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5. 경제기(景帝記)
반고의 한서-본기의 다섯 번째 기록.
경제기(景帝記)는 한 효경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 기원전 141년)에 대한 기록으로 전한의 제6대 황제. 문제(文帝)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황후(孝文皇后)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선정을 행하여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또한 후한 왕조의 창시자인 광무제와 삼국 시대의 촉의 창시자 유비는 자신들의 조상을 경제의 태자라고 칭했다.
○ 경제기(景帝記)

효경황제(孝景皇帝)는 문제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두황후(竇皇后)이다. (문제)
후 7년(BC 157) 6월, 문제가 붕어하였다. 정미일, 태자가 황제위에 올라, 황태후 박씨(薄氏)를 높여 태황태후라 하고,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하였다.
9월,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
원년(BC 156) 겨울 10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릇 듣자하니 옛날에 조(祖)에겐 공(功)이 있고 종(宗)에겐 덕(德)이 있어, 예악을 제정하는데 각각 유래가 있었다 한다. 노래(歌)는 덕을 일으키는 까닭이고, 춤(舞)은 공을 밝히는 까닭이다. 고묘에 술을 올릴 때, ‘무덕(武德)’·’문시(文始)’·’오행(五行)’의 춤을 연주하라. 효혜묘에 술을 올릴 때, ‘문시’·’오행’의 춤을 연주하라. 효문황제가 천하에 임어(臨御)하시매, 관량(關梁)을 소통케 하고, 원방(遠方)을 달리 여기지 않으셨다. 비방죄와 육형을 없애고, 장로들에게 상을 하사하며, 고아와 자식없는 늙은이(孤·獨)를 거두어 진휼하심이 뭇 생명들에게까지 이르렀다. 기욕(嗜慾)을 줄이고, 헌상하는 것을 받지 않으시고, 죄인의 형벌이 처자에까지 미치지 않으며, 죽을 죄라도 주살치 않고, 그 이로움을 사사로이 하지 않으셨다. 궁형(宮刑)을 없애고, 미인(美人)을 궁 밖으로 내보내며, 뛰어난 사람을 중히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重絶人之世也). 짐이 불민하여 이를 능히 다 알지 못한다. 이 모두는 옛 제왕들도 미치지 못했던 것인데, 효문황제께서는 친히 이를 행하셨다. 덕이 두터운 것이 천지와 같고, 이로움과 은택(恩澤)을 사해에 베푸시니, 그 복은 잡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 밝음은 일월에 본받으셨으나, 묘악이 적절치 않아 짐이 매우 걱정하는 바이다. 효문황제를 위해 ‘소덕(昭德)’의 춤을 만들어, 그 아름다운 덕을 밝혀라.
그래서 사직과 조종의 공덕이 만세에 퍼져 영원토록 무궁하다면 짐이 매우 기쁠 것이다.
승상·열후·중2천석 관리·예관이 예의(禮儀)를 갖추어 주달하라”고 했다. 승상 신도가(申屠嘉) 등이 주청하길 “폐하께선 오래동안 효의 도를 생각하시어, ‘소덕무’를 정해 효문황제의 성하신 덕을 밝히려 하시는데, 신 신도가 등이 모두 어리석어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의논해 보았는데, 세상이 공이 고황제보다 큰 것은 없고, 덕이 효문황제보다 성한 것이 없습니다. 고황제묘는 의당 황제된 자의 태조(太祖)의 묘가 되고, 효문황제묘는 의당 황제된 자의 태종(太宗)의 묘가 됩니다. 천자는 마땅히 세세토록 조종의 묘에 봉헌해야 합니다. 군국과 제후들은 마땅히 각각 효문황제를 위해 태종의 묘를 세워야 합니다. 제후·왕과 열후는 관리를 보내어 천자가 조종의 묘에 헌수하는 것을 시종하여 돕게 해야 합니다. 청컨대 이를 천하에 반포하소서”라 하니, 제(制)하길 “가(可)하다”고 했다.
