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4. 문제기(文帝記)
반고의 한서-본기의 네 번째 기록.
문제기(文帝記)는 전한의 제5대 황제의 기록으로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유항(劉恆), 아버지가 바로 한고조 유방이다. 유방의 넷째 아들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고황후 박씨로 그의 정실부인은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사망했는데, 한문제는 어째서인지 그녀를 황후로 추존하지 않았다. 그의 황후로 유명한 효문황후 두씨는 원래 후궁이었는데 후에 정실부인이 된 경우다.
대나라 왕을 자칭한 진희의 난이 진압된 후 대나라 왕에 봉해졌다. 나중에 여후가 자결한 동생 조공왕을 대신해 대나라보다 크고 부유한 조나라 왕위를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여후가 죽자 여씨 일가를 몰아내고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원래 서장손인 제왕 유양이 유력한 계승자였으나, 주발과 진평 및 종실들은 외가에 별 문제가 없고, 사람됨이 모나지 않았던 대왕을 선택하였다. 한문제는 이후 제왕의 봉지를 늘려주었다.
○ 문제기(文帝記)

효문황제(孝文皇帝)는 고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박희(薄姬)이다.
고조 11년(BC 196), (고조가) 진희(陳희)를 주살하고 대(代) 땅을 평정함에, 문제를 세워 대왕(代王)으로 삼아 중도(中都)에 도읍케했다. 17년(BC 180), 고후가 붕어하니, 여러 여씨(呂氏)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유씨(劉氏)들을 위해코자 하였다. 승상 진평 태위 주발 주허후 유장 등이 같이 그들을 주살하고 모의하여 대왕을 (제위에) 세웠다. 이 말이 <고후기>와 <고오왕전>에 있다.
대신들이 마침내 사람을 보내 대왕(代王)을 영접하게 했다. 낭중령(郎中令) 장무(張武) 등이 의논하여 모두 말하길 “한의 대신들은 모두 옛 고제 때의 장수들로, 군대의 일에 익숙하고 모략하고 속이는 것이 많으니, 그 본래 뜻은 여기에 단지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며, 특히 고제와 여태후의 친척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벌써 여러 여씨들을 주살해 경사(京師)에서는 새로이 핏물(血)를 건너다니는 형편인데, 대왕(大王)을 맞이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으니 실로 믿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병을 칭탁하여 가지 마시고, 그 변화를 살피소서”라 했다.
중위(中尉) 송창(宋昌)이 나아가 가로되 “군신(群臣)들이 의논한 것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무릇 진(秦)나라가 실정(失政)하자, 호걸들이 모두 기의해 사람들마다 스스로 뜻을 이뤘다가 여긴 자 가 수만이었지만, 끝내 천자의 지위에 오른 자는 유씨이며, 천하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이것이 첫번째 입니다. 고제와 번왕(藩王)의 자제들은 마치 그 땅들이 개의 이빨(犬牙)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소위 반석 위의 종묘라는 것이요 천하가 그 강성함에 복종하니, 이것이 두번째 입니다. 한(漢)이 흥기(興起)하자, 진나라의 번거롭고 가혹한 법을 없애고 법령을 줄여 덕과 은혜를 베푸니, 사람들마다 스스로 편안해하여 동요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세번째 입니다. 무릇 여태후가 혹독함으로써 여러 여씨들을 세워 3명을 왕을 삼고, 권력을 천단(擅斷)하고 전제(專制)하였으나, 태위가 한 개의 부절을 갖고 북군으로 들어가 한번 호령하자, 병사들이 모두 좌단(左袒)하고 유씨를 위하고 여러 여씨들에 반(反)하여 마침내 그들을 주살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하늘이 내리신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지금 대신들이 비록 변란을 일으키고자 하여도 백성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것이니, 그 무리들이 어찌 한가지 사악한 일이라도 오로지 할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는 주허후(朱虛侯) 동모후(東牟侯) 같은 친척들이 있는데다, 밖으로는 오(吳) 초(楚) 회남(淮南) 낭야(琅邪) 제(濟) 대(代)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합니다. 바야흐로 이제 고제의 아들은 오직 회남왕과 대왕(大王)만 있을 뿐이며, 대왕께선 또한 장성하시었고, 현명하고 성철(聖哲)하시며 인자하고 효제(孝悌)하시어, (그 명성이) 천하에 알려져, 그래서 대신들이 천하의 민심으로 인하여 대왕을 맞이해 세우고자 하는 것이니, 대왕께선 의심치 마소서”라 했다.
대왕이 태후에게 이를 알리고, 그 계책을 미루고 결정치 않았다.
이를 점쳐보니, 대횡(大橫)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점괘에서 “대횡하여 경경(庚庚)하니, 내가 천왕(天王)이 되어, 하계(夏啓)가 비춰준다(大橫庚庚, 余爲天王, 夏啓以光)”라 하였다. 대왕이 말하길 “과인이 이미 왕이 되었는데, 또 무슨 왕이란 말인가?”라 하였다.
복인(卜人)이 가로되 “소위 천왕이란 것은 곧 천자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대왕은 태후의 아우 박소(薄昭)를 보내 태위 주발을 만나보게 하니, 주발 등이 왕을 맞아 세우려는 까닭을 모두 말하였다. 박소가 돌아와 보고하길 “믿을 만 하며, 가히 의심할 바는 없습니다”라 하였다. 대왕이 웃으며 말하길 “과연 공(公;송창)의 말과 같소.”라 하였다.
이에 송창은 수레에 함께 타게 하고, 장무 등 6명이 탈 수레 6대를 내어 장안으로 향하였다. 고릉(高陵)에 이르러 멈추고선, 송창에게 먼저 장안으로 가서 그 변화를 살피게 했다.
송창이 위교(渭橋)에 이르자, 승상 이하가 모두 맞이하였다. 송창이 돌아와 보고하니, 대왕이 이에 나아가 위교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들이 배알하며 칭신(稱臣)하니, 대왕이 하배(下拜)하였다.
태위 주발이 나아가 이르되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라 하니, 송창이 말하길 “말하려는 것이 공적인 것이면 공적으로 말하고, 사사로운 것이라면 왕자(王者)에겐 사사로움은 없소.”라 했다. 태위 주발이 이에 무릎꿇고 천자의 옥새를 올려바쳤다. 대왕이 사양하며 이르되 “저(邸; 제후왕들이 도성에 가지고 있는 자기 사택)에 가서 의논하겠노라”고 했다.
