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
위공자열전 (魏公子列傳)
사마천 사기의 17번째 위공자(신릉군) 열전.
신릉군(信陵君, ? – 기원전 243년)은 중국 전국시대위나라 사람으로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이름은 위무기(魏無忌). 신릉군은 중국 전국시대의 저명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平原君 趙勝),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孟嘗君田文),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春申君黃歇)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
-신릉군의 생애와 업적
위무기는 위소왕의 아들이자 안희왕의 이복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자 무기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그는 어질고 선비를 존중했으며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기원전 257년, 앙숙사이인 조나라와 진나라는 다시 한번 결전을 하게 되었다. 진나라 군사들은 기원전 260년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전멸한 기세를 타서 다시 한번 조나라 정벌에 나서 조나라의 도읍지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급기야 망국의 급박한 경지에 몰리게 되었다. 형국이 급하게 되자 조나라의 승상으로 있었던 평원군(平原君), 즉 전국시대 유명한 4공자(公子) 중 한사람인 조승(趙勝)은 위(魏)나라 안리왕과 자기의 손아래 처남인 위나라 승상 위무기(魏無忌, 전국시대 4공자 중 한 사람), 즉 신릉군(信陵君)에게 수차 구원을 청했다.
위 안희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안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돕는 다는 정보를 입수한 진나라 진 소왕(秦昭王)은 안리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조나라를 도울 경우 위나라도 함께 공격하겠다고 했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안리왕은 인차 진비에게 제자리에서 진을 치고 관망을 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말로는 조나라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은 일의 진전을 관망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럴수록 진나라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조나라의 상황은 더욱 위급하게 되었다.
평원군은 연속 사절을 보내 구원을 독촉하는 한편, 위나라에서 대권을 잡고 있는 자기의 처남인 신릉군이 조나라와 자기의 친 누님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결국 급해난 것은 신릉군이었다. 당시 신의와 명사들에 대한 예우로 이름이 높았던 신릉군으로 놓고 말하면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선택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나라를 구원하지 않을 경우, 하나는 위나라에서 신릉군의 위망과 안리왕의 안목에 신릉군이 없다는 결론이 얻어지게 되어 그동안 쌓았던 위망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고 조나라를 구하려 할 경우 진을 치고 관망하라는 안희왕의 명을 거역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적게는 안희왕의 눈에 나게 되고 심하게 되면 생명위험까지 있게 된다. 안리왕은 강대한 진나라가 무서워 조나라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신릉군은 또 조나라가 망하는 걸 그대로 보고있을 처지만은 아니었다.
신릉군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포섭했던 문객(門客)들과 가지고 있는 전차 백여대를 동원하여 개인적으로 조나라와 함께 생사를 같이할 준비를 했다. 이때 신릉군 위무기의 문객으로 있던 후영(侯赢)이라는 사람이 그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안리왕이 사랑하는 왕비인 여희(如姬)를 이용하여 안리왕 침실에 있는 진비의 병부(兵符, 즉 고대에 군사지휘권에 필요한 신빙물)를 훔쳐서 지휘권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지원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원래 안리왕이 가장 총애하는 왕비 여희의 아버지가 원수에게 살해되었는데 여희가 그처럼 원수를 갚으려고 해도 갚지 못했다. 그런데 이일을 알게 된 신릉군이 자기의 문객을 시켜 여희의 아비죽인 원수를 갚아주었는데 그럼으로 여희는 신릉군의 청탁을 거절 할리가 없었다.
신릉군은 후영이 시키는 대로 여희에게 병부를 훔쳐 줄 것을 청탁했고 여희는 신릉군의 은혜를 갚으려고 위나라 안리왕의 침실에 있는 진비의 병부를 훔쳐 신릉군에게 주었다. 병부를 훔친 신릉군이 진비를 찾아 가려는 데 후영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가려면 당시 유명한 무사인 주해(朱亥)를 데리고 가, 진비가 병부를 보고도 병권을 내놓지 않을 경우 주해가 진비를 격살해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했다. 후영과 주해는 모두 비천한 사람들이었는데 신릉군이 예우를 해 줌으로 신릉군의 문객으로 된 사람들로 수시로 신릉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후영은 원래 비범한 모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집이 가난해 성문을 지킴으로 연명을 해가는 사람이었고 주해 역시 당시 유명한 무사였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저자거리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이인(異人, 비범한 재주를 갖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신릉군은 당시 위나라 조정의 각료들과 명사들을 모여놓고 후영을 모시러 갔다. 하지만 후영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신릉군 위무기가 마차를 가지고 와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신릉군이 마차에 오르라고 하자 추호의 사양도 없이 상좌에 앉았고, 자기를 술자리로 모시려면 자기의 친구인 주해도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다. 곁에서 많은 사람들이 후영이 너무한다고 했지만 신릉군은 아무 말없이 후영이 가리키는 쪽으로 저자거리로 주해를 찾아 갔고, 후영이 주해의 집안에 들어가 주해와 한담하는 동안 말고삐를 들고 기다렸다. 신릉군이 이들 둘을 모시고 연회장으로 들어서 술을 권하자 후영은 인사도 없이 받아 마셨다. 그리고 연회가 파한 다음 신릉군보고 자기는 신릉군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했다. 저자거리에서 한 이름없는 인간을 위해 말고삐를 잡고 한식경이나 기다린다는 자체가 바로 인재를 중히 여기는 신릉군의 위망을 세워준 일이라고 하면서 이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문을 들은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이 구름이 모여들 듯이 신릉군에게로 찾아 들었다.
후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신릉군은 병부를 가지고 주해와 함께 진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진비는 병부를 보고도 군사권을 자기에게 넘기라는 신릉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상시 상식상 전쟁을 앞두고 대장군을 교체하는 일은 없었으며 교체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제3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신릉군이 혼자서 병부를 가지고 대장군의 지휘권을 받으려하지 진비는 지휘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주해는 그 자리에서 진비를 격살했다. 이렇게 신릉군 위무기는 군사권을 가질 수 있어 군사를 휘동하여 조나라 구원의 길에 나섰다.
신릉군 위무기가 조나라 지원에 나섰다는 소문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에게 군사를 주어 신릉군 위무기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신릉군 위무기는 초나라, 위나라, 조나라 군사들을 연합하여 일거에 진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조나라의 도읍지 한단의 포위를 풀었다. 이게 바로 사상 유명한 절부구조(竊符救趙), 즉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한 이야기이다.
병부를 훔치고 진비를 살해해 군권을 잡아 조나라를 구한 신릉군은 위나라 안리왕이 자기를 미워할 줄을 알고 전쟁이 끝난 다음 귀국하지 않고 그냥 조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명사들을 자기의 수하에 포섭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기원전 247년, 원기를 회복한 진나라는 원수를 갚기 위한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이에 기겁한 위나라 안리왕은 수차 조나라로 사신을 보내 신릉군을 돌아오라고 했지만 신릉군은 이 핑계 저 핑계 지어 “이제 안리왕의 사신의 말을 전달하는 자는 목을 벤다”라고 하면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리왕이 모든 군권을 다 주겠다고 해서야 위나라로 돌아왔고 신릉군과는 이복형제간인 안리왕은 돌아온 신릉군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상장군으로 임명받아 위나라의 모든 군권을 쥐게 된 신릉군은 즉시 기타 제후국들에 구원을 청했고 신릉군이 상장군으로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후국들에서는 분분히 구원병을 보냈고 신릉군은 황하이남에서 진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함곡관까지 추격해갔다. 패전을 한 진나라에서는 황금 만량을 가지고 신릉군에게 살해된 진비의 부하들에게 가서 신릉군이 역모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으며 한편 신릉군에게 또 사람을 보내 이미 위나라 왕이 되었다면서 하고 축하를 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릉군을 많이 의심했던 안리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신릉군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안 신릉군은 병권을 내놓고 매일같이 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허송하다가 4년 만에 우울한 가운데서 자기의 생을 마감했으며 같은 해, 안리왕 역시 사망했다. 신릉군이 죽은 지 얼마안되어 진나라 군사들은 위나라의 도읍지를 함락했고 위나라는 결국 앞당겨 멸망하게 되었다.