춘 정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요사이 몇 년 간 (전과) 비견해보니 곡식이 여물지 않아,백성들은 먹을 것이 많이 모자라, 일찍 죽어 제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니, 짐은 이를 매우 애통해 하는 바이다. 군국(郡國)이 혹 땅이 거칠고 좁아 농상(農桑)을 짓거나 가축을 기를 곳이 없는데, 혹 어떤 땅은 넓고 넉넉하여 풀은 우거지고 무성하며 수천(水泉)이 이로운데도, 이사할 수가 없다. 백성들이 넓은 땅으로 옮기고자 하는 것을 의논해 이를 들어주라”고 했다.
여름 4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백성들에게 작 1급 씩 하사했다.
어사대부 청적(靑翟)을 보내 대(代) 아래 이르러 흉노와 화친케 했다.
5월, 영을 내려 전조(田租)를 반으로 감해주었다.
가을 7월, 조칙을 내어 가로되 “관리가 감독하는 임지에서 음식을 받으면 파면하고 무겁게 처리하는데, 재물을 받거나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은 가벼이 논한다. 정위와 승상은 이와 관련된 영(令)들을 다시 의논하라”고 했다. 정위 신(信)이 승상과 더불어 의논하여 이르길 “관리나 여러 작질(爵秩)있어 그 관속(官屬)을 받은 자가 감독하거나 다스리거나 안찰(行)하거나 병사를 거느리는 곳에서 뇌물을 받아 함께 먹고 마셨거든 그 비용을 계산하여 배상케 하되 논죄(論罪)하지는 마십시오. 음식 외에 다른 물건으로 싸게 샀다가 비싸게 판 것을 모두 앉아서 숨긴(坐贓) 도적질을 한 것이니, 그 장물을 몰수하여 현의 관부(縣官)에 들이게 하십시오. 그런 관리는 옮기거나 파면하되, 옛 관속의 감독하거나 다스린 곳에서 준 것은 그 재물을 돌려주게 하고, 작을 삭탈하여 사오(士伍)로 삼아 파면하십시오. 작이 없으면 금 20근을 벌금으로 내게 하고, 받은 것은 몰수하여 내게 하십시오. 이런 관리를 능히 잡아 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그 받아 감춘 재물을 주소서”라 했다.
2년(BC 155) 겨울 12월, 혜성이 서남쪽에 나타났다.
천하에 영을 내려 남자 나이가 20세이면 비로소 호적(군적?)에 이름을 올리게(傅) 했다.
봄 3월, 황자 덕(德)을 세워 하간왕(河間王)으로, 알(閼)을 임강왕(臨江王)으로, 여(餘)를 회양왕(淮陽王)으로, 비(非)를 여남왕(汝南王)으로, 팽조(彭祖)를 광천왕(廣川王)으로, 발(發)을 장사왕(長沙王)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임오일, 태황태후(문제 어머니 박태후)가 붕어했다.
6월, 승상 신도가가 훙했다.
옛 상국 소하의 손자 계(係)를 봉해 열후로 삼았다.
가을, 흉노와 화친했다.
3년(BC 154), 겨울 12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양평후(襄平侯) 가(嘉)의 아들 회열(恢悅)은 불효하고 모반하여 가를 죽이고자 했으니, 대역무도하다. 가를 사면해 양평후로 삼고 그의 처자로 연좌당한 자에게 옛 작질을 회복시켜 주고, 회열과 그 처자는 법대로 논죄하라”고 했다.
봄 정월, 회양왕의 궁궐의 정전(正殿)에서 불이 났다.
오왕(吳王) 비(비)·교서왕(膠西王) 앙(앙)·초왕(楚王) 무(戊)·조왕(趙王) 수(遂)·제남왕(濟南王) 벽광(벽光)·치천왕(친川王) 현(賢)·교동왕(膠東王) 웅거(雄渠)가 모두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태위 주아부(周亞父)와 대장군 두영(竇영)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치게 했다. 어사대부 조조(晁錯)를 참수해 7국에 사과했다.
2월 임자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7국을 격파하고, 10만 여명의 목을 베었다. 단도(丹徒)에서 오왕 비를 추격해 목을 베었다. 교서왕 앙·초왕 무·조왕 수·제남왕 벽광·치천왕 현·교동왕 웅거는 모두 자살했다.
