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제 5대 카안, 쿠빌라이 칸 (Qubilai Qa’an, 1215 ~ 1294)
쿠빌라이 카안 (Qubilai Qa’an, 1215년 9월 23일 ~ 1294년 2월 18일)은 대원의 제5대 카안 (재위, 1260 ~ 1294)이자, 칭기스 칸 (Činggis Qan, 1162 ~ 1227)의 손자이다. 본명은 ‘쿠빌라이’, 묘호는 세조 (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는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 (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는 세첸 카안 (Sečen Qa’an)이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다.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 (大元)으로 개칭하고 대도 (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 · 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종족을 실력 위주로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또 한편, 카안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을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 쿠빌라이 세첸 카안 (Qubilai Sečen Qa’an)

.출생: 1215년 9월 23일, 몽골 제국
.사망: 1294년 2월 18일, 대도 (매장지: 부르칸 칼둔)
.연호: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94년
.이름: 휘쿠빌라이 / 묘호: 세조(世祖)
.칸호: 세첸 카안(Sečen Qa’an, 薛禪可汗; 설선 가한)
.존호: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시호: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왕조: 대원 / 가문: 보르지긴
.부모: 부친 – 툴루이, 모친 – 소르칵타니 베키
.배우자: 소예순성황후, 남필 황후
.자녀: 자녀: 친킴, 제국대장공주, 토곤, 코코추 칸, Nangjiazhen, Wuluzhen, 아야치 황자, 후게치 외
.종교: 티베트 불교
*지위: 몽골 카안
.재위: 1260년 5월 5일 ~ 1271년 12월 18일
.대관식: 중통(中統) 원년 3월 24일
(1260년 5월 5일)
*지위: 대원 카안
.재위: 1271년 12월 18일 ~ 1294년 2월 18일
.대관식: 지원(至元) 8년 11월 15일
(1271년 12월 18일)
.전임: 뭉케 카안 / 후임: 테무르 울제이투 카안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로 묘호는 세조 (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휘는 보르지긴 쿠빌라이 (Borǰigin Qubilai, 孛兒只斤 忽必烈; 패아지근 홀필렬 혹은 흘필렬). 고려 원종의 사돈, 충렬왕의 장인, 충선왕의 외할아버지. 계국대장공주의 증조 할아버지. 또한 덕녕공주는 쿠빌리아 카안의 4세손이 된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4남이자 전대 카안 (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동생.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카안이자 원나라의 시조다.
1260년, 카안 자리에 올라 카간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부카와의 내전을 벌여 1264년에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 아리크부카 세력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 그래도 쿠빌라이 카안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 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 이러한 영광이 있지만 카미카제 대삽질로도 유명하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카안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추진력이 없어졌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군주이기도 하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수흐바타르 광장에서는 오고타이 칸과 함께 앉아있는 칭기즈 칸의 동상을 양 옆에서 호위하는 식으로 쿠빌라이의 동상이 서 있다.
○ 생애
– 생애 초반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의 넷째 아들이며 몽케 칸의 동생이었다.
1251년부터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이때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정벌을 맡겼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 정복 준비와 대리국 정벌
그는 자신의 영지인 경조 (京兆), 산시성 (陝西省) 시안(西安)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 (雲南省)에 있던 대리국 (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1253년 가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 (大理城)을 정복했다. 그러나 정복 직후인 1254년 초 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 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들을 감지하고 되돌아가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에게 이 지역의 위수 (衛戍)를 맡겼다. 대도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7년 몽케 칸의 지휘 아래 출정에 참여하여 남송 공략을 준비하였으나 1259년 몽케가 갑자기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몽케 칸의 전사 소식과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크 부케가 스스로를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복귀하였다.
– 즉위 초반
.아리크 부케의 도전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 (上都)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 (Kuriltai, 大會議)를 임의로 개최하여 몽골족 부족장들을 소집, 그해 5월 5일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리크 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고 쿠빌라이를 찬탈자라 공격하였다. 후에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시비, 논란은 그의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까지 날조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거절하고 끝까지 항거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었다.
.파스파 문자 제정
파스파 문자 (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 (元) 국사 (國師)인 파스파 (八思巴)가 쿠빌라이 (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 · 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 (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정복 활동
.고려 복속
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제1차 일본 원정 실패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 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송 정복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 (臨安; 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 (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 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과 티베트를 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월남 공략 실패와 2차 일본 원정 실패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북방 지역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하였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또한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참파 공략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는 성과를 올렸다.