○ 신릉군 위무기(信陵君魏無忌)
能以富貴下貧賤(능이부귀하빈천), 부귀한 신분이면서 빈천한 사람들과 능히 사귈 수 있었고
賢能詘于不肖(현능굴우불초), 현능하면서도 불초한 자들에게 능히 몸을 굽혔으니
唯信陵君爲能行之(유신릉군위능행지). 이는 오로지 신릉군만이 할 수 있었다.
作<魏公子列傳>第十七(작<귀공자열전>제십칠) 그래서 <위공자열전>제십칠을 지었다.
1.禮賢下士(예현하사)
-현인들을 공경하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춘 신릉.
위(魏)나라의 공자 무기(無忌)는 위소왕(魏昭王)의 막내아들이며 안리왕(安釐王)의 이복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리왕이 서자 무기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이때 위나라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해 진나라로 도망쳐 승상이 된 범수(范睢)가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진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대량성을 포위했다.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는 화양에서 진을 치고 있던 위군을 대파하고 그 장수 망묘(芒卯)를 패주시켰다. 위왕과 신릉군은 그것을 매우 걱정했다.
위공자 무기(無忌)라는 위인은 어질고 선비들에게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선비들이 어질지 않거나 불초하거나를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몸을 낮추어 예의로써 사귀며 자기가 부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감히 교만한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이로써 선비들은 사방 천리의 땅에서 서로 다투어 달려와, 몸을 의탁하러 왔음으로 그들의 수효가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여러 제후들은 어질 뿐 아니라 수많은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던 공자의 존재 때문에 감히 군사를 동원하여10여 년 동안 위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공자 무기와 안리왕이 마주 앉아 박(博)을 두고 있는데 북쪽의 변경에서 봉화를 올려 급보를 전해왔다.
「조나라가 쳐들어와 조만 간에 우리나라 경계에 이를 예정입니다.」
외적이 쳐들어 온다는 급보에 박 판을 치우고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려고 하던 위왕을 무기가 제지하며 말했다.
「조왕은 단지 사냥을 하러 출병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경계를 침범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릉군은 여전히 박판을 치우지 않고 계속 두었다. 위왕은 두려워하여 박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북방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조왕은 단지 사냥을 위해 출병했지 우리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위왕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공자는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었는가?」
「조왕의 은밀한 일까지 깊이 알고 있는 신의 문객이 조왕이 하려는 일을 재빨리 저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은 그래서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위왕은 무기의 지혜와 능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무기에게 위나라의 국정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2.夷門訪賢(이문방현)
-이문에 숨어사는 현자를 방문하는 신릉군.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은사가 있었다. 나이가70이 되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대량의 이문(夷門)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다. 공자가 전해 듣고 많은 예물을 보내면서 만나보기를 청했다. 후영이 한사코 받지 않으며 말했다.
「신은 몸을 정결히 닦으며 수행하기를 수십 년이 되었으나 결국은 이문의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곤궁하게 산다하여 어찌 공자님이 보낸 재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자는 주연을 크게 열고 빈객들을 불렀다. 빈객들이 모두 좌정하자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병들을 뒤따르게 하고는 수레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공자는 수레의 상좌인 왼쪽 자리를 비어둔 체 자기가 직접 말고삐를 잡고 이문으로 갔다. 후생은 다 찢어진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곧바로 공자가 모는 수레에 올라 상석에 앉으며 전혀 거리끼는 바가 없이 행동하며 공자의 반응을 보려고 했다. 공자가 고삐를 잡으며 더욱 공손한 태도로 대했다. 후생이 공자에게 말했다.
「저에게는 시정의 푸줏간에 백정 일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원컨대 수레를 몰아 그곳을 지나면서 그 친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공자가 수레의 방향을 바꿔 시장으로 들어가 푸줏간 앞에 당도하자 후생이 수레에서 내려 그의 친구 주해(朱亥)를 만나 거만한 모습으로 서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공자의 행동을 몰래 관찰했다. 그러나 공자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온화해졌다. 이때 공자의 집에는 위나라의 문무대신과 종친들이 대청을 가득 메우며 공자가 돌아와 술잔을 들어 연회를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후영을 기다리며 시종일관 수레의 고삐를 잡고 모습을 보았다. 공자를 수행했던 기병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후생의 행동에 욕을 해댔다. 후생은 자기의 거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공자의 태도를 보고 그의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수레에 다시 올라탔다. 이윽고 수레가 연회장에 당도하자, 공자는 후생을 인도하여 연회석의 상좌에 앉혔다. 공자가 좌중의 인사들에게 후생에 대해 찬양의 말로 두루 소개하자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이윽고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생을 위해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렸다. 후생이 공자의 말에 답하며 말했다.
「오늘 이 후영이 공자님을 난처하게 만든 일은 공자의 호의에 충분히 보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동문을 지키는 일개 문지기로 문을 보살피며 성문에 빗장을 지르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자께서는 친히 수레의 고삐를 잡고 저를 찾아 왕림하여 저잣거리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맞이하셨음에도, 원래는 방문하지 않아도 될 친구의 집을 제가 찾아가려고 하자, 공자께서는 말머리를 돌려 특별히 그곳을 들려 저로 하여금 친구를 만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후영이 공자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오랫동안 공자님의 수레와 수행원들을 시장바닥에 오래 서 있게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는 더욱 그 태도를 공손히 하셨습니다. 이로써 시중 사람들은 모두 이 후영은 소인배고 공자님은 선비들에게 몸을 낮출 줄 아는 장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주연이 파하고 공자는 후생을 상객으로 모셨다. 후생이 공자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방문했던 푸줏간에 일하던 주해(朱亥)라는 친구는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그렇게 시정에 몸을 숨기고 백정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자가 듣고 사람을 몇 번이나 보내 청했으나 주해는 그때마다 사양했다. 공자는 결국은 주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위안리왕20년 기원전257년, 장평(長平)에서
3.竊符救趙(절부구조)
-부절을 훔쳐 조나라를 구원하다.
조군(趙軍)을 대파한 진소왕(秦昭王)이 보낸 진나라 군대는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을 포위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의 동생 평원군(平原君)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부인이 된 위공자 무기의 누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안리왕과 신릉군에게 편지를 써서 구원군을 보내 한단을 구해 달라고 청했다. 무기의 누이는 위왕의 누이도 되었기 때문에 위안리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10만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명했다. 진소왕이 알고 사자를 위왕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내가 조나라의 도성 한단성을 포위하여 이제 조석지간에 함락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감히 조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제후들이 있다면, 내가 한단성을 함락시킨 후에 반드시 군사를 움직여 그 제후에게 죄를 물으리라!」
위왕이 진왕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진비에게 보내 진격을 멈추고 업성(鄴城)에 머무르며 조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치며 정세를 관망하라고 했다. 위나라의 구원군이 행군을 멈추었다는 소식을 들은 평원군은 사자를 끊임없이 계속 위나라에 보내 신릉군을 책망하며 말했다.