여름 6월, 조칙을 내어 이르길 “이번에 오왕 비등이 반역하여 병사를 일으켜 서로 위협하고, 이민(吏民)들을 그르치게 했으나, 이민들은 그만둘 수 없었다. 지금 비등은 이미 멸하였으니, 이민들 중 응당 비등에게 연좌되거나 군대서 도망치다 체포된 자는 모두 사면하라. 초 원왕(元王)의 아들 예(예) 등은 비 등과 같이 역모를 꾀했으나, 짐이 차마 법을 더하지 못하겠으니, 그 적(籍)을 없애 종실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세워 초왕으로 삼아 원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왕자 단(端)을 세워 교서왕으로, 승(勝)을 중산왕(中山王)으로 삼았다.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4년(BC 153) 봄, 다시 여러 관(關)에 용전(用傳; 부신)을 두고 출입케 했다.
여름 4월 기사일, 황자 영(榮)을 세워 황태자로, 철(徹)을 교동왕으로 삼았다.
6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가을 7월, 임강왕(臨江王) 알(閼)이 훙했다.
10월 무술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5년(BC 152) 봄 정월, 양릉(陽陵)읍을 만들었다.
여름, 백성을 모집해 양릉으로 옮기고, 20만전(錢)을 하사했다.
공주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냈다.
6년(BC 151) 겨울 12월, 천둥이 치고 큰비가 내렸다.
가을 9월, 황후 박씨(薄氏)를 폐하였다.
7년(BC 150) 겨울 11월 경인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봄 정월, 황태자 영을 폐하여 임강왕으로 삼았다.
2월, 태위(太尉)의 관직을 없앴다.
여름 4월 을사일, 황후 왕씨(王氏)를 세웠다.
정사일, 교동왕 철을 세월 황태자로 삼았다. 백성들 중 아비의 후사가 되는 자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중(中) 원년(BC 149) 여름 4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옛 어사대부 주가(周苛)와 주창(周昌)의 손자를 봉해 열후로 삼았다.
중2년(BC 148) 봄 2월, 영을 내려 제후·왕이 훙했거나 열후로 처음 뵹해져서 제 봉국으로 가게 되면, 대홍려(大鴻려)가 시호(諡)나 조문, 책문(策)을 주달하게 했다.
열후가 훙했거나 제후·태부(太傅)로 처음에 없어진 관직에 있었던 자는 대행(大行)이 시호와 조문, 책문을 주달하게 했다. 왕이 훙하면,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보내 의복·음식·수레와 말을 주고 조문하며, 상사(喪事)를 살피고, 이로 인하여 그 후사를 세우게 했다.
열후가 훙하면, 대중대부(大中大夫)를 보내 조사(弔詞)하고 상사를 살피며 이로 말미암아 후사를 세우게 했다. 장례 때는 나라에서 백성을 내어 수레를 끌며 땅을 파고 덮을 수 있게 하되, 분묘를 조성하는데 3백명이 넘지 않고 그 일을 끝내게 했다.
흉노가 연(燕)을 침입했다.
책(책)형을 고쳐 기시(棄市)라 하고, 다시는 책형을 쓰지 않게 했다.
3월, 임강왕 영이 태종묘의 땅에 침범한 죄에 연좌돼, 소환되어 중위에게 보내지니, 자살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황자 월(越)을 세워 광천왕(廣川王)으로, 기(寄)를 세워 교동왕(膠東王)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군수(郡守)를 고쳐 태수(太守)라 하고, 군위(郡尉)는 도위(都尉)로 했다.
9월, 예전에 초와 월의 태부(太傅)·상(相)·내사(內史)로 이전에 죽었던 자 4명의 아들을 봉해 모두 열후로 삼았다.
갑술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중 3년(BC 147) 겨울 11월, 제후들의 어사대부 관직을 없앴다.
봄 정월, 황태후가 붕어했다.
여름, 가물어서 술 파는 것을 금했다.
가을 9월, 황충(蝗蟲)이 날아들었다. 혜서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무술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황자 승(乘)을 세워 청하왕(淸河王)으로 삼았다.