윤월 기유일, 대저(代邸)로 들어갔다. 여러 신하들이 따라 와 의논한 바를 말씀 올리길 “승상 신(臣) 진평, 태위 신 주발, 대장군 신(臣) 시무(柴武), 어사대부(御史大夫) 신 장창(張蒼), 종정(宗正) 신 유영(劉영), 주허후 신 유장, 동모후 신 흥거(興居), 전객(典客) 신 유게(劉揭)는 재배(再拜)하며 대왕 족하께 말씀드립니다. 아들(子) 유홍(劉弘) 등은 모두 효혜황제의 아들이 아니니, 종묘를 받들기에 부당합니다. 신들이 삼가 음안후(陰安侯; 고조의 형인 유백(劉伯)의 아내), 경양후(頃王后; 고조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내), 낭야왕(琅邪王 ; 유택劉澤), 열후 및 2천석 관리들과 의논한 바를 청하옵니다. 대왕은 고황제의 아들로 의당 후사(後嗣)가 되십니다. 원컨대 대왕께선 천자의 위에오르십시오”라 했다. 대왕이 가로되 “고제의 종묘를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이오. 과인은 그럴 만한 재목이 되지 못하여 맞지 않소. 원컨대 초왕(楚王; 고조의 아우)을 청하여 알맞은 자를 헤아려 보시오. 과인은 감히 (그 자리를) 당해내지 못하오”라 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리며 간곡히 청하였다. 대왕이 서쪽으로 향해 사양하길 3번, 남쪽으로 두번 사양했다. 승상 진평 등이 모두 가로되 “신들이 엎드려 이를 헤아려 보건대, 대왕께선 고조의 종묘를 받들기에 가장 적합하고, 천하의 제후와 만백성들마저도 모두 의당하다고 여깁니다. 신 등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헤아린 것이니, 잊지 말아주십시오. 원컨대 대왕께선 신 등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신은 삼가 천자의 옥새와 병부(兵符)를 받들어 상(上)에게 거듭 접하옵니다”라 하였다.
대왕이 가로되 “종실과 장상 왕 열후가 과인이 합당하다 여기니, 과인이 감히 사양할 수 없도다”라 하고 천자에 즉위했다.
군신들이 차례대로 시종하였다. 태복(太僕) 관영과 동모후 흥거에게 먼저 궁궐을 깨끗이하고, 천자의 예법에 맞는 수레(法駕)를 받들고 대저(代邸)로 마중오게 했다. 황제가 즉위한 날 저녁 미앙궁에 들어갔다. 밤에 송창을 배(拜)하여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아 남 북군을 거느리고 하고, 장무를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아 궁전 안의 일을 살펴 행하게 했다.
돌아와 전(殿) 앞에 앉아 조칙을 내려 가로되 “승상과 태위 어사대부에게 제조(制詔)하노라. 그 사이 여러 여씨들이 용사(用事)함에 권력을 오로지하고, 대역(大逆)할 것을 모의해 유씨의 종묘를 위협코자 하였으나, 장상과 열후 종실 대신들에 힘입어, 그들을 주살하고 모두 그 죄를 복주(伏奏)케 하였다. 짐이 처음 즉위하였으니,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을 하사하되, 여자이면 100호마다 소와 술을 하사하여, 5일간 먹고 마시게 하라.”고 했다.
원년(BC 179) 겨울 10월 신해일, 황제가 고묘에 가 알현하였다. 거기장군(車騎將軍) 박소를 보내 대(代)에서 황태후를 맞아오게 하였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전일에 여산이 스스로 상국이 되고 여록은 상장군이 되어, 임의로 장군 관영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치게 해 유씨를 위해코자 하였다. 관영이 형양(滎陽)에 머물며, 제후들과 합종하며 여씨를 주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여산이 불선(不善)한 짓을 하려하자,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 등이 여산 등의 군대를 뺏을 것을 모의하였다. 주허후 유장이 먼저 여산을 참수했다. 태위 주발은 평양후(平襄侯) 기통(紀通)을 거느리고 부절을 지니고 조칙을 받들어 북군으로 들어갔다. 전객 유게는 여록의 인수를 빼앗았다. 태위 주발은 식읍 1만 호(戶)을 더 봉하고, 금 5천 근을 하사하라. 승상 진평과 장군 관영에게 식읍을 각각 3천 호에 더 봉하고, 금 2천 근을 하사하라. 주허후 유장과 평양후 기통에게 식읍을 각각 2천 호 더 봉하고, 금 1천 근을 하사하라. 전객 유게를 봉하여 양신후(陽信侯)로 삼고, 금 1천 근을 하사하라.”고 하였다.
12월, 조(趙)나라 유왕(幽王)의 아들 수(遂)를 세워 조왕으로 삼고, 낭양와 유택(劉澤)을 옮겨 연왕(燕王)으로 삼았다. 여씨가 제와 초에서 뺏은 땅은 모두 돌려 주었다. 수노(收奴)와 상좌(相坐)의 율령을 모두 없앴다.
정월, 유사(有司)가 태자를 일찍 세울 것을 청하며, 이는 종묘를 높이기 위함이라 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이 부덕하여 상제(上帝) 신명(神明)에겐 아직 흠향(歆饗)치 못했고, 천하의 백성들의 뜻을 채워주지 못했다. 이제 급히 천하의 현성(賢聖)한 자 중 덕이 있는 사람을 구해 천하를 선위(禪位)하지 못하고 있는데, 미리 태자를 세우라고 하니, 이는 나의 부덕함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 뭐라고 이르겠는가?
이는 천천히 할 것이다”라 했다.
유사가 말하길 “미리 태자를 세우는 것은 종묘사직을 중히 여기는 까닭이오니, 천하의 바램을 잊으시면 안됩니다”라 했다.
상(上)이 말하길 “초왕(楚王)은 나의 작은 아버지로 나이가 많으시고, 천하의 의리를 겪어보심이 많으시고, 국가의 예법에 밝으시다. 오왕(吳王)은 짐에게 있어 형이고, 회남왕(淮南王)은 짐의 아우로 모두 덕을 겸비하여 짐을 도우니, 어찌 (그들도 태자위에) 참예치 않겠는가! 제후·왕과 종실의 곤제(昆弟) 중에 공신이 있고, 많이 어질며 덕의(德義)가 있는 자가 있으니, 만약 덕이 있는 자를 천거해 짐의 무능함을 돕게 한다면, 이것이 곧 사직의 영명(靈明)함이요, 천하의 복이로다.
지금 그런 자를 뽑아 천거하지 않고 반드시 (짐의) 아들이어야 한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짐이 어질며 덕있는 자를 잊어서 오로지 자식에게만 전위한다고 여길 것이니, 이는 천하를 걱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짐은 결코 이를 취하지 않으리라”라 했다.
유사가 굳게 청하여 가로되 “옛날 은(殷)·주(周)란 나라가 있어 편안히 다스린 것이 모두 각각 천년으로, 천하에(국운(國運)이 이보다) 긴 나라가 없사온데, 이런 방법을 썼습니다.