「이 조승(趙勝)이 스스로 위나라의 공실과 혼인을 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빠졌을 때 그 위급함을 구하고자 하는 공자의 높은 의기를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단성이 조석지간에 진나라에 항복하려 하고 있음에도 위나라의 구원군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공자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능히 구할 수 있는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공자께서 이 승을 가볍게 보고 버림으로서 진왕에게 항복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군의 누이가 너무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신릉군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위왕에게 청하고 다시 문객들 중 변설에 능한 사람을 시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위왕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진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한 위왕은 끝내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릉군은 결국은 자기가 위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헤아린 끝에 조나라가 망하면 자기도 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문객들과 함께 전차100여 승을 준비한 신릉군은 조나라로 들어가 진나라 진영으로 돌격해서 조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결심했다.
신릉군과 그 문객들 일행이 이문을 나설 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후생을 보게 되었다. 그는 후생을 찾아 그가 진군을 향해 돌격하여 목숨을 던져 죽으려고 한다는 결심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윽고 공자가 작별인사를 하고 성문을 나서는데 후생이 그를 향해 말했다.
「공자께서는 힘껏 싸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늙어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공자가 성문을 나와 몇 리를 가다가 속으로 불쾌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내가 후생을 지금까지 그렇게 후하게 대한 일을 세상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오늘 내가 싸우다 죽으려고 출전한다고 말했음에도 후선생은 일언반구의 송별하는 말도 없으니 도대체 내가 그에게 무슨 실례를 저질렀단 말인가?」
신릉군이 수레의 방향을 돌려 돌아가 후생에게 물었다. 후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신은 공자께서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공자가 선비를 사귀시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어려운 처지에 놓이시게 되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나라 군사들과 싸우러 출정하려 합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행위와 같습니다. 어찌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리 행동하신다면 지금까지 양성한 문객들을 어디다 써먹겠습니까? 공자께서는 평소에 신을 후하게 대우하셨지만, 오늘 죽음을 무릅쓰고 출전한다고 찾아온 공자를 전송하지도 않았으니, 공자께서는 가슴에 한을 품으시게 되어 이로 인하여 다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신릉군이 재배하며 계책을 물었다. 후생이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진비가 이끌고 있는 군사들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호부(虎符)가 위왕의 침실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위왕에게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은 여희(如姬)입니다. 그녀만이 왕의 침소를 무상으로 드나들 수 있어 호부를 몰래 훔쳐낼 수 있습니다. 옛날 여희의 부친이 어떤 사람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녀가 품은 원한을 왕과 그 이하의 사람들이 그녀의 부친을 죽인 원수를 죽여 원한을 갚아주려고 했으나3년이나 되어도 그 원수의 머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희가 공자에게 눈물로 호소했음으로 공자는 문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여희는 공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껏 기회를 얻지 못해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었습니다. 공자께서는 입을 한 번 열어 절실한 마음으로 여희에게 청하시면 그녀는 필시 기쁜 마음으로 허락할 것입니다. 그 호부로 이용하여 진비가 거느린 군사들을 빼앗은 후에 그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하여 진군을 물리쳐 조나라를 구원한다면, 공자께서는 오패(五覇)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신릉군이 후영의 계책대로 여희에게 청하자 그녀는 과연 호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가 떠나라고 하자 후생이 말했다.
「장군이 밖에 있을 경우 왕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는 법은 나라의 이익이 된다고 해서 생겼습니다. 공자께서 병부를 맞췄음에도 진비가 명을 받들지 않으면서 군사를 넘겨주지 않고 왕에게 다시 확인한다면, 일이 틀어져 공자는 위험에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신의 친구 주해를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역사라 진비가 공자의 명을 받든다면 좋은 일이지만, 듣지 않는다면 주해를 시켜 격살하십시오.」
후생의 말을 들은 공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후생이 물었다.
「공자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어찌하여 우십니까?」
「진비는 용맹하고 기개 높은 숙장(宿將)입니다. 내가 호부를 제시했음에도 명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죽여야 하는데 죄 없는 사람이 무고하게 죽여야 되니 이를 슬퍼해서지 어찌 내가 죽음을 두려워서 이겠습니까?」
말을 마친 공자가 즉시 주해를 찾아가 자기와 같이 갈 것을 청하자 주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시정의 푸줏간에서 방울 달린 칼을 들고 고기를 잡는 백정입니다. 저와 같은 비천한 사람을 공자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방문하여 저에 대해 문후를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때마다 답례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것들이 작은 예의에 불과하여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공자께서 급한 실이 생겼으니 이때가 바로 제가 목숨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윽고 주해가 공자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공자가 성문을 나가다 후생을 만나 감사의 말을 했다. 후생이 말했다.
「신도 공자의 출행에 마땅히 따라야 하지만, 제가 이제 늙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공자의 일행이 진비의 군영에 당도하는 날짜를 계산하여 그 날이 되면 북향을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여 공자를 환송하려고 합니다.」
마침내 공자가 진비의 진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업성에 당도한 공자가 진비를 만나 그 직무를 대신한다는 위왕의 명을 거짓으로 전했다. 진비가 병부를 맞춰봤으나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세차게 흔들며 공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라의 국경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나라의 막중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께서는 단거(單車)로 와서 저를 대신하려고 하니 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자의 곁에 있던 주해가 소매 속에서40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꺼내 진비를 격살했다. 공자가 진비의 군대를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들을 점검한 후에 군령을 내렸다.
.군중에 부자가 같이 종군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
.형제가 같이 군중에 있다면 그 형은 집으로 돌아간다.
.형제가 없는 독자가 있다면 돌아간다.」
남은 군사8만을 얻은 신릉군이 진나라 진영으로 진격하자 진군은 한단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신릉군은 마침내 한단성을 구원하고 조나라의 사직을 보존시켰다.
4.人德不忘 德人忘之(인덕불망 덕인망지)
-남에게서 받은 덕은 잊지 말고 남에게 베푼 덕은 잊어라.
조나라의 효성왕과 평원군이 몸소 국경 밖으로 나와 신릉군을 맞이했다. 평원군은 등에 화살통을 메고 향도가 되어 신릉군을 인도했다. 조왕이 신릉군에게 재배하며 말했다.
「옛날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공자에 미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부터 평원군은 자기 자신을 감히 신릉군과 비교하지 못했다. 본국에 남아있던 후생은 신릉군이 진비의 군중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북쪽으로 머리를 향한 후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신릉군은 자기가 병부를 훔쳐 거짓 명으로 진비를 척살한 행위에 대해 위왕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던 목적을 달성한 신릉군은 그 군사들을 휘하의 장수에게 주어 위나라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혼자 조나라에 손님으로 남았다. 조효성왕은 진비의 군사들을 거짓 명으로 탈취하여 조나라를 구원해 준 신릉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평원군과 의논한 끝에 신릉군을 조나라의 다섯 개의 성에 봉하기로 했다. 신릉군이 듣고 그 마음에 교만과 자부심이 생겨 스스로 큰공을 세웠다고 얼굴에 덕색(德色)을 띄웠다. 그의 문객 한 사람이 신릉군에게 말했다.
