ 1520)은 그와 동시대의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 ~ 1519), 미켈란젤로 (1475 ~ 1564)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봉을 구가하고 있었다.
여기 취급하는 예수님의 변화는 그의 최후의 작품 (1518 ~ 20)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디자인과 그 집행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책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작품평가에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제기된다. 하나는 라파엘은 그것이 자신의 최후의 작품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직접 완성했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라파엘 필력의 쇠잔함이 드러난 아쉬운 작품이라고 본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기미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다수의견이다. 오히려 풍부한 회화성과 운동감, 현실, 초월성을 고도로 조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림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상부는 초월적 빛에 흠뻑 젖은 공중의 나는 듯한 예수님과 그 옆의 모세, 엘리야가 여전히 동적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하단의 다수 인물들은 제스처가 거칠다. 좌측의 예수님 제자들과 중앙의 여인을 포함하여 우측의 소년병자를 데리고 온 무리들은 치료해 주기를 요구하는 또는 제자들이 치료의 능력을 발휘치 못하는데 대한 어떤 항의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믿음이 부족하고 번쇠한 세상사가 윗부분의 초월적 세계와 대비된다. – 이석우 교수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