후사를 세움에 반드시 아들로 세우는 것은 그 먼 미래를 따르는 바입니다. 고제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시어 제후들을 세우고 황제가 되셨으니, 곧 태조(太祖)입니다. 제후·왕·열후들도 비로소 봉국을 받아 모두 그 나라의 국조(國祖)가 되었습니다. 자손이 제사를 이어 세세토록 끊어지지 않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입니다. 그래서 고제께선 이 법을 세워 해내(海內)를 위무(慰撫)하셨습니다. 지금 의당한 후사를 놔두고 다시 제후나 종실에서 뽑는 것은 고제의 뜻이 아닙니다. 다시 의논함은 맞지 않습니다. 아드님 계(啓)는 가장 나이가 많고, 돈후하며 인자하니, 청컨대 세워서 태자로 삼으시옵소서.”라 했다. 상이 이에 그 말을 허락했다. 이 때문에 천하의 백성들 중에 마땅히 아버지의 후사가 되는 자에겐 작 1급씩 하사했다. 장군 박소(薄昭)를 봉하여 지후(지侯)로 삼았다.
3월, 유사가 황후를 세우길 청했다. 황태후가 말하길 “태자의 어미인 두씨(竇氏)를 황후로 삼으라”고 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바야흐로 봄이라 화창한 때여서, 초목과 뭇 생명들에겐 모두 스스로 즐거워하는 기쁨이 있는데, 나의 백성들 중 홀아비나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鰥寡孤獨)같이 곤궁한 이들은 혹은 더러 죽을까 위태로운데, 이들을 살펴 걱정해 주지 못했으니, 백성의 부모된 이로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진대(賑貸)해 줄 방도를 의논하라”고 했다. 또 이르길 “노인은 비단(帛)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고,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 올해부터는 불시에 늙은 어른들을 살펴 문안하케 하라. 또 베와 비단, 술과 고기를 하사함이 없었으니, 장차 어찌 천하의 자손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것을 도왔다고 하겠는가? 지금 듣자하니, 관리들이 응당 죽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주는 것을 묵은 곡식(陳粟)으로 한다 하는데, 어찌 늙은이를 봉양하는 뜻이라 칭하겠는가! 이에 대한 조령(條令)을 갖추어 만들라.”고 했다. 유사가 청하여 현(縣)과 도(都)에 영을 내리매, 나이가 80 이상이면 사람마다 매월 쌀 1 석(石)과 고기 20 근, 술 5 말(斗)을 하사했다. 그 나이가 90 이상이면 또한 비단 2필과 솜 3근을 (더?) 하사했다. 하사한 물품 및 응당 주어야 할 쌀과 죽은 (현의) 장리(長吏)가 이를 검열하고, 승(丞)이나 위(尉)는 직접 가보게 했다. (나이가) 90이 차지 않았으면, 색부(嗇夫)나 영사(令士)가 가보게 했다. 2천석 관리는 도리(都吏)를 파견해 순행하면서, 조칙의 뜻과 같지 않게 행하는 자가 있는 있으면, 그를 벌하게 했다. 형을 받은 자 및 죄가 있는데 내(耐;노역형) 이상인 자에게 이 조령을 쓰지 않았다.
초(楚) 원왕(元王) 교(交)가 훙했다.
4월, 제와 초에 지진이 일어나, 29개의 산이 같은 날 무너지고, 큰 물이 터지고 솟아올랐다.
6월, 군국(郡國)에 영을 내려 내헌(來獻)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천하에 은혜를 베푸니, 제후와 사이(四夷)가 원근(遠近)에서 기뻐하며 화합했다.
이에 대(代)에서 올 때 공이 있는 자를 치하하여 조를 내려 가로되 “바야흐로 대신들이 여러 여씨들을 주살하고 짐을 맞이하려 할 때, 짐이 의심스러워 하니 모두 짐에게 관두게 하였는데, 오직 중위 송창만이 짐에게 권하여, 짐이 종묘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송창을 높여 위장군으로 삼았는데, 그를 봉하여 장무후(壯武侯)로 삼노라. 짐을 따라온 6명은 모두 관직이 구경(九卿)에 이르게 하라.”고 했다. 또 이르길 “열후 중 고제를 따라 촉(蜀)·한(漢)으로 들어간 68명에게 각자 식읍 3백호씩을 더해주라.
2천석 이상 관리 중 고제를 따라간 영천(潁川) 군수(郡守) 존(尊) 등 10명에게 6백호의 식읍을, 회양(淮陽)태수 신도가(申屠嘉) 등 10명에겐 식읍 5백호를, 위위(衛尉) 족(足) 등에 10명에겐 식읍 400호를 주라”고 했다. 회남왕(淮南王)의 장인(舅) 조겸(趙兼)을 봉해 주양후(周陽侯)로 삼고, 제왕(濟王)의 장인인 사균(駟鈞)은 정곽후(靖郭侯)에, 옛 상산(常山)의 승상 채겸(蔡兼)은 번후(樊侯)에 봉했다.
2년(BC 178) 겨울 10월, 승상 진평이 훙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이 들으니 옛날에는 제후들이 세운 천 여개 였지만, 각자 제 땅을 지키며, 때에 맞추어 입조하며 헌공하며, 백성들은 힘들게 고생하지 않고, 상하가 서로 기뻐하여 덕에 어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제후들은 많은 이가 장안에 거주하여 제 식읍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졸(吏卒)들은 실어 나르는데 비용이 들고 고역을 치루며, 열후들은 또한 제 백성들을 교화하고 훈계함이 없다. 열후들에게 영을 내려 제 봉국으로 가게하고, 경대부 및(특별히) 조칙으로 머무르게 한 자는 그 태자(?)를 보내라.
11월 계묘일, 알이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이 듣건대. 하늘이 백성을 낳고 그들을 위해 임금을 두어 백성을 기로고 다스리게 하였다 한다. 인주(人主)된 자가 부덕하여 정사를 펴는데 균평(均平)치 않으면, 하늘이 인주에게 재앙을 보여줘 그 잘 다스려지지 않음을 경계한다. 이에 11월에 날이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으니, 하늘에서 그 책망함이 나타난 것으로 무슨 재앙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짐이 종묘를 잡아 보존함에, 이 미묘(微 )한 몸이 사민(士民)과 군왕(君王)들 위에 의탁되었으나.