「일에는 잊어야하는 하는 있고, 또한 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희부인이 공자에게 베푼 덕은 공자께서는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일이고, 원컨대 반대로 공자가 남에게 베푼 덕은 잊어야만 합니다. 하물며 위왕의 거짓 명을 전하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해서 공을 세웠으니 위나라의 입장에서는 충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공자께서는 스스로 자만하여 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공자께서는 조나라가 내리는 상을 받지 말기를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신릉군은 스스로를 책하며 마치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듯이 행동했다. 조왕이 자기의 왕궁을 소제토록 명한 후에 신릉군을 마치 주인을 맞이하듯이 대하며 서쪽 계단을 이용하여 전당에 오르게 했다. 공자가 사양하며 동쪽 계단을 이용하여 조왕의 뒤에서 옆걸음으로 올랐다. 신릉군이 스스로 자책하며 말하기를 자기는 위나라에 죄를 지은 죄인이라 조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조왕이 신릉군을 접대하며 저녁때까지 술을 마셨으나 차마 조나라의 다섯 개의 성에 봉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신릉군의 겸양하는 태도가 너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신릉군은 결국은 위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왕은 호읍(鄗邑)을 신릉군의 탕목읍(湯沐邑)으로 하사했다. 이윽고 위나라도 신릉군의 봉작을 다시 돌려주었으나 신릉군은 계속 조나라에 머물렀다.
5.折節大隱(절절대은)
-조나라 시정에 몸을 숨기고 사는 은자와 몸을 굽혀 사귀다.
조나라에 시정에 도박꾼 가운데 숨어 지내고 있던 모공(毛公)과 술도가에 숨어 지내고 있던 설공(薛公)이라는 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릉군은 그 두 사람을 만나보려고 했다. 두 사람은 스스로 몸을 숨겨 신릉군을 피했다. 이에 다시 그들의 소재지를 확인한 신릉군은 두 사람이 숨어있는 곳에 아무도 몰래 접근하여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매우 즐거워했다. 평원군이 그 소식을 듣고 신릉군의 누이인 그의 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부인의 동생 신릉군이 천하에 견줄 수 없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망녕되게 시정의 도박꾼과 술도가와 같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어울렸다는 소문을 들었소. 신릉군이 망녕이 들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부인이 평원군의 말을 신릉군에게 전했다. 신릉군이 즉시 그 누이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
「나는 옛날부터 평원군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위왕에게 죄를 지으면서까지 조나라를 구원하여 평원군의 저에 대한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러나 평원군의 친구 사귀는 방법은 단지 호방스러운 행동만 있었을 뿐 진정한 선비들을 구하려는 마음은 없는 듯합니다. 이 무기는 옛날 대량성에 있을 때부터 항상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제가 조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나 나는 단지 그 두 사람을 만나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기가 그들을 따라가 비록 같이 사귀더라도 나는 그때도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평원군께서 그들과 사귀는 일을 수치로 여긴다하니 나 자신도 평원군에게는 사귀기에 부족한 사람인 듯합니다.」
신릉군이 부인 앞에서 물러나 자기의 숙사로 돌아가더니 행장을 꾸려 조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부인이 평원군에게 신릉군의 말을 자세하게 전했다. 평원군은 즉시 신릉군을 찾아가 관을 벗고 사죄하며 조나라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애원했다. 평원군의 문객들이 이 소문을 듣고, 그들 중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릉군에게로 옮겼다. 천하의 선비들도 달려와 신릉군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래서 신릉군의 문객이 평원군의 문객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6.從毛薛(종모설)
-모공과 설공의 설득으로 위급한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환국하다.
신릉군 조나라에 머문 지10년이 되도록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진나라가 신릉군이 조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날 갑자기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왕이 두려워하여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 신릉군을 불렀다. 위왕이 자신의 옛날 행동에 대해 여전히 노여워하고 있다고 걱정한 신릉군은 대문에다 경계의 말을 써서 붙였다.
「감히 위왕의 사신을 위해 그 전하는 말은 나에게 고하는 자는 죽이리라!」
문객들은 모두 위나라를 등지고 조나라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라 감히 공자에게 권하여 위나라에 돌아가라고 권하지 못했다.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공자를 보고 말했다.
「공자님이 조나라로부터 존중을 받고, 그 이름이 제후들에게 높은 이유는 모두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는 위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공자를 부르고 있는데 공자는 오히려 남의 일처럼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대량성을 파하고 선왕을 모신 종묘를 무너뜨리게 가만히 내버려두려고 하는데, 공자는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니려 하십니까?」
두 사람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신릉군릐 얼굴색을 변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객들에게 명하여 수레를 준비하도록 하여 그 즉시 귀국하여 위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다.
7.河外敗秦 威振天下(하외패진 위진천하)
-하외의 싸움에서 진군을 무찔러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키다.
위안리왕이10년 만에 조나라의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신릉군을 보자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위왕은 상장군의 인을 신릉군에 주어 위나라 군사들을 이끌도록 했다.
위안리왕30년 기원전247년, 신릉군이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가 위나라에 돌아와 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제후들이 알고 나라마다 군사를 내어 위나라에 구원군을 보냈다. 신릉군이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사들을 하외(河外)에서 격파하고 진장 몽오(蒙驁)를 패주시켰다. 이에 승세를 탄 오국 연합군은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이에 진군은 감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 일로 해서 신릉군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의 그 문객들로 하여금 신릉군에게 병법을 올리게 하자 신릉군은 그 병법들 모두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일로 해서 세상에서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 칭했다.
8.秦之反間 醇酒婦人(진지반간 순주부인)
-진나라의 반간계에 빠져 술로 여인에 빠져서 죽다.
진왕이 신릉군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여 황금 만 근을 뇌물로 사용하여 옛날 진비의 문객들 구하여 공자를 위왕에게 참소하도록 했다.
「공자가 도망쳐 외국에 산지10년만에 돌아와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이 보낸 장군들도 모두 공자의 휘하에 속해 있습니다. 제후들은 단지 위나라에는 공자만 있는 줄 알지 위왕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공자 역시 이 일로 인해 남면하여 왕이 되려고 하며 제후들은 또한 공자의 위세에 눌려 다 같이 함께 왕으로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간계를 써서 공자가 즉위하여 위왕이 되었는지를 안 되었는지를 묻는 축하의 편지를 거짓으로 보냈다. 위왕은 매일 신릉군을 모함하는 소문을 듣자 드디어는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위왕은 진나라의 반간계에 떨어져 다른 사람을 보내 신릉군을 대신하여 장군의 자리에 앉혔다. 신릉군도 남의 모함을 받아 다시 쫓겨나자, 즉시 병을 핑계로 조당에 나가지 않고 문객들과 함께 술자리를 벌려 밤새도록 독주를 마시면서 여인들을 가까이 했다. 매일 밤 여자와 즐기며 술을 마시면서4년 만에 이윽고 술로 인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해에 위안리왕도 역시 죽었다.
공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는 장군 몽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여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 자리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 후로 진나라는 위나라를 서서히 잠식하여18년 후인 기원전225년 위왕을 포로로 잡고 대량성을 폐허화 시켰다.
