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시드니 동갑내기 친구들
최근에 필자에게 카톡으로 질문 하나를 받은 적이 있다. 동고/동락(同苦/同樂) 중에 어느 것이 힘들 것 같은가?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의 요지는 ‘우는 자아와 함께 우는 것이 힘들 것인가? 아니면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하는 것이 힘들것 같은가?’였다. 필자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동락(同樂)이 가장 힘들다고 했더니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인 것 같다고 동의해 주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누구나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진정성을 가지는 친구는 잘 됐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다. 사람은 연민을 갖는 건 쉬워도 질투를 버리기는 어렵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들, 함께 겪은 많은 괴로운 시간들, 순간순간 어긋난 많은 아픔들, 화해, 마음의 격동, 우정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생떽쥐베리).
인간관계에서 공감대를 가진다는 것은 참 중요한 덕목중에 하나다 그래서 감정처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감정을 “욕망/분노/공포/자신/질투/환희/사랑/증오/동경/경쟁심/연민 등 일반적으로 쾌락이나 고통이 따르는 것”(2권5장)이라고 정의한다. 감정의 형식과 결과의 관점에서 감정을 정의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감정에 대해 잘 처신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성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감정을 잘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좋은 성품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과잉 감정반응이나 감정결필, 공감장애는 사람이 가져야 할 덕과도 거리가 멀고 좋은 성품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눈에는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은 결코 좋은 성품의 소유자도 아니고 중용을 지키는 사람도 아니며 덕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필자는 평소에 허물없이 늘 만나던 목사님들이었는데 3년 전에 시드니에서 동갑내기 친구 동역자들로 새롭게 만났다. 사역도 다양하고 취향도 다양해서 늘 만나면 맛난 비빔밥을 나눠먹는 행복을 느끼곤 한다. 공통분모보다 이질적인 것이 더 많은 친구 모임이다. 그래서 더 좋은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또 다른 삶을 나눌 수 있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종 다름에 대한 혹독한 이질감과 아픔도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 또 같이 한 방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에게 삶을 통해서 주고 받는다. 그래서 이견(異見)도 생기고, 불협화음도 있고, 다툼까지 있다. 그러나 끝에는 늘 서로의 눈높이에 맟추기 위해서 서로 격려하고 배려한다. 그런 친구들이 있어 참 행복하다.
친구 사이에 종종 거부감과 오해로 불편함이 있을 때 서로가 참 솔직하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보는 평가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많지 싶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건 노파심일 수 있다. 다양성 속에서 서로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는 동갑내기 친구들을 통해서 배우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불편함이 없는지, 오해는 없는지,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묻지도 따지지 않는다 다만 올곧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는 늘 고민하고 든든하게 토론한다. 그러다 문득 신앙의 자리에서 덕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서는 친구들이 참 존경스럽다.
친구는 제2의 나다(아스트토텔레스). 친구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고 그랬다. 필자는 정말로 그들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종종 물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부끄럽게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형편없는 사람을 조건 없이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친구로 삼아 준 동갑내기 친구들이 참 고맙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