천하를 다스림이 어지러운 것은 나 한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니, 오직 나이 23세에 집정(執政)함이 마치 내 팔다리를 움직인 것과 같다(원문은 “唯二三執政猶吾股肱也”인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음) 짐은 아래로는 뭇 생명들을 다스려 기르지 못했고, 위로는 삼광(三光; 해·달·별)의 밝음에 누를 끼쳤으니, 그 부덕함이 크도다. 영을 내리노니, 짐을 과실을 모두 생 각해내고 (짐의 언행이) 미치지 못한 것을 알아보아, 짐에게 고하라. 또한 현량방정(賢良方正)하고 능히 직언(直言) 극간(極諫)하는 자를 천거하여, 짐이 미치지 못한 점을 바로잡게 하라. 또 이로 인해 각자 제 직임에 삼가며, 요역과 비용을 감해주는데 힘써 백성을 편하게 하라. 짐은 이미 덕을 멀리까지 미치게 하지 못해, 그래서 불안하여 외방의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질렀는가 생각해보니, 곧 (외적에) 대비해 갖추어 놓음에 아직도 쉬는 일이 없었다. 지금 곧바로 변방에 주둔한 수병(戍兵)을 파하거나 또 병사의 두터운 호위를 정돈할 수 없으니, 위장군의 군대라도 파하라. 태복은 남아 있는 말의 많고 적음 살펴, 나머지는 모두 역(傳置)에 공급하라.”고 했다.
봄 정월 정해일, 조칙을 내려 가로되 “농부는 천하의 근본이니, 적전(籍田)을 열어 짐이 솔선해 친경(親耕)해, 종묘에 쓰이는 곡식을 대리라. 백성들중 현의 관리에게 죄를 지었거나, 종자나 양식을 빌렸다 아직 내지 못한 자, 내었으나 다 갖추지 못한 자는 모두 사면하라.”고 했다.
3월, 유사(有司)가 황자(皇子)를 세워 제후·왕으로 삼길 청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이전에 조(趙) 유왕(幽王)이 유폐되어 죽었는데, 짐은 그를 매우 가련히 여겼다. 이제 그 태자 수(遂)를 세워 조왕으로 삼으라. 수의 아우 벽강(벽彊) 및 제(濟) 도혜왕(悼惠王)의 아들 주허후 장, 동모후 흥거는 공이 있어 왕이 될 만하다”고 했다. 이에 벽강을 세워 하간왕(河間王)으로, 장을 성양왕(城陽王)으로, 흥거를 제북왕(濟北王)으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해 황자 무(武)를 대왕(代王)으로, 참(參)을 태원왕(太原王)으로, 집(집)을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5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옛날에는 천하를 다스리매. 조정에는 선한 일을 진언하는(進善) 깃대(旌)와 비방을 적는 나무(誹謗之木)이 있었는데, 이는 치도(治道)를 통하게 하고 간하는 자가 오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지금의 법에는 비방과 간언의 죄가 있어, 여러 신하들이 제 마음속의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여, 상(上)이 이로 인해서 과실에 대해 듣는 바가 없다. 장차 어찌 먼 곳의 현량한 자가 오게 하겠는가? 그 법을 없애라. 백성들이 혹 상(上)에게 축문(祝文)을 외워 저주함에, (처음엔) 서로 (이를) 약속하였다가 후에는 서로 속이게 되는데, 관리들은 이를 대역죄로 삼는다. 또 거기에 다른 말이 있으면 관리들은 이를 비방죄로 삼는다. 이 작은 백성들이 어리석어 죽음에 이르는 것인지 모르니, 짐은 결코 이를 취하지 않겠다. 지금 이래로 이를 범하는 자가 있었도 그런 말을 듣고 다스리지 말라.”고 했다.
9월, 처음으로 군수(郡守)들에게 동호부(銅虎符; 동으로 만든 호랑이모양의 부절)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으로 믿고 사는 바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혹 그 근본에 힘쓰지 않고 말단(=商業?)을 섬겨, 그래서 그 삶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 짐이 그런 것을 걱정하였는데, 고금의 어진 어버이는 군신들에 솔선해 농사짓고 이를 권하였다. 천하의 백성들에게 올해의 전조(田租)의 반을 감하라”고 하였다.
3년(BC 177) 겨울 10월 정유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11월 정묘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전일 조칙으로 열후들에게 제 봉국으로 가게 했는데, 아직 그 말이 행해지고 있지 않다. 승상은 짐의 소중한 사람이니, 짐을 위해 열후들에 솔선해 봉국으로 가라”고 했다. 마침내 승상 주발을 면직하고 봉국으로 가게 했다.
12월, 태위 영음후(潁陰侯) 관영(灌 )을 승상으로 삼았다. 태위(太尉)관을 파하고, 승상에게 속하게 했다.
여름 4월, 성양왕 장(章)이 훙했다. 회남왕 장(長)이 벽양후(벽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죽였다.
5월, 흉노가 북지(北地)와 하남(河南)에 들어와 머물며 노략질했다. 상이 감천(甘泉)에 순행(巡幸)하며, 승상 관영을 보내 흉노를 치게 하니, 흉노가 도망갔다. 중위(中尉)·재관(材官)을 내어 위장군(衛將軍)에게 속하게 하고, 장안에 진치게 했다.
상이 감천에서 고노(高奴)로 갔다가 인하여 태원(太原)으로 순행하여 옛 여러 신하들을 보고서 모두에게 하사했다. 공을 들어 상을 내리고, 여러 백성과 마을엔 소와 술을 하사했다. 진양(晉陽)과 중도(中都)의 백성들에게 3년간 세조(歲租)를 면해주었다. 태원에서 10여 일을 머물며 놀았다.
제북왕 흥거(興居)가 황제가 대(代)로 가서 친히 흉노를 치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이에 반란을 일으켜 병사를 내어 형양(滎陽)을 습격하려 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승상의 병사를 파하고, 극포후(棘浦侯) 시무(柴武)를 대장군으로 삼아 장군 4명과 10만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다. 기후(祁侯) 증하(繒賀)를 장군으로 삼아 형양에 진을 치게 했다.
가을 7월, 상이 태원에서 장안에 이르렀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제북왕은 덕을 배반하고 상에게 반역하며, 관리와 백성을 그릇되게 하였으니, 대역(大逆)하다. 제북(濟北)의 이민(吏民)이나 병사 중 아직도 먼저 (취할 행동을) 스스로 정하지 않았거나 성읍에 주둔하다 항복한 자는 모두 사면하고 관작을 회복시켜주어라. (제북)왕과 같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흥거를 버리고 내항(來降)한 자 또한 모두 사면하라”고 했다.
8월, 제북왕 흥거를 사로잡고, (흥거는) 자살했다. 흥거와 같이 반란을 일으켰던 여러 자들을 사면했다.
4년(BC 176) 겨울 12월, 승상 관영이 훙했다.
여름 5월, 여러 유씨들에게 (원래) 속했던 (종실의) 적(屬籍)을 회복시켜주고, 다른 가문에 참예하는 바가 없게 했다. 여러 제후·왕의 아들에게 각자 식읍 2천 호를 하사했다.