고조가 어려 미천한 신분일 때, 여러 차례에 걸쳐 공자의 지혜로움을 들어 알게 되었다. 이어서 천자의 지위에 올라 대량성을 지날 때마다 항상 공자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 고조12년 기원전195년 군사를 이끌고 종군하여 경포(黥布)를 파하고 돌아올 때 신릉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집 다섯 채를 지어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공자를 제사지내게 하였다.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대량성(大梁城)의 폐허를 지날 때 이문(夷門)이 있는 곳을 물어 찾아보았다. 이문은 대령성의 동쪽 문이다. 천하의 다른 공자들도 역시 선비들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신릉군처럼 산 속의 깊은 굴 안에 은둔해 있는 사람을 찾아 교유를 맺는 일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다 이유가 있다. 그의 명성이 제후들 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은 허전(虛傳)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고조가 매번 대량성을 지날 때마다 백성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받들도록 하여 그의 제사를 끊이지 않게 했다.
○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위(魏)나라의 공자(公子) 무기(無忌)는 위 소왕(昭王)의 막내아들이자 위 안희왕(安釐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여 공자를 신릉군(信陵君)에 봉했다.
이때 범수(范睢)가 위나라에서 도망쳐서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어, 위제(魏齊)와 원한이 있던 관계로 진나라의 군대가 대량을 포위하고 화양(華陽)에 주둔하고 있던 위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망묘(芒卯)를 달아나게 했다.
위왕과 공자가 이를 걱정했다.
공자는 사람이 어질어 인재를 존중했는데, 인재가 어질거나 불초하거나 모두 겸손하게 예로 사귀면서
감히 부귀하다고 인재를 교만하게 대하지 않았다.
인재들이 이 때문에 사방 수 천리에서 다투어 달려오니 식객이 3천에 이르렀다.
당시 제후들은 공자가 유능한데다 식객이 많았기 때문에 감히 군대로 위나라를 꾀하지 못한 것이 10년이 넘었다.
공자가 위왕과 바둑을 두는데 북쪽 변경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조나라가 쳐들어오는데 국경에 진입했습니다.”라는 전갈이 왔다.
위왕이 바둑판을 밀쳐놓고 대신들을 불러 논의하려 했다.
공자가 왕을 말리며 “조왕이 사냥 나온 것이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
왕은 두려워 마음이 바둑에 가질 못했다.
이윽고 다시 북방에서 전갈이 오길 “조왕이 사냥 나온 것이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했다.
위왕이 크게 놀라며 “공자는 어찌 아셨소?”라고 하자
공자는 “신의 식객 중에 조왕의 은밀한 일까지 정탐하는 자가 있어 조왕의 행동을 식객이 신에게 바로 보고하기 때문에 신이 알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후로 위왕은 공자의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자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이름의 은자가 있었다.
나이는 70에 집은 가난했고, 대량의 이문(夷門)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공자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후한 예물을 주려고 했다.
후영은 받길 거절하면서 “신이 몸과 행동을 깨끗하게 닦아온 지 수십 년, 성문을 지키며 곤란하게 산다고 해서 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결코!”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술자리를 베풀어 빈객들을 대거 초청했다.
모두 자리에 앉자 공자는 왼쪽 자리를 비워둔 채
수레를 타고 직접 이문으로 후생(후영)을 맞이하러 갔다.
후생은 헤어진 의관을 가다듬은 후 바로 사양도 않고 공자보다 상석에 앉아 공자를 살피고자 했다.
공자는 말고삐를 쥔 채 더욱 공손했다.
후생이 또 공자에게 “신의 친구가 시장에서 도살업을 하고 있는데 수레가 가는 김에 그곳을 들렀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들어서자 후생은 수레에서 내려 친구 주해(朱亥)를 만나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그와 이야기하면서 곁눈질로 가만히 공자를 살피는데 공자의 안색은 더욱 온화했다.
이때 (공자의 집에서는) 위나라의 장상, 종친, 빈객들이 가득 모여 공자가 술자리를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말고삐를 쥐고 있는 공자를 보았고, 마차를 따르는 시종들은 모두 가만히 후생을 욕하고 있었다.
후생은 공자의 안색이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친구와 이별하고 수레에 올랐다.
공자의 집에 도착하자 공자는 후생을 이끌어 윗자리에 앉게 하고 빈객들에게 두루두루 소개하자 빈객들은 모두 놀랐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공자가 일어나 후생의 앞에서 축수를 올렸다.
후생이 이어 공자에게 “오늘 이 후영이 공자를 위해 충분히 할 일을 했습니다.
후영은 이문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는데 공자께서 몸소 마차를 몰고 오셔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저를 맞이하셨습니다.
지나다 들르지 않아야 되는데도 공자께서는 일부러 들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후영은 공자의 이름을 알리고자 일부러 오랫동안 공자의 마차를 시장 한 가운데 세워놓고
친구를 만나 공자를 살폈더니 공자께서는 더욱 공손스러웠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이 후영을 소인이라 여긴 반면
공자는 장자로서 선비에게 몸을 낮춘다고 여겼습니다.”라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자 후생은 마침내 상객이 되었다.
후생이 공자에게 “신이 들렀던 푸줏간 주해는 현인이지만 세상은 모릅니다. 그래서 푸줏간 사이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가서 몇 차례 주해를 청했지만 주해는 일부러 답례하지 않자 공자를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위 안희왕 20년에 秦(진나라) 소왕은 장평에서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군대를 진격시켜 한단을 포위했다.
공자의 손위 누이는 조 혜문왕(惠文王)의 동생 평원군(平原君)의 부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위왕과 공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위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 10만을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 위왕에게 “내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하루 이틀이면 함락시킬 것이다. 제후들 중 감히 구하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병력을 옮겨 먼저 공격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위왕이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진비에게 군대를 업(鄴)에서 멈추어 주둔하게 했다. 겉으로는 조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친 채 관망했다.
평원군의 사신이 계속 위로 와서 위공자를 나무라길
“이 조승이 스스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공자의 높은 의리가 다른 사람의 곤경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소.
지금 한단이 조만간 진나라에 항복할 것 같은데 위나라가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면 공자가 어찌 다른 사람의 곤경을 구한다고 할 수 있겠소!
또한 공자가 이 승을 가벼이 여겨 진나라에 항복하도록 내버린다면 공자의 누이가 가엾지 않겠소.”라고 했다.
공자가 이를 걱정하여 여러 차례 위왕에게 조나라를 구원해달라고 청했고, 빈객과 변사들도 백방으로 왕에게 유세했다. 위왕은 진나라가 두려워 끝내 공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자는 왕의 승낙을 끝내 얻어낼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바로 빈객들을 불러 마차 백여 대를 준비하고 객들을 진나라의 군으로 보내 조나라와 함께 죽고자 했다.
일행이 이문을 지나가다 후생을 만나 왜 진나라의 군대로 가서 죽고자 하는지를 다 말해주었다.
작별하고 떠나려는데 후생은 “공자께서는 잘 처리하십시오. 이 늙은 신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몇 리를 가다가 마음에 영 편하지 않아 “내가 후생을 대접함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것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내가 죽는다는데도 후생은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나를 보내니 내게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마차를 돌려 후생에게 와서 그 까닭을 물었다.
후생이 웃으며 “신은 정말이지 공자께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공자께서 인재를 좋아하신다는 명성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하시어 별 다른 방법도 없이 진나라의 군대로 가고자 하시니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지는 것과 같으니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식객들은 무엇 때문에 길렀습니까?
공자께서는 신을 잘 대접해 주셨지만 공자께서 떠나시는데 신은 송별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공자께서 원망스러워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두 번 절을 하고 이어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후생은 사람들을 물리고 조용히 “이 후영이 들으니 진비(晉鄙)의 병부(兵符)를 늘 왕의 침실 안에 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희(如姬)는 가장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 안까지 드나들 수 있으니 그것을 훔쳐낼 수 있습니다.
