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경 목사 칼럼

환자의 섬 1
2010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셔터 아일랜드’를 보았다. 한국어 제목은 환자의 섬으로 번역되어 있었는데, 그 제목이 마음속에 깊은 울림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 전체가 거대한 환자의 섬과 같은 곳은 아닐까? 목회자로서 내 안에 자리한 영적 본능은 이 질문을 단순한 호기심에서 멈추지 않게 했다. 오히려 환자의 섬 같은 세상 속에서, 정작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영적 정체성을 상실한 채 무기력한 가운데 환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은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라고 규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신경증적이고 소외된 삶을 살고 있으며, 정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 전체가 병리적 구조 속에 있다고 진단했다. 즉, 특정한 개인만 환자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환자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y) 역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같은 작품에서 인간 사회를 죄와 광기,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도덕적으로 병든 집단으로 묘사했다. 그의 눈에도 이 세상은 거대한 병동, 곧 환자의 섬처럼 보였다.
영화 속 주인공 테디는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아내는 정신적 불안정으로 인해 세 아이를 호숫가에서 익사시키는 비극적인 일을 저지른다. 충격에 빠진 테디는 아내를 총으로 쏴 죽이고, 이후 죄책감과 상실감 속에서 트라우마와 더불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TSD)를 앓는다. 그는 악몽과 환각에 시달리며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기 정체성을 분열시켜 살아간다. 실제의 자신, 곧 아내를 죽인 살인자로서의 자아는 무의식 깊이 억눌러 버리고, 대신 정의를 수호하는 보안관이라는 가짜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자아 분열은 내적 정체성 붕괴로써 병리적 현상이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소나라는 사회적 자아의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 개인이 사회에 적응해 나갈 때 필요한 기능이다. 두 개념은 현상과 기능적 차원에서 다르지만, 페르소나에 과도하게 매몰되면 자아가 약화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칼 융은 (Carl Jung)은 이러한 현상을 ‘자아와 페르소나의 동일화’라고 불렀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쓰는 가면이지만 자아가 페르소나와 지나치게 동일시될 때, 사람은 자기 내면의 무의식과 본능, 감정과 점점 단절된다고 경고했다. 결국 사회적 역할이 곧 자기 존재하고 착각하게 되며, 그 역할이 무너지는 순간 극심한 혼란과 위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흔히 나타난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자녀 양육에 몰두하던 부모가 자녀 독립 후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경우가 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고 공허함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는 내면과 외면의 불균형이 깊어지면서 자기 본연의 삶을 잃어버린 비극적 단면이다. 이런 페르소나의 문제는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향 땅에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들의 삶 속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민자의 짐을 싸서 도착한 이 새 땅은 한인 이주민에게 모든 것이 새로운 삶의 터전이다. 언어와 문화와 삶의 방식뿐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낯설다. 마음을 열어놓고 다가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그러니 새롭게 도착한 이민자들에게 이 땅은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기에 최적화된 장소가 된다. 모든 것을 페르소나라는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된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이런 양상은 더욱 심화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존심 상할 일 없이 매사에 페르소나를 사용하여 자신의 속 마음을 내놓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교회 출석과 예배의 형식을 갖추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는 진실한 신자의 정체성이나 영적 성숙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부분 종교적 위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 (S. Kierkegaard)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신앙의 심미적·윤리적 단계에 머문 상태다. 바울 역시 이러한 신자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며,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로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책망했다(히 5:12–14 참조).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페르소나를 쓰고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은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환자의 섬은 고립과 단절의 장소이다. 그러나 성경은 고립의 공간을 단순한 절망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특별한 자리가 될 수 있다. 죤 번연 (John Bunyan)은 12년의 감옥생활이라는 섬 같은 시간을 보내며, 인류 신앙의 고전 천로역정을 기록했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이라는 유배지에서 요한계시록의 계시를 받았다. 인간의 눈에는 버려진 섬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은혜와 계시의 장소였다.
우리 인생 속에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환자의 섬’이 존재한다. 고독과 상실, 사회적 단절, 질병과 고난으로 인해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이러한 고립의 경험은 단순한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도 없는 그 자리에서도 임재하시며, 고난의 섬을 은혜의 동산으로 바꾸신다. 외딴섬은 버려짐의 상징일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이주민의 삶 속에서 이러한 ‘섬의 경험’은 더욱 선명하다. 이방인으로 취급받으며 언어와 문화의 장벽 속에서 차별과 편견을 겪는 순간, 이주민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고립된 외딴섬에 놓여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버려진 것 같은 존재를 오히려 새롭게 세우시고 그 고난을 통해 성숙으로 이끄신다.`
다음 글에서는 환자의 섬 1에 언급한 심리학 용어를 간단하고 알기 쉽게 신앙적 이론과 융합하여 설명하는 글을 쓸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심리학과 상담에 관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신앙과 사고의 영역을 넓혀 가보자는 시도가 담겨 있습니다.

박만경 목사
(시드니 우림교회 담임, Iona Trinity College 상담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