가을 9월, 제 도혜왕의 아들 7명을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강후 주발에게 죄가 있어, 붙잡아 정위에게 넘겨 조칙으로 죄를 다스리게 했다(詔獄).
고성묘(顧成廟)를 지었다.
5년(BC 175)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도주전령(盜鑄錢令)을 없앴다. 다시 사수전(四銖錢)을 주조했다.
6년(BC 174)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에 꽃이 피었다.
11월, 회남왕 장(長)이 모반하니, 그를 폐하여 촉(蜀)의 엄도(嚴道)로 옮겼으나, 옹(雍)에서 죽었다.
7년(BC 173) 겨울 10월, 열후의 태부인(太夫人)·부인(夫人), 제후·왕의 아들 및 2천석 관리에게 영을 내려 임의대로 거두고 잡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여름 4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6월 계유일, 미앙궁의 동궐의 처마에서 불이 났다.
8년(BC 172) 여름, 회남 여왕(여王) 장(長)의 아들 4명을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장성(長星; 혜성의 일종)이 동방에 나타났다.
9년(BC 171) 봄, 크게 가물었다.
10년(BC 170) 겨울, 감천(甘泉)으로 순행했다.
장군 박소(薄昭)가 죽었다.
11년(BC 169) 겨울 11월, 대(代)로 순행했다. 봄 정월, 상이 대에서 돌아왔다.
여름 6월, 양왕(梁王) 읍(揖)이 훙했다.
흉노가 적도(狄道)를 노략질했다.
12년(BC 168) 겨울 12월, 하수(河水)가 동군(東郡)으로 넘쳐났다.
봄 정월, 제후·왕의 여식들에게 각각 식읍 2천 호를 하사했다.
2월, 효혜황제의 후궁과 미인들을 (궐 밖으로) 보내, 시잡가게 하였다.
3월, 관(關)에서 쓰지 않는 부신(符信)을 없앴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백성을 다스리는 길은 근본에 힘쓰는 것에 있다. 짐은 친히 천하에 솔선하여 농사를 지은 지 올해로 10년이다. 그러나 들에는 더 개척한 땅이 없고, 올해는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에겐 굶주린 기색이 있으니, 이는 농사일을 좇음이 아직도 적고, 관리들은 더 힘쓰지 않아서이다. 내가 수차례 조서를 내려 해마다 백성들에게 씨뿌리고 심을 것을 권했는데, 그 공이 아직 일어나지 않으니, 이는 관리들이 나의 조칙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고, 백성들에게 권한 것이 분명치 않아서이다. 또 나의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 하는데도, 관리들은 그들을 살피지 않는다 하니, 어떻게 (농사일을) 권하겠는가? 농민들에게 금년의 조세(租稅)의 반을 감해주라”고 했다.
또 가로되 “효제(孝悌)는 천하의 큰 순리이다. 역전(力田)은 삶을 위한 근본이다. 삼로(三老)는 뭇 백성의 스승이요, 청렴한 관리(廉吏)는 백성의 표상이다. 짐은 이 여섯(二三) 대부의 행실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지금 만가(萬家)의 현에서는 영에 응하는 바가 없고 하는데, 어찌 실제로 사람의 정이 그렇게 야박하겠는가? 이는 관리들이 현자를 천거하는 방법이 아직 갖춰지지 않아서이다. 알자(謁者)를 보내 위로하되, 삼로와 효도한 자에게 사람마다 비단(帛) 5필, 형제간에 공경한 자(悌)와 역전에겐 2필을, 염리(廉吏)로서 (질) 2백석 이상부터 매 1백석의 비율로 3필씩 (더) 하사하라. 또한 백성에게 물어 편안치 못한 곳에서는 호구수의 비율을 따져 삼로·효제·역전의 상원(常員)을 늘리고, 영을 내려 각자가 짐의 뜻을 헤아려 백성을 인도케 하라”고 했다.
13년(BC 167) 봄 2월 갑인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은 친히 천하에 솔선하여 농사짓고 밭갈아서 곡식과 제기를 종묘에 바치고, 황후는 친히 누에쳐서 제복(祭服)을 봉헌하니, 그에 대한 예법과 의식을 갖추라”고 했다.
여름, 비축(秘祝)을 없애니, 이 말이 <교사지(郊祀志)>에 있다.
5월, 육형(肉刑)의 법을 없애니, 이 말이 <형법지>에 있다.
6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농사는 천하의 근본으로, 일 중에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지금 자신이 부지런히 농사에 종사하는데, 조세(租稅)의 부(賦)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본말(本末)에 다를 게 없다고 하는 것으로, 권농하는 방법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그 전조(田租)를 없애라. 천하에 고아·과부에게 베와 비단과 솜을 각각 하사하라”고 했다.
14년(BC 166) 겨울, 흉노가 변방을 노략질하고, 북지(北地)의 도위 앙(앙)을 죽였다. 세 장군을 보내 농서(농西)·북지·상군(上郡)에 진치게 하고, 중위 주사(周舍)를 위장군으로, 낭중령 장무(張武)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 수레 1천 대와 기·보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위수(渭水) 북쪽에 진을 치게 했다. 상이 친히 군대를 위로하고, 병사를 통솔하여 교령(敎令)을 약속하고, 이졸(吏卒)들에게 물품을 하사했다. 상이 직접 흉노를 정벌코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황태후가 상에게 간곡히 요청하니, 이에 그쳤다.
이에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으로, 건성후(建成侯) 동혁(董赫)과 내사(內史) 난포(欒布)를 모두 장군으로 삼아 흉노를 치게하니. 흉노가 달아났다.
봄,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이 희생(犧牲)과 규폐(珪幣)를 잡고 상제와 종묘를 섬긴 것이 지금까지 14년이다. 지내온 날은 오래되었는데, 불민(不敏)하고 명석치 못하면서 오래동안 천하에 진무하며 임하였으니, 짐 스스로 매우 부끄럽다.
여러 제사지내는 단장(壇場)을 넓히고 규폐를 늘려라. 옛날 선왕은 멀리 베푸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빌지 않았으며, 현자를 오른쪽에 두고 친척은 왼쪽에 두며, 백성을 먼저 하고 자신은 나중으로 하였으니, 지극한 밝음(至明)의 극치로다. 이제 내가 들으니 사관(祠官)이 복을 축원하면서, 모두 짐에게 그 복을 돌리고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 하니, 짐은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무릇 짐이 부덕하여 오로지 혼자서 아름다운 그 복을 향하고 백성들과는 같이 함께 하지 않으니, 이는 나의 부덕함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사관에게 영을 내려 공경함을 다하게 하고, 복을 비는 바가 없게 하라”고 했다.