신은 여희의 부친이 누군가에게 피살되어 여희가 3년 동안 원한을 품고 왕부터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여희가 공자께 울면서 부탁하자 공자께서 식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여희에게 갖다 바쳤지요.
여희는 공자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자 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공자께서 한 마디만 여희에게 하시면 여희는 틀림없이 응낙할 것인즉, 호부를 얻어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북으로 조나라를 구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물리치면 이야말로 5패의 공업입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그 계책을 따라서 여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희는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가 출발할 때 후생은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주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을 수 있어야 나라에 이롭습니다.
공자께서 병부를 맞추었는데도 진비가 공자에게 병권을 내주지 않고 다시 지시를 요청하면 일이 분명 위태로워집니다. 신의 친구인 백정 주해를 데리고 가십시오. 이 사람이 역사(力士)입니다. 진비가 들으면 정말 좋은 일이지만 듣지 않으면 주해를 시켜 죽이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공자가 눈물을 흘렸다. 후생이 “공자께서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왜 우십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가 눈물을 흘렸다. 후생이 “공자께서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왜 우십니까?”라고 했다.
공자는 “진비는 백전노장으로 제가 간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죽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는 것일 뿐이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주해를 청했다. 주해는 웃으며 “신은 시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백정입니다. 공자께서 몸소 여러 차례 저를 찾아 주셨지만 답례하지 않은 것은
작은 예절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공자에게 급한 일이 생겼으니 이번이야말로 신이 목숨으로 보답해야 할 기회입니다”라 하고는 마침내 공자와 함께 갔다.
공자가 지나는 길에 후생에게 인사를 했다. 후생은 “신도 따라야 마땅하나 늙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착할 날짜를 계산하여 진비의 군영에 도착하는 날 북쪽을 향해 목을 그어 공자께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드디어 길을 떠났다. 업(鄴)에 도착하여 위왕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진비의 병권을 접수하려 했다.
진비가 병부를 맞추어보고도 의심이 나서 손을 들어 공자를 보며 “지금 제가 10만을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데, 이는 나라를 위한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단신으로 오셔서 군권을 내놓으라 하니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주해가 옷소매에서 40근 짜리 철추를 꺼내 진비를 때려죽이니 공자가 마침내 진비의 병권을 빼앗았다.
이어 군대를 불러 모아 군중에게 “아비와 아들이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아비는 돌려보내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사람은 형을 돌려보내라. 형제도 없는 외아들은 돌아가 부모를 보살펴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병사 8만 명을 뽑아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마침내 한단을 구하고 조나라를 보존했다.
조왕과 평원군이 몸소 국경으로 공자를 맞이하러 나왔다. 평원군은 몸소 화살통을 지고 공자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조왕이 두 번 절을 하며 “예로부터 현자들이 많았지만 공자를 따를 사람은 없소”라고 했다. 이 때부터 평원군은 자신을 신릉군과 비교하지 않았다.
공자가 후생과 헤어지고 군영에 이르렀을 때 후생은 과연 북쪽을 향해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위왕은 공자가 병부를 훔치고 거짓 명령으로 진비를 속여서 죽인 것에 화를 냈고 공자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진나라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보존하자 장수들은 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공자는 혼자 식객들과 조나라에 남았다.
조 효성왕은 공자가 거짓 명령으로 진비를 속여서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보존케 한 것을 고마워하며
평원군과 상의하여 다섯 개의 성을 공자에게 주려고 했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교만함을 드러내며 자신의 공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색이 있었다.
식객 중에 누군가가 공자에게 “일에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과 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남이 공자에게 베푼 덕은 공자께서 잊어서는 안 되며,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은덕은 공자께서 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왕의 명령이라고 속여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일은 조나라에게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에게는 충신이 아닌 셈입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교만하게 공을 내세우려 하시니 가만히 생각건대 공자께서 취하실 바가 못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스스로를 책망하길 마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했다.
조왕이 길을 청소하고 직접 (공자를) 맞이하여 주인의 예를 차리면서 공자를 서쪽 계단으로 안내했다.
공자는 몸을 한쪽으로 돌리고 사양하면서 동쪽 계단으로 올랐다.
그리고는 스스로 죄를 말하는데 위나라를 배신했고 조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없다고 했다.
조왕이 날이 저물 때까지 술시중을 들었지만 공자의 겸양 때문에 차마 성 다섯 개를 꺼내지 못했다.
공자는 마침내 조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왕은 호(鄗)를 공자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고,
위나라도 다시 신릉을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는 계속 조나라에 머물렀다.
공자가 조나라의 처사 모공(毛公)이 도박꾼 무리에 숨어 있고, 설공(薛公)은 술집에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공자가 두 사람을 만나고자 했으나 두 사람은 몸을 숨기고 공자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공자가 그들이 있는 곳을 듣고는 몰래 가서 이 두 사람과 사귀고는 몹시 기뻐했다.
평원군이 이를 듣고는 그 부인에게 “당초 내가 부인의 동생인 위공자가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내가 듣자하니 망측하게 도박꾼과 술파는 자와 사귄다고 하니 공자는 망령된 사람일 뿐이오”라고 했다.
부인이 공자에게 이를 일렀다.
공자가 부인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당초 내가 평원군이 어질다고 들어서 위왕을 어기고 조나라를 구하여 평원군을 만족시켰지요. 평원군의 교류를 보니 그저 호탕함만 있을 뿐 인재를 구하지 않는군요. 이 무기가 대량에 있을 때부터 늘 그 두 사람이 어질다고 들었기에 조나라에 와서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했지요. 이 무기는 사람을 사귀면서 늘 그들이 날 원치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금 평원군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그는 교류하기에는 부족한 사람 같소이다.”라 하고는 행장을 꾸려서 떠날 준비를 했다.
부인이 이를 평원군에 이야기했다. 평원군은 바로 관을 벗고 사죄하며 진실로 공자에게 머물길 청했다.
평원군 문하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절반 가까이가 평원군을 떠나 공자에게로 왔고, 천하의 인재들도 다시 공자에게로 돌아오니 공자의 식객이 평원군의 식객보다 많아졌다.
공자가 조나라에 10년을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진나라는 공자가 조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낮밤으로 군대를 내서 동쪽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왕이 걱정이 되어 사신을 시켜 공자에게 돌아오길 청했다.
공자는 왕이 자신에게 화가 나있다는 것에 겁을 먹고는 문하에 “누구든지 위왕의 사신을 내게 데려오는 사람은 죽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빈객들도 위나라를 버리고 조나라에 온 자들이라 공자에게 감히 돌아가자고 권하지 못했다.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가서 공자를 만나서는
“공자께서 조나라의 중시를 받고 그 명성이 제후에게 알려진 것은 오로지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가 위급한데도 공자께서는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대량을 깨뜨리고 선왕의 종묘를 허물게 둔다면 공자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대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자의 안색이 바뀌더니
서둘러 마차를 준비시켜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돌아갔다.
위왕은 공자를 만나서 서로 울었다.
그리고 상장군의 도장을 주니 공자가 마침내 대장군이 되었다.
위 안희왕 30년에 공자는 사신을 시켜 (이 사실을) 제후들에게 두루 알렸다.
제후들은 공자가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각자 장수와 병사를 보내 위나라를 구했다.
공자는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군대를 황하 이남에서 격파하여 몽오(蒙驁)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승세를 타고 진나라의 군대를 뒤쫓아 함곡관(函谷關)까지 이르러 진나라의 군대를 압박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감히 나오지 못했다.