– 생애 후반
계속 된 정벌과 정복 사업의 강행으로 젊은 장정들이 사라져 노동력이 황폐해졌고, 군비 조달로 인한 재정난의 증대는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인들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는데, 이슬람교도 출신 서역 상인들과 위구르인 상단 등 주로 색목인 (色目人) 계통의 상인들의 중국 진출을 허용함과 동시에 이들 색목인 출신 신흥 관료를 발탁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와 그의 사주를 받은 두아 등 고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79세를 일기로 대도에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 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과 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에 뛰어났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 작품
일본에 보내는 친필 국서 (1264년)
○ 가족관계
조부 : 추존황제 태조(太祖) 칭기스 칸
조모 : 추존황후 광헌익성황후(光獻翼聖皇后) 옹기라트씨
아버지 : 추존황제 예종(睿宗) 툴루이 칸
어머니 : 추존황후 헌의장성황후(顯懿莊聖皇后) 케레이트씨
– 형제
뭉케 칸 – 몽골 제국의 4대 대칸
훌라구 – 일 칸국의 초대 대칸
아릭 부케- 몽골제국의 대립 대칸
– 후비
.제1오르도
첩고륜 대황후(帖古倫 大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원비(元妃)
.제2오르도
소예순성황후(昭睿順聖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정후(재위 : 1260년 ~ 1281년) , 본명은 찰필(察必)
남필 황후(南必 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계후(재위 : 1283년 ~ 1294년)
.제3오르도
탈랄해 황후(塔剌海 皇后)
노한 황후(奴罕 皇后)
.제4오르도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
.그 외
속가답사 황후(速哥答思 皇后)
백요올진 황후(伯要兀眞 皇后)
활활륜 황후(闊闊倫 皇后)
알자사 황후(斡者思 皇后)
욱실진 황후(旭失眞 皇后)
타로별진 황후(朶魯別眞 皇侯)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팔팔한 비자(八八罕 妃子)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아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올내홀내 비자(兀乃忽乃 妃子)
– 자녀
.아들
도르지 황자(朶兒只 皇子) – 소예순성황후 소생. 요절함
명효태자(明孝太子) 진금(眞金) – 소예순성황후 소생. 원나라 제2대 황제 성종(成宗)의 아버지
진왕(秦王) 망갈라(忙哥剌, ? ~ 1280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북안귀정왕(北安歸定王) 노무간(那木罕, ? ~ 1292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운남왕(雲南王) 후게치(忽哥赤, ? ~ 1271년)
아야치 황자(愛牙赤 皇子)
서평왕(西平王) 오그룩치(奧魯赤, ? ~ 1303년)
영왕(寧王) 쿠쿠추(闊闊出, ? ~ 1313년)
진남왕(鎭南王) 토곤(脫歡, ? ~ 1301년)
쿠틀룩테무르 황자(忽都魯帖木兒 皇子)
테미치 황자(鐵滅赤 皇子) – 남필 황후 소생. 요절함
.딸
조국대장공주(趙國大長公主) 월렬(月烈) – 생모미상(生母未詳), 조무양왕 애불화(趙武襄王 愛不花)에게 하가(下嫁)
창국공주(昌國公主) 오로진(吾魯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패화(孛花)에게 하가(下嫁)
창국대장공주(昌國大長公主) 다륜(茶倫) – 생모미상(生母未詳), 첩감간(帖監干)에게 하가(下嫁)
노국장공주(魯國長公主) 완택(完擇)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라진(斡羅眞)에게 하가(下嫁)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낭가진(囊家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랄진(斡剌眞), 첩목아(帖木兒), 만자태(蠻子台)에게 하가(下嫁)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생모(生母)는 야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고려 충렬왕 왕거(高麗 忠烈王 王昛)에게 하가(下嫁)
공주(公主) – 남송 공제 조현(南宋 恭帝 趙㬎)에게 하가(下嫁)
○ 쿠빌라이 칸 관련 작품
《호조 토키무네》 (2001년, NHK 대하드라마) – 파삼찰포(巴森扎布)
《무신》(2012년, MBC)
《칭기즈칸의 후예 (建元风云)》(2013년, 후난위성TV)
《마르코 폴로》(2014년-, 미국 넷플릭스)
○ 평가

몽골에서는 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영웅의 한사람으로 존경받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애산 전투 직후 남송의 군사들과 귀족들을 학살, 남송을 잔인하게 멸망시킨 학살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탐원공정과 동북공정 이후에는 그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서 그에 대한 중국내의 평가는 달라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고려를 복속화시킨 침략자의 한사람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였으나, 1990년대 이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 고려와의 관계