15년(BC 165) 봄, 황룡이 성기(成紀)에 나타났다. 상이 이에 조칙을 내려 교사(郊祀)를 의논케했다. 공손신(公孫臣)이 복색을 밝히고, 신원평(新垣平)은 오묘(五廟)를 설치했다. 이에 대한 말이 <교사지>에 있다.
여름 4월, 상이 옹(雍)에 순행하여 처음으로 교외(郊外)에서 오제를 뵙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명산 대천에 일찍이 제사를 지내다 끊어진 곳을 수리하고, 유사는 세시마다 예를 다하게 했다.
9월, 제후·왕과 공경·군수에게 조서를 내려 현량하고 능히 직언 극간하는 자를 천거하게 하여, 상이 친히 그들에게 물어보고, 진언하는 바를 받아들였다. 이 말이 <조조(조錯)전>에 있다.
16년(BC 164) 여름 4월, 삼이 위양(渭陽)에서 오제(五帝)에게 교사(郊祀)하였다.
5월, 제 도혜왕의 아들 6명과 회남 유왕의 아들 3명을 세워 모두 왕으로 삼았다.
가을 9월, 옥배(玉杯)를 얻었는데, 그 새겨진 글에 “인주가 오래살다(人主延壽)”라 적혀있었다. 천하에 영을 내려 크게 어울려 술마시게 하고, 다음해 개원(改元)하였다.
후원년(後元年)(BC 163) 겨울 10월, 신원평이 속인 사실일 발각되자, 모반하니, 3족을 주살하였다.
봄 3월, 효혜황후 장씨(張氏)가 훙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근자에 수년간을 견줘 보니 곡식이 익지 않고, 또 홍수와 가뭄, 역질의 재변이 있어 짐이 이를 매우 걱정하노라. 어리석고 명석치 못해, 그 허물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未達其咎) 그 뜻은 짐의 정사에 실수가 있고 행실에 잘못이 있다는 것인가? 이에 천도(天道)가 불순하고 혹 지리(地利)를 얻지 못하며, 인사(人事)엔 화목함을 잃은 것이 많고 귀신을 폐하여 흠향치 않아서인가? 어찌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백관들이 봉양함에 혹 허비하였으며, 쓸모없는 역사가 많았는가? 어찌 백성의 의식이 적고 궁핍한가?
무릇 전지(田地)를 헤아려보면 더 줄어든 게 아니고, 호구를 계산해 보면 더 늘어 난 것도 아니며, 호구로 전지를 헤아려보면 옛날보다 오히려 남음이 있는데, 그 식량이 심히 부족하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백성이 말업(末業; 상업)에 종사하여 농사를 해치는 자가 많고 술을 빚어 만드느라 곡식을 없애는 자가 만으며, 육축(六畜)이 먹어치우는 것이 많아서인가? 세세하면서도 큰 뜻은 짐이 그 핵심을 알지 못하니, 승상과 열후 및 2천석 관리·박사들이 함께 의논하여 백성을 도울 만한 것이 있으면, 앞장서서 멀리까지 생각하고, 숨기는 바가 없이 하라”고 했다.
후 2년(BC 162) 겨울, 옹(雍)의 역양궁(역陽宮)으로 갔다.
6월, 대왕(代王) 참(參)이 훙했다. 흉노와 화친했다. 조칙을 내어 가로되 “짐이명석치 못해 더을 널리 펴지 못하니, 방외(方外)의 나라들이 혹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사황(四荒)의 바깥에선 그 삶을 편안히 하지 못하고, 왕이 봉해진 곳 내에서도 부지런히 힘써도 편히 살만한 곳조차 없으니, 이 두가지 허물은 모두 짐의 덕이 박하여 멀리까지 이르게 할 수 없어서이다. 근자의 여러 해 동안 흉노가 또한 변경에서 폭란을 저질러 많은 이민(吏民)들을 죽였는데도, 변방의 신하인 병사와 관리들이 또한 그 속 뜻을 (내게) 알릴 수 없었으니, (이는) 짐의 부덕함이 더 무겁게 한다. 무릇 오래동안 어렵게 병사(兵事)를 이어두었으니, 중외(中外)의 나라들이 장차 어찌 편안해 지겠는가? 지금 짐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밤이 되어야 잠자리에 들고, 천하를 위해 부지런히 애쓰며, 만 백성의 노고를 걱정하고, 이들을 측은히 여겨 편안치 못함이 일찍이 하루도 마음에서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 관(冠)을 벗고 서로 바라보며 길에는 수레가 왕래케 하고자, 선우(單于)에게 짐의 뜻을 알렸다. 이제 선우가 예전의 (화친했던) 길로 되돌아 오니, 사직의 안정을 도모하고 만 백성의 이로움을 편케 하려고, 새로이 짐과 더불어 같이 세세한 허물은 버리고 모두 대도(大道)에 나아가 형제의 의를 맺어, 천하의 착한 백성들을 보전하련다. 화친할 것을 정하였으니, 금년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후 3년(BC 161) 봄 2월, 대(代)로 순행했다.
후 4년(BC 160) 여름 4월 병인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5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관노비를 면천시켜 서인으로 삼았다.
옹(雍)으로 행차했다.
후 5년(BC 159) 봄 정월, 농서(농西)로 순행했다.
3월, 옹으로 순행했다.
가을 7월, 대로 순행했다.
후 6년(BC 158) 겨울, 흉노 3만 기(騎)가 상군(上郡)에 침입하고, 3만 기는 운중(雲中)에 침입했다. 중대부(中大夫) 영면(令免)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비호(飛狐)에 주둔케 하고, 옛 초의 상(相)인 소의(蘇意)를 장군으로 삼아 구주(句注)에 주둔케 하며. 장군 장무(張武)는 북지(北地)에 주둔케 하고, 하내(河內)태수 주아부(周亞夫)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細柳)에 머물게 하고, 종정(宗正) 유례(劉禮)를 장군으로 삼아 패상(覇上)에 머무르게 하고, 축자후(祝玆侯) 서려(徐려)를 장군으로 삼아 극문(棘門)에 머무르며 흉노에 대비케 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의 재변이 있었다. 제후에게 영을 내려 입조하여 헌공하지 않게 했다. 산택(山澤)의 금령을 없앴다. 여러 복식과 어거(御車)에 관한 조항을 줄였다. 낭·리(郎·吏)의 인원을 줄였다. 창고의 곡식을 내어백성들을 진휼했다. 백성들이 작(爵)을 팔 수 있게 하였다.