당시 공자의 위세가 천하를 울렸다.
제후의 식객들이 병법을 올리자 공자가 모두 거기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 불렀다.
진왕은 이런 것들이 걱정이 되어서 금 만 근을 내서 위나라에다 뿌리며 진비의 식객들을 찾아서 공자를 위왕에게 이렇게 비방하게 했다.
“공자는 10년 동안 외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만
지금 위나라의 장수가 되었고 제후의 장수들도 모두 공자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제후들은 그저 위공자만 알뿐 위왕은 모릅니다. 공자 또한 이 때를 이용하여 남면하여 왕이 되고자 하고, 제후들도 공자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바야흐로 그를 옹립하려고 합니다.”
진나라는 계속 간첩을 시켜 거짓으로 공자가 위왕으로 옹립되지 않았냐며 축하를 올리게 했다.
위왕이 날마다 그 비방을 듣자,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얼마 뒤 아니나 다를까 공자 대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대체했다.
공자는 자신이 다시 비방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빈객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셨는데 독한 술을 마시고 많은 여자들을 가까이 했다.
낮밤으로 쾌락과 술에 빠지길 4년 만에 끝내 술병으로 죽었다. 그해에 위 안희왕 역시 죽었다.
진나라는 공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몽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20개의 성을 빼앗고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 뒤 진나라는 조금씩 위나라를 잠식하여 18년 만에 위왕을 포로로 잡고 대량을 도륙했다.
漢고조(高祖)유방이 아직 젊었을 때 공자의 명성을 여러 차례 듣고 위공자를 존경했다.
高祖始微少時, 數聞公子賢.
천자로 즉위해서 대량을 지나갈 때면 늘 공자에게 제사를 드렸다.
及即天子位, 毎過大梁, 常祠公子.
고조 12년에 경포(黥布)를 치고 돌아오다가 공자를 위해 묘지기 다섯 집을 두어 대대로 사계절마다 공자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高祖十二年, 従撃黥布還,
為公子置守塚五家,
世世歳以四時奉祠公子.
○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대량의 옛 터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이문을 물었다.
太史公曰:吾過大梁之墟, 求問其所謂夷門.
이문은 성의 동쪽 문이었다.
천하의 여러 공자들 역시 인재를 좋아했지만
신릉군은 바위나 동굴에 숨어 사는 인재들을 찾아
빈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夷門者, 城之東門也. 天下諸公子亦有喜士者矣,
然信陵君之接巌穴隠者, 不恥下交,
명성이 으뜸이었던 것이 헛말이 아니었고, 漢고조가 매번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백성들에게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有以也. 名冠諸侯, 不虛耳.
高祖毎過之而令民奉祠不絶也. – 김영수 역 <위공자열전>
○ 信陵君(신릉군, ?~기원전 243년)
중국 전국시대 위(魏) 나라의 정치가로 이른바 ‘전국사군(戰國四君)’ 가운데 하나이다.
안리왕(安釐王) 재위기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며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하여 세력 확장을 막았다.
이름은 무기(無忌)이다.
위(魏) 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295 ~ BC 277)의 아들로, 안리왕(安釐王, 安僖王이라고도 함,
재위 BC 276 ~ BC 243)의 이복동생이다.
안리왕이 즉위한 뒤에 신릉(信陵, 지금의 河南省 寧陵縣) 지역에 봉(封)해져 신릉군(信陵君)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천 명의 인재를 빈객(賓客)으로 거느려,
제(齊)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 ∼ BC 279),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 ∼ BC 250),
초(楚)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 ? ∼ BC 238)과 함께 이른바 ‘전국사군(戰國四君)’으로 꼽힌다.
기원전 277년 소왕이 죽고 안리왕이 즉위한 뒤에
진(秦)의 군대는 여러 차례 위(魏)를 침공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
기원전 273년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秦)의 군대가 위(魏)를 침공하였고, 당시 위(魏)의 재상(宰相)이었던 맹상군 전문(田文)이 천거한 망묘(芒卯)가 이끌던 위(魏)의 군대는 화양(華陽)에서 크게 패퇴하였다.
이 일로 맹상군은 실각하였고, 신릉군이 위(魏)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신릉군은 어질고 인재를 아껴 빈객들을 대할 때 자신을 낮추어 교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삼천 명에 이르는 빈객이 모여들었다고 하며,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주변 나라들도 10년 동안 위(魏)의 침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260년 진(秦) 소양왕(昭襄王, 昭王이라고도 함)은 장평(長平)에서 조(趙) 나라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257년에는 조(趙)의 도성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위기에 빠진 조(趙) 나라는 초(楚), 위(魏) 등의 주변 나라들에 도움을 청했다.
신릉군의 누이는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의 동생인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부인이었다.
그래서 평원군(平原君)은 위(魏) 안리왕과 신릉군에게 여러 차례 사신과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안리왕은 진비(晉鄙)를 장군으로 하여
10만의 군사를 조(趙) 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려 했으나, 진(秦)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진비에게 업(鄴)에 머무르며 사태를 좀 더 지켜보도록 하였다.
신릉군이 다시 조(趙)에 군대를 서둘러 파견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으나 안리왕은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신릉군은 후영(侯赢)의 계책에 따라, 안리왕의 총애를 받는 여희(如姬)의 도움을 받아 병부(兵符)를 훔쳐 진비의 병권(兵權)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왕의 명령을 의심하는 진비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진비가 이끌던 군대를 이끌고 초(楚), 조(趙)의 군대와 연합하여 진(秦)의 군대를 물리치고 조(趙)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여기에서 ‘절부구조(竊符救趙)’라는 성어(成語)가 비롯되었는데, 이는 ‘병부를 훔쳐 조(趙) 나라를 구하다’라는 뜻으로 ‘큰 목적을 위해 절차나 정리(情理) 등을 무시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사실을 안 안리왕은 격분하였고, 신릉군은 병사들만 위(魏)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10년 동안 조(趙) 나라에 머물렀다.
조(趙) 효성왕(孝成王)은 신릉군에게 다섯 개의 성(城)을 봉토로 주려고 했으나, 왕의 명령을 사칭해 조 나라를 구했으니 조 나라에는 공이 있지만 위(魏) 나라에는 충신이 되지 못하므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빈객의 충언을 받아들여 이를 사양하였다.
결국 조(趙) 효성왕(孝成王)은 신릉군에게 호(鄗)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으며, 위(魏) 나라도 신릉군을 다시 공자(公子)로 봉했다.
기원전 247년 세력을 회복한 진(秦) 나라가 다시 위(魏) 나라를 공격해오자, 안리왕은 신릉군을 다시 위(魏) 나라로 돌아오도록 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신릉군은 초(楚), 연(燕), 조(趙), 한(韓) 등의 주변 나라와 연합하여 하외(河外)에서 몽오(蒙驁)가 이끄는 진(秦)의 군대를 물리치고, 한구관[函谷關]까지 진군(秦軍)을 몰아냈다.
당시 5개국의 연합군을 이끌면서 신릉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각 제후들의 빈객들이 제시한 병법(兵法)을 모두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고 불리는 이 병서(兵書)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모두 25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신릉군을 없애기 위해 진(秦) 장양왕(莊襄王, 재위 BC 250 ~ BC 247)은 신릉군에게 살해되었던 진비의 세력을 이용해 신릉군이 위(魏) 나라의 왕이 되려 한다고 안리왕에게 모함하여 이간책을 펼쳤다.