중 4년(BC 146) 3월, 덕양궁(德陽宮)을 지었다.
어사대부 위관(衛관)이 말의 키가 5척 9촌 이상으로, 이가 고르지 못한 말은 관(關)을 나갈 수 없도록 금할 것을 주청했다.
여름 황충이 날아들었다.
가을, 도형(徒刑)을 받다 양릉(陽陵)을 지은 자를 사면하고, 사죄에 해당하나 부형(腐刑)을 받고자 하는 자는 이를 허락했다.
10월 무오일, 일식이 있었다.
중 5년(BC 145) 여름, 황자 순(舜)을 세워 상산왕(常山王)으로 삼았다.
6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가을 8월 기유일, 미앙궁의 동궐에서 불이 났다.
제후들의 승상의 명칭을 고쳐 상(相)이라 했다.
9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법령이 도량(度量)인 것은 난폭함을 금하고 사악함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옥사(獄事)는 사람의 큰 명(命)으로, 죽은 자는 되살릴 수 없다. 관리들이 간혹 법령을 받들지 않고 뇌물로 흥정하는데, 그 무리들은 제 주변의 일에 비견하여 가혹함과 각박함을 분명한 것으로 여기니, 망죄(亡罪)인 자가 제상직(常職)을 잃게하니, 짐은 이것이 매우 애처롭다. 죄 있는 자가 자신의 죄를 불복하면 법을 어겨가며 폭력을 행사하니, 말로 할 수조차 없다. 여러 옥사 중 의심스런 것은, 비록 범에 조항이 있더라도 인심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매번 이를 상얼(上얼)하라”고 했다.
중 6년(BC 144) 겨울 10월, 옹(雍)으로 순행하여, 오치(五치)에 제사지냈다.
12월, 여러 관명(官名)을 고쳤다. 전(錢)을 주조하고 황금(黃金)을 위조하면 기시(棄市)형에 처한다는 율을 정했다.
봄 3월, 눈비가 내렸다.
여름 4월, 양(梁)왕이 훙하니, 양 땅을 나눠 5개 나라로 만들고, 효왕(孝王)의 아들 5명을 세워 모두 왕으로 삼았다.
5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릇 관리는 백성의 스승이니, 거가(車駕)와 의복이 그 관직에 합당해야 한다. 6백석 이상이면 모두 장리(長吏; 大夫급)인데, 이를 헤아리지 않는 자가 간혹 관리의 복식을 하지 않고 마을을 출입하니 일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다.
영을 내려, 장리로서 2천석 이상인 관리는 수레 양쪽에 붉은 가리개(번)을 달게 하고, 1천석에서 6백석까지는 왼쪽에 붉은 가리개를 달게 하라. 거가를 따르는 자가 그 관직의 복식에 합당치 않거나 하리(下吏)로서 여항(閭巷)을 출입하는데 관리의 체통을 잃은 자는 2천석 관리가 그 관속을 높여주며, 삼보(三輔; 주작중위·우내사·좌내사)는 법령대로 하지 않는 자를 올리되 모두 위로는 승상이나 어사가 이를 청죄(請罪)하라”고 했다.
이에 앞서 이속(吏屬)들이 군공(軍功)은 많은데 수레나 복식은 오히려 가벼이 여기니, 그래서 이런 금령을 둔 것이다. 또한 오직 혹리(酷吏)들이 법을 받드는데 잘못을 저지르니, 이에 유사에 조칙을 내어 태법(笞法)을 줄이고, 수령(수令)을 정했던 것이다. 이 말이 <형법지>에 있다.
6월, 흉노가 안문(안門)에 침입해 무천(武泉)까지 이르고, 상군(上郡)에 침입해 원마(苑馬)를 약취해갔다. 이졸(吏卒)로서 전사한 자가 2천명이었다.