후 7년(BC 157) 여름 6월 기해일, 황제가 미앙궁에 붕어했다. 유조(遺詔)에 이르길 “짐이 듣자하니, 무릇 천하의 만물이 태어나서 죽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한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스러움이니, 어찌 이를 매우 슬퍼하는가! 요즘 세상엔 모두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여, 장례를 후히 지내느라 생활을 피폐케 하니, 거듭 복상(服喪)하는 것은 삶을 해치는 것이라 짐은 이를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다. 또 짐은 부덕하여 백성을 도운 바가 없다. 이제 (내가) 죽었다 하여, 거듭 복상을 하고 오래 곡하며, 춥고 더움을 만나기가 여러 차례요, 남의 부자지간의 일을 슬퍼하게 하고, 장로(長老)들의 뜻을 해치며, 그 음식을 줄이며, 귀신의 제사를 끊게 하는 것은 내 부덕함을 무겁게 하는 것이니 천하에 뭐라 하겠는가? 짐이 종묘를 보존하게 되매, 이 작디 작은 몸으로 천하 군왕(君王)의 위에 의탁된 지가 20여 년이다. 하늘의 영험함에 힘입어, 사직은 복되고 방내(方內)는 안녕하여, 병혁(兵革)의 일이 없었다. 짐이 불민(不敏)해 항상 행실에 잘못이 있어, 선제의 유덕(遺德)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다. 이렇게 생각한 세월이 오래되었지만, 그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에 다행히 천수(天壽)를 다하고, 고묘(高廟)에 다시 봉양할 수 있었으니, 짐이 비록 명석치 못했으나, 이는 경사스런 일이니, 어찌 애통한 생각이 있겠는가! 천하의 이민(吏民)들에게 영을 내려, 이 영이 도착하면 3일만 상복입고 곡하게 한후, 다 상복을 벗게 하라. 아내를 얻고, 시집을 가거나, 제사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게 하지 말라. 자기가 응당 상사(喪事)에 복상을 입고 곡해야 하는 자에겐 물품을 주어 모두 맨 발로 나 다니는 일이 없게 하라. 상복의 허리띠는 3촌(寸)이 넘지 않게 하라. 수레 및 병기(兵器)를 설치케 하지 마라. 백성을 동원해 궁전 중에서 곡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 궁전 중에서 상복입고 곡해야 하는 자는, 모두 아침저녁으로 각 50명씩만 소릴 내고, 그 의례(儀禮)를 반드시 끝내라. 아침저녁의 곡할 때가 아니면, 임의로 곡하는 것이 없도록 금하라. 하관(下官)을 한 후엔 대공(大功)은 15일, 소공(小功)은 14일, 가는 베옷을 입는 자(纖)은 7일만 상복을 입고,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으라.
달리 이 영에 일일이 해당됨이 없는 자는 모두 이에 비견하여 행하라. 이를 천하에널리 알려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패릉(覇陵)의 산천(山川)을 이것 때문에 개수하는 일이 없게 하라. 부인(夫人)이하로 소리(少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제 집으로 돌려 보내라.”고 했다.
영을 내어 중위 주아부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속국(屬國) 한(悍)은 장둔(將屯)장군으로, 낭중령 장무를 복토(復土)장군으로 삼아, 가까운 현에서 군졸 1만 6천 명을, 내사(內史)의 군졸 1만 5천 명을 내되, 곽(郭)을 묻고 복토하는 일은 장군 장무에 속하게 하였다. 제후·왕 이하로 효제·역전에 이르기까지 금·전(錢)·비단(帛)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했다.
을사일, 패릉에장사지냈다.
찬(贊)하여 가로되 “효문황제는 즉위한 지 23인데, 궁실이나 원유(園유)·거기·복식과 어가 등을 더 더한 것이 없었다. (백성이) 불편한 게 있으면, 문득 폐지하고 (금령을) 풀어줘 백성에게 이롭게 하였다. 일찍이 노대(露臺)를 짓고자 하여, 장인을 불러 (비용을) 계산케 해 보니, 1백 금(金)이 나갔다. 상이 이르길 “1백 금이면, 중인(中人; 평균적인 집) 열 집이 생산하는 것이다. 내가 선제(先帝)의 궁실을 받들게 되어 항상 이마저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는데, 어찌 (새로이) 노대를 짓겠는가!”라 했다. 몸에는 검은 명주옷를 입고,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은 옷이 땅에 끌지 않게 하고, 휘장(?帳)에도 무늬를 수놓지 않아, 순박함을 보여 천하를 먼저 위하였다. 패릉을 짓는데 모두 와기(瓦器)만 쓰고, 금·은이나 동·주석(錫)으로 꾸미지않고, (패릉에 있는) 산을 이용해 커다란 무덤(墳)을 일으키지 않았다.
남월왕(南越王) 위타(尉타)가 스스로 위(位)에 올라 황제라 했으나, 위타의 형제를 불러 귀하게 여기고, 덕으로 그를 감싸니, 위타가 마침내 신하라 칭하였다. 흉노와 더불어 화친을 맺었는데, 후에 흉노가 배신하고 침입해 노략질하니, 변경에 영을 내려 수비하게 하고 병사를 내어 깊이 들어가지 않으니, 백성을 번거롭게 할까 두려워했다.
오왕(吳王)이 병이 났다고 속이고 입조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궤장(궤杖;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원앙(袁앙) 등 여러 신하들이 간하고 말하는 것이 비록 절실하여도, 늘 임시로 빌어 받아들여 썼을 뿐이었다. 장무 등이 금전을 수뢰(受賂)하다 발각되니, 다시 상과 하사품을 더해주어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였다. 오로지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데 힘쓰니, 이로써 해내(海內)가 부유해지며, 죄인을 처단한 것은 겨우 수백이니, 형벌을 내림이 이와 같았다. 아아, 인자하도다!
* 참고할 내용
– 전한 문제
.지위: 전한의 제5대 황제
.재위: 기원전 180년~기원전 157년
.전임: 소제
.후임:
.부친: 고조
.모친: 효문태후
.배우자: 효문황후
한 태종 효문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은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이다. 고제의 사남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즉위 전 대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효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치지를 이룩하였다.
– 즉위 전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스스로 대나라 왕[代王]을 일컬으며 한나라에 모반을 일으킨 진희가 고제에게 결정적인 패전을 당한 후 대나라 왕으로 봉해졌고 태원군을 더 받아 태원군 진양현(晉陽縣, 지금의 산시 성 타이위안 시)에 도읍을 두었다가 얼마 후 중도현(中都縣, 지금의 산시 성 핑야오 현)으로 옮겼다. 왕후 왕씨(王氏)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고, 사랑하는 첩 두씨(효문황후)에게서 계, 무 두 아들을 두었다. 적모 여태후와 그 일족이 통치하던 여태후 7년(기원전 181년)에는 후사가 끊긴 조공왕 유회 사후 조왕 후보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대나라에 머물렀다. 여태후 8년(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고 주발 · 진평 · 제애왕 · 성양경왕(당시 주허후) 등이 여씨 세력을 토벌하면서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원래는 제애왕을 황제로 세우기로 했었으나 유택 등의 대신들이 제애왕의 외가 사씨가 여씨와 같이 될 것을 꺼려 어머니 박씨의 세력이 약한 대왕이 추대되었다.