결국 상장군의 자리에서 물러난 신릉군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결국 4년 만인 기원전 243년에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해에 안리왕도 죽었다.
신릉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秦)은 몽오(蒙驁)를 보내 위(魏) 나라를 공격해 20개 성을 점령하고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魏) 나라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여 기원전 225년에는 도성인 대량(大梁, 지금의 河南省 開封)을 점령해 위(魏)를 멸망시켰다.
신릉군은 문지기나 백정의 신분에도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아꼈으며, 그들을 초빙할 때 직접 수레를 끌고 상석을 양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도박하는 무리와 술집에 숨어 지내는 처사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의 명성을 듣고는 초빙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숨어 만나려 하지 않자 직접 그들이 있는 도박장과 술집에 가서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때문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신릉군에 대해 “천하의 여러 공자들도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신릉군만이 깊은 산과 골짜기에 숨어 사는 인물들을 찾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의 사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제후들 사이에 그의 명성이 가장 높았던 것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한(漢) 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방(劉邦, BC 256 ~ BC 195)은 젊어서부터 신릉군을 존경하였고, 황제가 된 뒤에도 대량(大梁)을 지날 때마다 신릉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195년(高祖 12년)에는 신릉군의 묘에 다섯 가호(家戶)의 묘지기를 두어 매년 4계절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 사자성어
1) 인거매장(引車賣漿)
.引: 끌 인, 車: 수레 거, 賣: 팔매, 漿: 습장
.‘비천한 직업’을 의미
신릉군이 행했던 두 사건을 합쳐서 만들어진 말로, 인거(引車)’는 몸을 굽혀 후영(侯贏)을 모시기 위해 수레를 몰고 간 행위를, 매장(賣漿)은 시정의 장사꾼들 속에 몸을 숨겨 살고 있던 설공(薛公)이라는 은사를 찾았던 행위를 말한다.
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중 일인. 제나라 맹상군, 위나라 신릉군, 조나라 평원군, 초나라 춘신군이 그들이다.
한(漢)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이 신릉군의 팬이어서 한(漢)나라의 사관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전국시대 사군자중 신릉군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또 가장 우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릉군은 위나라 안리왕(魏安釐王)의 동생으로 천성이 어질고, 선비들을 높이 받들었음으로 천하의 호걸과 의사(義士)들이 신릉군을 찾아와 문객이 되어 그의 집은 항상 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 후영이라는 은사가 나이 70에 대량성의 이문(夷門)의 문지기로 살고 있었다. 소문을 들은 신릉군이 후한 예물을 준비시켜 그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려고 했다. 후영은 예물을 사양하고 초대를 거절했다. 이에 신릉군은 큰 잔치를 열어 빈객들을 초청해 놓고 친히 수레를 몰고 후영을 찾아가 손님으로 참석해주기를 청했다. 그때 후영은 헤진 옷과 부서진 관을 쓰고 있었으나 전혀 사양하지 않고 신릉군이 모는 수레에 올라 상좌에 앉았다. 그러나 신릉군은 마부석에 앉아 수레를 끄는 말들의 고삐를 당기며 변함없이 공경하는 자세를 취했다. 후영이 다시 시장에서 고기를 파는 친구 집을 방문해야 한다고 수레를 그곳으로 몰아줄 것을 공자에게 청했다. 공자가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수레를 몰아 시장으로 들어가 후영이 친구와 한담을 다 끝마칠 때까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간의 세월이 흐른 후, 신릉군이 위왕에게 죄를 짓고 조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조나라에 두 사람의 은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 사람은 모공(毛公)으로 도박장의 노름꾼들 틈에 섞여 살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설공(薛公)으로 매장(賣漿)을 하고 있는 집에 숨어살았다. (매장(賣漿)은 원래 막걸리나 된장, 간장 등의 장류를 파는 곳이나, 현대적으로 보면 포장마차 정도의 허름한 술집/식당이라고 함) 신릉군이 친히 수레도 타지 않고 도보로 두 사람이 거처하는 곳을 방문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어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수레를 끌거나 매장을 운영하는 일은 모두 비천한 직업이다. 후에 “인거매장(引車賣漿)”이라는 성어는 ‘비천한 직업’이라는 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
2) 절부구조(竊符救趙)
.부절을 훔쳐내 조나라를 도운 일
신릉군 위무기가 조나라 지원에 나섰다는 소문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에게 군사를 주어 신릉군 위무기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신릉군 위무기는 초나라, 위나라, 조나라 군사들을 연합하여 일거에 진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조나라의 도읍지 한단의 포위를 풀었다. 이게 바로 사상 유명한 절부구조(竊符救趙), 즉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한 이야기이다.
○ 위공자에 대한 평가들
사기의 ‘위공자열전’은 위공자라는 인물의 이야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위나라 사람인 그의 이름은 무기(無忌)로, 그는 어질며 인재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을 사귈 때 그가 어진 사람이든, 무례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며 대하였다. 이러한 어진 마음 덕분에 그에게는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이 있었다. 공자에게는 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조나라 평원군의 부인이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오자, 공자의 누이는 여러 차례 위나라의 안희왕과 공자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안희왕은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협박에 안희왕은 겁을 먹고 진비에게 도우러 가는 것을 멈추라 명령한다. 이에 조나라의 평원군은 사신을 보내 공자를 나무랐고, 공자는 계속해서 안희왕에게 조나라를 구원하자고 청했지만 듣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만이라도 식객들을 이끌고 조나라로 가서 죽으려 했는데, 일전에 사귄 후영(侯嬴)이라는 이름의 문지기를 만나 조언을 듣게 된다. 후영은 일전에 공자가 도와줬던 여희(如姬)라는 사람을 시켜 장군 진비의 병부(兵符, 왕으로부터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실을 입증해주는 물건)를 훔쳐오게 할 것을 제안한다. 공자는 그의 말을 따랐고, 여희는 병부를 훔쳐와 공자에게 바쳤다. 공자가 병부를 가지고 위왕의 명령이라며 진비의 병권을 접수하려고 하자, 진비는 그를 의심했다. 이에 공자는 진비를 죽이고 병사를 취해 조나라를 도우러 가게 된다. 결국 그는 진나라의 공격을 막고 조나라를 구원한다.
위공자는 어질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덕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를 따르는 식객들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한 행동을 옳다고만 바라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가 후에 위왕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해도, 병부를 훔치고 거짓으로 왕의 명령을 조장하며 장군을 죽이고 병사들을 마음대로 동원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런 방법으로 얻어낸 승리는 결코 정당하며 고귀한 결과라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윤리를 지키기 힘든 극한 상황이거나 무조건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윤리는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위공자는 어질고 타인을 잘 대하는 사람이었지만, 부정한 방법을 통해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는 옳지 않은 행위를 하였다. 위공자는 조나라를 구원한 뒤 한참을 조나라에서 지내다가 결국 다시 위나라 안희왕과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위나라의 장군이 되어 진나라를 격파한다. 하지만 위공자는 조나라를 구하려고 썼던 비도덕적인 과정에서 진비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진나라는 이 점을 이용해 진비의 식객들을 꾀어내어 위공자를 모함하였고, 또 다시 위공자를 안희왕에게 미움 받게 만든다. 결국 위공자는 장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살다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정국일지라도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며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결과는 결코 정당하고 떳떳하지 못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행위로 인한 부작용은 행위의 주체에게 다시 돌아오고 말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