가을 7월 신해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후 원년(BC 143) 봄 정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옥사는 중요한 일이다. 사람에겐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가 있고, 관직에는 높음과 낮음이 있다. 옥사에 의심스런 것이 있으면 유사에게 상얼하라. 유사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정위에게 넘겨라. 유사가 상얼했는데 나중에 부당한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상얼한 자의 잘못으로 여기지 마라. 영을 내려 옥사를 다스리는 자는 먼저 관대함으로 힘쓰게 하라.”고 했다.
3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하사하며, 2천석 관리 중 제후의 상(相)인 자에게는 우서장(右庶長)의 작을 하사했다.
여름, 5일간 크게 먹고 마시며, 백성들이 술을 살 수 있게 하였다.
5월, 지진이 일어났다.
가을 7월 을사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조후(條侯) 주아부가 하옥되어 죽었다.
후 2년(BC 142) 겨울 10월, 철후(撤侯)들이 제 봉국으로 갔는지 살폈다.
봄, 흉노가 안문을 침입하니, 태수 풍경(馮敬)이 싸우다 전사했다.
거기(車騎)와 재관(材官)을 내어 주둔시켰다.
봄, 이 해에 곡식이 익지 않아, 내군(內郡)에서 말에게 곡식을 먹이는 것을 금하고, (어기면) 그 말을 몰수하였다.
여름 4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늬를 꾸며 새기고 장식하는 것은 농사를 상하게 하는 일이요, 비단을 짜는 것은 아낙의 일을 해치는 것이다. 농사가 상하면 굶주리게 되는 근본이요, 아낙의 일에 해를 입히는 것은 추위에 떠는 원인이 된다. 무릇 굶주림과 추위가 같이 닥치면, 능히 그릇된 일을 하는 자가 적지 않게 된다. 짐이 친히 밭갈고, 황후는 친히 베를 짜서, 종묘에 곡식과 제기, 제복을 봉헌하여 천하에 모범을 보였다.
헌상을 받지 않고 태관(太官)을 줄이며 요부(요賦)를 줄여서, 천하가 농잠에 힘쓰게 하고자 하니, 본래 저축해 놓았던 것으로 재해에 대비케 하라. 강자가 약자에게서 약취함이 없게 하고, 많은 무리가 적은 무리를 해치는 일이 없게 하라. 늙은이가 제 명을 다하고, 어린 고아가 제대로 자랄 수 있게 하라. 올해 혹 곡식이 여물지 않으면, 백성들이 먹는 것이 점차 적어질텐데, 그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혹 거짓으로 속여서 관리가 된 이들이 받은 뇌물이 저자(市)를 이루며, 고기잡듯 백성의 것을 약탈하여 벌레가 쓴 것처럼 만 백성에게 해를 입힌다. 현승(縣丞)과 장리들이 법을 이용해 간사한 일을 하고, (도적과) 함께 도적질을 해 도적이 되는 처지니, 심히 말할 것도 없다. 2천석 관리에게 영을 내려 제 직무를 닦게 하고, 제 관직을 섬기지 않아 손상시키고 어지럽히는 자는 승상이 이를 들어 그 죄를 청하라.”고 했다.
5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사람이 그 알지 못함을 근심치 않다가 그것을 근심하면 속이게 되고, 그 용맹치 못함을 근심치 않다가 그것을 근심하면 난폭해지며, 부유치 못함을 근심치 않다가 그것을 근심하면 만족함이 없게 된다. 오직 염사(廉士) 쉽게 만족코자 하는 것이 적다. 지금 재물(자)이 10산(算; 1산=1만전) 이상이면, 벼슬을 얻을 수 있는데, 염사의 산이 반드시 많지 않다. (장사치가) 시적(市籍)에 있어서 벼슬을 얻지 못하는데, (염사는) 재물이 없어 또 벼슬을 얻지 못하니, 짐은 이를 매우 불쌍히 여기는 바이다. 재물이 4산이면 벼슬을 얻게 해, 염사들이 오래 그 직임을 잃어 큰 이익을 탐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했다.
가을, 큰 가뭄이 들었다.