– 문경의 치(文景之治)
문제는 인군으로 안정과 검약을 실천하였다. 후세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를 자랑하려 할 때, ‘나의 정치가 과연 한의 문제만 한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에 옮긴 현군이다. 특히 문제의 통치철학은 한 초에 유행하였던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사상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리하여 진의 시황제(始皇帝)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위적인 무리한 정치를 피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순리에 따라 정사를 펴나갔기 때문에 진시황제 이래 혹독하게 시달려 오던 백성들이 안정을 취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주의 정치가인 가의(賈誼)가 건의한 치안책(治安策)은 문제의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정책면에서는 고조(高祖) 시대의 지조인 15분의 1세를 30분의 1로 감축하였고, 만년에는 토지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백성의 요역을 경감하고 진 이래의 악법인 연좌제와 신체에 고문을 가하는 육형(肉刑)을 폐지하였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를 통해 문제 시대에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의 통치는 중국 역대의 절대군주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하여 대외원정이나 대토목 사업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인위적인 정치가 아니라 무위의 정치로 백성을 쉬게 한 안정화 정책이었다. 일례로 BC 174년에 있었던 회남왕 유장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박사인 가의나 조조(鼂錯)는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키는 강간약지정책(強幹弱枝政策)을 내세워 제후왕의 영지를 삭감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후국과의 힘 겨루기로 이어져 애써 이룩한 민생의 안정을 흔들 것으로 판단하여 제후왕과의 대결을 피하고 종래의 군국제(郡國制)를 유지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景帝)도 대체로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리하여 문제ㆍ경제 재위 40년간(BC 180~BC 141)의 안정화 정책으로 황폐한 농촌사회는 휴식을 취하면서 생산력을 증가시켜 국력이 회복되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같은 문경 시대의 사회적 번영과 경제력의 회복은 다음에 오는 무제(武帝)시대의 막대한 국가운영과 대외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던 재정과 군사비 조달의 배경이 되었다.
○ 평가
.지극한 효심
도덕적인 군주로 평가되고 있으며 어머니 박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한다.
.법률 재정해 선정
12월에 조서를 내렸다. “법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올바른 기준이다. 이제 법을 범하여 이미 판결이 나고서 죄 없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까지 이에 연좌시켜서 처자를 잡아들이기에 이르니 짐은 아예 채택하지 않겠다. 그 자식을 잡아들이고, 여러 사람이 연좌되는 율령을 없앤다.”(자치통감-13권)
정월, 담당 관원들이 진언해 말했다.
“태자를 일찍 세우는 것은 종묘를 받들어 모시려는 까닭입니다. 청컨대 태자를 세우십시오.”
(중략)
황제가 대답했다.
“초왕은 [짐의] 막내 작은아버지로 연세가 높아 천하의 이치를 보고 들은 게 많으며, 국가의 대체적 강령에도 밝소. 또한 오왕은 [짐의] 형으로 은혜롭고 어질며 덕스러운 것을 좋아하오. 회남왕은 [짐의] 동생으로 덕을 겸비해 짐을 보좌하고 있소. 이들이 어찌 미리 세운 후계자가 아니겠소! 제후왕, 종실, 형제 및 공신 중에 현명한 데다 덕과 의리를 갖춘 자가 많으니, 만약 덕을 갖춘 자를 선발해 짐이 끝마칠 수 없는 일을 돕게 한다면, 이는 사직의 은총이며 천하의 복이라 할 수 있소. 지금 그들을 선발해 등용하지 않고 기어코 내 아들이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짐이 어질고 덕 있는 자들을 잊고서 제 자식에게만 마음을 두고 천하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오. 짐은 정말 이렇게 하고 싶지 않소.”
대체로 듣건대 유우씨(有虞氏) 때에는 죄를 지으면 의관에 그림을 그리고 특이한 복장을 입게 해 치욕으로 삼게 했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에서 그랬겠는가? 지극하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은 육형(肉形)이 셋이나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각박하고 밝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짐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럽다. 교화의 방법이 순수하지 못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죄로 빠져드는구나. 『시』에 말하기를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을 먼저 가하니, 간혹 잘못을 고쳐 선을 실천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짐은 이 점을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하노라.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 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히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부덕한 것인가. 어찌 이것이 백성의 부모 된 자의 뜻에 걸맞은 것이겠는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사기-효문본기)
.국력강화
경제와 더불어 한나라의 국력을 흉노의 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같은 책에서 언급도는 손자인 무제에 비해 적은 편인데, 이는 극단적으로 대외사업을 자제하여 후세에 자랑할만한 뭔가 크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 크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큰 대외사업은 결국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일이다. 무제가 멋있고 폼나는 흉노와의 전쟁에 장장 40년간 매달려, 나중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어져나가 엄청난 수준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소비한 것에 비하면 크게 대조된다.
그렇다고 군사 문제에 깜깜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흉노와 전쟁을 벌일 때면 적을 쫓아내는 건 허락하되 역으로 쳐들어가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은 막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장군들은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으나죽어나는건 결국 병사들물론 이러한 한문제도 비판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문제의 언행이 명성을 얻기 위한 가식이라는 주장도 있고, 경제 복구 와중 호족과 대상인 세력들이 불법과 탈법을 통해 자라나는 것에 대해 정책적인 감시와 제재를 하지 않은 채 너무 무위지치적 태도를 보인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말년에는 뱃사공 출신인 등통이라는 자를 총애해 등통이 굶어죽을 운명이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절대 굶어죽지 않게 하겠다며 등통에게 화폐 주조권을 사사로이 내려주는 실책도 범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조권은 훗날 경제가 몰수해갔고 등통은 그 예언대로 감금되어 굶어죽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한문제는 모든 군주들이 꿈꾸는 태평성대를 실현한 인물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과장은 좀 있겠지만 이시기 백성들은 모두가 부유해져서 땅바닥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왕조 초기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세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후대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견되기도 한다.
○ 문제와 말(馬)
‘서경잡기’에 따르면, 한문제는 모두 아홉필의 준마를 얻었는데, 모두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마들이었다고 한다.
말의 이름은 각각 부운(浮雲), 적전(赤電), 절군(絶群), 일표(逸驃), 자연(紫燕), 녹이총(錄離驄), 용자(龍子), 인구(鱗驅), 절진(絶塵)이었다. 이 아홉 필의 말들을 문제는 ‘구일(九逸)’이라고 불렀고 말을 모는 사람은 ‘왕량(王良)’이라고 불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