고려 원종은 내전 도중에 즉위 전의 쿠빌라이에게 접근했다. 항복하러 가던 중에 몽케 칸이 죽었는데, 쿠빌라이가 즉위하리라 보고 일부러 쿠빌라이에게 접근하였다는 말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종은 쿠빌라이와 여몽전쟁을 끝내고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돌아와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권을 되찾았다. 흥미롭게도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를 고구려(고려) 그 자체(후신)로 생각하여, “당태종도 못 정복한 고(구)려의 후손이 제발로 항복했다”며 좋아했다고. 당시만 해도 아리크 부카와 대권 경쟁 중이었고, 정통성 측면에서 아리크부카 쪽이 좀 더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40년이나 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와서 항복해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보태서였다. 대외적으로 쿠빌라이 쪽을 계승자로 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고려가 속절없는 모습인 듯하자 “고구려가 강력하다고 했건만 고려는 어찌 이리도 나약하단 말인가?”라고도 말했다. 전자의 고구려 관련 발언에 비해 사람들이 이 말은 잘 모르는데, 카다안의 침입 자체가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딸 제국대장공주를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보내 고려의 왕비가 되게 했다. 사실 이건 몽골에게 있어서 굉장히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원종이 제안했다고 하지만 원나라에서 황금씨족 직계 공주는 본래 몽골인하고만 혼인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고려 왕족만은 유일한 예외로 자기 막내딸을 고려 왕비로 만든 것이다.
제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을 낳았다. 충선왕은 외가인 원나라에서 오래 지내며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쿠빌라이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고려 왕비 (제1비)의 자리를 원나라 여황족이 차지했다.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면,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가 대단했다.
이때 쿠빌라이가 고려에 약속한 ‘세조구제’ (世祖舊制)로 고려는 몽골에 40년이나 대항하고서도 직할 통치를 안 받은 유일한 나라였다.
의외로 원 간섭기 시절에도 몽골이 고려에 끼친 영향력은 정치적인 영향력 외에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대체로 몽골은 자국이 정복한 나라를 향해서 이른바 6사라는 6가지 조건을 관철시키는데 그 6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호구 조사를 할 수 있게 할 것.
.몽골군에 식량과 조부를 바칠 것.
.몽골군의 정복 활동에 군사를 지원해 동참할 것.
.다루가치를 주둔하게 할 것.
.역참을 설치하도록 할 것.
그런데 이 6가지 조건 중에서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은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입질 정도밖에 없다. 먼저 다루가치는 원 간섭기 초반인 충렬왕 대에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왜냐하면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속국들의 경우, 다루가치가 속국의 왕들보다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속국을 좌지우지하는데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고려의 경우에는 국왕이 원황제의 부마이기 때문에 다루가치보다 그 서열이 높았다. 때문에 다루가치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또 군사를 지원하라는 조군 역시 충렬왕 때 2차례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역참 설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호구 조사와 조세 수납은 고려의 완강한 반대로 아예 건들지도 못했다. 당시 고려는 이것마저 공개할 경우 몽골에 벌거숭이처럼 모든 걸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해 구우일모의 예까지 들어가며 반대했다. 그래서 몽골은 당시 고려의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 경제 규모가 어떤지 군사력은 어떤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몽골은 고려 국왕과 장인-사위의 관계를 형성해 한 가족으로 묶는데 성공했고 그를 통해 정치적으로 고려를 자국에 예속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관제를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군사기구 역시 손을 대는 등 상부 구조 지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하부 구조에는 극히 제한적인 영향력밖에 행사하지 못했다. 호구 조사부터 고려의 반대로 아예 해보지도 못했으니 그 이상의 지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세조구제’는 그 뒤로도 원나라에 고려를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