후 3년(BC 141) 봄 정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
황금이나 주옥(珠玉)은 배고파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으며, 패물로 쓰일 뿐이니, 그 시말을 알지 못한다. 근 여러해 동안 혹 곡식이 여물지 않아, 말업(末業)을 하고자 뜻을 둔 이는 많은데, 농사짓는 백성은 적다. 군국(郡國)에 영을 내려 농삼에 부지런히 힘쓰고, 더 많이 뿌리고 심어, 입고 먹을 수 있게 하라. 관리들이 백성을 내어 만약 황금이나 조목을 캐는 일에 부린다면, 이는 앉아서 감추는 도적질을 하는 것이다. 2천석 관리가 이에 관해 들어면, (도둑과) 같은 죄로 다스리라”고 했다.
황태자가 관례(冠禮)를 치루니, 백성들 중 아비의 후사가 되는 자에게 작 1급씩 하사했다.
갑자일, 황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유조(遺詔)를 내려 제후·왕·열후에게 말8필, 2천석 관리에게 황금 2근, 이민(吏民)들에게 호당 1백전을 하사했다. 궁인들을 내보내 다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종신토록 면조(免租)하게 했다.
2월 계유일, 양릉(陽陵)에 장사지냈다.
찬(贊)하여 이르길 “공자가 ‘이 백성들은 삼대(三代)가 도를 곧게 펴서 행한 까닭이다’라 칭한 것은 믿을 만 하다. 주(周)·진(秦)이 쇠폐하여, 법령이 조밀하고 엄격해져도, 간사한 짓을 저지르는 자를 이길 수 없었다. 한이 흥하자 번잡하고 가혹한 법을 없애고, 백성과 더불어 휴식을 취했다. 효문제에 이르러 이에 공검(恭儉)함을 더하고, 효경제가 그 일을 지키니, 5,60년 사이에 풍속이 바뀌고 뭇 백성이 순수하고 돈후해졌다. 주나라에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을 운운한다면, 한나라에는 문제와 경제를 말하니, 아름답도다!”
………………
* 참고할 내용
중국 전한의 6대 황제. 휘는 유계(劉啓)이고, 문제와 효문황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제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79년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다. 본디 유학을 공부했으나 도교에 심취했던 어머니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성격은 다혈질에 괄괄한 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자면, 공신이었던 주아부, 부친의 측근이었던 등통 등을 죽음으로 몰고간 일화가 있고, 태자 시절 오나라 왕 유비의 세자 유현과 함께 바둑을 두던 중 승부가 잘 안풀리자 홧김에 바둑판을 던져 거기 맞은 유현이 사망한 일화도 있다. 후일 유비가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은 아들을 죽게 만든 경제에 대한 원한도 컸다고 한다.
– 전한 경제
.지위: 전한의 제6대 황제
.재위: 기원전 157년-기원전 141년
.전임: 문제
.후임: 무제
.부친: 문제
.모친: 효문황후
.배우자: 폐황후 박씨 / 효경황후
○ 경제기(景帝記)
– 치세 초기까지
《사기》 외척세가(外戚世家)에 따르면 경제는 문제의 제5황자로 태어났는데, 형 네 사람이 모두 문제가 대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 일찍 사망하고 기원전 180년 아버지가 황제에 올라 생모 두씨가 문제의 정실로 승격되면서 문제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유학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 두씨로부터 도교를 배웠다. 황태자 시절 오왕(吳王) 비(濞)의 세자 현(賢)과 바둑을 두다가 자신이 지게 되자 한 수 물러달라고 했다가 세자가 거절하자, 홧김에 바둑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는데, 이 문제로 한의 중앙 정부와 오왕의 관계가 냉랭해졌으나 문제의 정치적 배려로 사태는 겨우 수습되었으며, 훗날 오초칠국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57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경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정치를 이어받아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농 정책을 펼치고 세금을 줄이는 등 사회 안정을 실현시켰다(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조의 인구 90%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치세를 문제의 치세와 함께 「문경지치」로 칭송하기도 한다.
– 오초칠국의 난
경제의 치세에, 한의 황족·종족(宗族)으로서 봉해진 유씨의 제후왕(諸侯王)이 그 영내의 징세와 관리 임명권 등을 장악하여 그들의 분국(分國)은 거의 반(半) 독립국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조정은 단지 제후국의 승상(丞相)만을 임명할 뿐이었다. 문제 때부터 그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대응은 소극적인 데에 그쳤고(문제 자신부터가 제후왕 출신으로서 황제가 되었다) 근본적인 대책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방침을 이어받으면서도 분국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사대부 조조(晁錯)의 헌책을 받아들여 제후왕의 권력을 줄이는데 착수했고, 제후왕의 사소한 과실을 이유로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에 반발한 제후왕이 몰래 연계, 기원전 154년 오왕 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오초칠국의 난).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했으나, 주아부(周亞夫)의 활약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뒤 경제는 제후국의 승상을 폐지하는 대신 상(相, 제후상諸侯相)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고, 제후왕에게는 현지에서 징수되는 세만을 받았다. 당초 계획했던 제후왕의 권력 삭감에 성공한 것이다.
– 중앙집권 강화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주아부는 이후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갈등으로 승상에서 해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의 측근 위관이 승상으로 임명되었다. 전한 최초로 황제의 측근이 승상으로 임명된 것은 종래 황제의 정책에도 제약을 가할 권력이 주어졌던 원훈(元勳)들과 그 일족에서만 임명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던 승상의 권력이 이때에 와서 크게 저하하고, 반대로 황제의 군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치 대응력과는 반대로 내세와 불로불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경제의 능묘에서 발굴된 호화로운 부장품은 한조의 공식기록에 나오는 「질소검약(質素檢約)」과는 대치되는 것으로, 사망자에 대한 경제적 지출이 허용되었던 사치스러운 시대였음을 방증한다.
경제에게는 박황후가 난 적자가 없었다. 이에 태후 두씨는 경제의 아우인 양왕 무를 다음 황제로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조모인 태황태후 박씨가 기원전 155년에 죽자, 기원전 151년, 경제는 황후 박씨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고, 다음 황후로 가장 총애받던 후궁 율씨(栗氏)가 아닌 다른 후궁 왕씨를 황후로 간택하고 그녀의 소생인 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재위 15년 째인 기원전 14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시안 교외에 위치한 양릉(陽陵)인데, 발굴 현장을 보존하여 현대식 지하 박물관이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과 함께 서안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유적지로 손꼽힌다. 많은 도굴구멍이 있고, 실제로 황금과 보석류의 유물은 거의 도굴되었지만 그 외의 유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었다. 순장 대신 많은 토용들이 발굴되었는데, 인체의 1/5 크기 정도이다.
○ 후손
.사남 노공왕 유여 – 후손 유언, 유표, 유장
.칠남 장사정왕 유발 – 후손 경시제 유현, 광무제 유수
.구남 중산정왕 유승 – 후손 유비
.십일남 무제 유철
전한 황제 중에 가장 많은 아들을 두었다. 아들이 무려 14명이나 된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아버지 닮아 후손들이 많은 편이었다.
수백년 뒤긴 하지만 촉한의 소열제 유비가 경제의 9남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었고, 후한 삼국시대엔 이를 내세워 마침내는 새로운 한나라(촉한)를 건국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또한 경제의 사남인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은 바로 삼국지의 유표와 유장이다. 삼국지의 대표적인 유씨 3명이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인 셈.
그리고 후한을 시작한 광무제 유수도 이 사람의 7남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니 훗날 삼국시대와 묘한 인연이 있는 황제다. 그러니까 유씨 집안에서 전한, 후한, 촉한 황족의 분기점이 바로 이 사람이다. 참고로 왕망을 토벌했던 경시제 유현도 경제의 후손인데 광무제와 동일하게 장사정왕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유수가 조부 대에서 작은집이었고 유현이 큰집이었다.
○ 평가
경제는 그의 아버지 문제의 치세를 이어 즉위 후 산업을 부흥하는데 큰 힘을 쏟았는데, 덕분에 국고에는 재화가 가득차서 그것들을 묶은 줄이 끊어질 정도였고, 백성들은 모두 노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두 부자의 덕치를 문경지치라고 칭한다. 또한 그는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해 군국제를 고쳐 황제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아버지의 치세를 물려 받아 이를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청나라 옹정제와 비교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