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사문수간 (師門手簡)
퇴계 이황 / 지만지 / 2017.11.24
퇴계 이황이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를 모았다. 편지 사이에 드러나는 가족과 제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멀게만 느껴졌던 대학자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 준다. 제자와 성리학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그 이론이 타당하면 제자의 지적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를 살필 수 있다. 성리학에 대해 설명하는 별지의 글에서는 이기이원론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 목차

제1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문원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보냄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제2
사경(士敬)에게 답함
사경에게 보냄
사경에게 답함
사경·협지에게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여러분께 안부함
사경 보게
사경·협지·돈서(惇敍) 등에게 답함
월천 조 상사에게 부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조사경의 유거(幽居)에
사경의 방문에 감사한 시에 차운함. 절구 두 편
부용동의 여러 시에 차운함
사경에게 알림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제3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안부함
조사경에게 부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부용주인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제4
사경을 위로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문원에게 말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을 초대함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 보게
제5
사경과 문원에게 말함
사경에게 답함
별지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별지
사경에게 안부함
별지
사경 보게
사경에게 답함
사경께 답함
사경과 문원에게 말함
대성·간지·사경·문원에게는 전어 각 다섯 마리
사경에게 안부함
제6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별지
산에 살면서 우연히 병중의 심정을 써서 사경과 문원에게 부침
사경에게
조사경이 질문한 ≪심경(心經)≫에 답함
별지
사경이 술을 가지고 방문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별지
사경에게 답함
제7
사경께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 보게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께 답함. 다래 조 생원 댁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께 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에게 답함
사경에게 말함
사경에게 다시 말함
사경에게 안부함
사경·문원 제군에게 말함
제8 별록(別錄)
사경에게 답함
조·이·권·박 여러 상사에게 안부함
제군들에게 말함
별지
광영당에 가랑비 내린 뒤 지음
조사경의 ‘명(明)’ 자 운에 화답함
사경에게 안부함
부용산인에게
제군들이 점필재(?畢齋)에 대해 지은 시에 차운했던 한 수의 시를 지금 다시 고침
신숙계(申啓叔)에게 보낸 답장을 지금 보충함
문원 보게
정조 대왕 어제 발문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저자소개 :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퇴계 이황은 도산 서당에서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킨 한국철학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의 자는 경호이며, 호는 지산 ·퇴계이다. 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 도산에서 진사 이식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의 아버지는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끊임없이 학문을 연마하며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내던 그는 종 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게 된다.
이후 세 차례나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집중하였다. 권력에서 멀어진 후에도 조정에서는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며 학자의 길을 걸었다. 연구에 몰두하던 그의 나이 70세, 1570년 12월 8일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켰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
– 역자 : 박상수
박상수(朴相水)는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 온지서당 등에서 한문과 고문서, 초서를 공부했고, 단국대학교에서 한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단국대학교 강사, 한국한문학회 출판 이사, 고전문화연구회 상임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뿌리정보미디어 한문 번역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문 번역과 탈초,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와 논문으로는 『고시문집(古詩文集)』, 『붓 끝에 담긴 향기(香氣)』, 『동작금석문집(銅雀金石文集)』, 『사상세고(沙上世稿)』, 『미국 와이즈만 미술관 소장 한국 문화재 도록』, 『다천유고(茶泉遺稿)』, 『탈초·국역(脫草·國譯) 초간독(草簡牘)』, 『간찰, 선비의 일상』, 「초간독 연구」, 「간찰소고」, 「설문해자와 육서심원의 부수 비교 연구」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요사이 책을 읽고 이치를 완미하는 재미가 더할 것이라 생각되네. 영양(永陽)으로 가는 길은 그만두었다고 들은 듯한데 정말인지 모르겠네. 『이학록(理學錄)』 초고본 한 책과 함께 공책, 필묵을 보내니 번거롭지만 일을 시작해 주기 바라네. 그렇지만 마음 편하게 일하고 모쪼록 일정에 쫓기지는 말게. 전번에 수정한 것은 너무 소략한 듯해 요사이 다시 수정을 거쳤지만 반드시 다 적절하지는 않을 걸세. 온당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다시 손질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리고 수록된 사람마다 「전(傳)」의 머리에 마땅히 ‘사전략(史傳略)’이라는 세 글자를 써 두어야 하네. 원(元)나라 이후 사람은 아직 다 쓰지 못했으니 반드시 하나의 양식에 따라서 하나의 예로 써야 하네. 「전(傳)」을 완전하게 쓴 것은 ‘약(略)’ 자를 없애는 것이 좋겠네.
차가운 서재라 벼룻물이 얼 텐데, 숯 한 섬으로 그런대로 질화로의 훈기를 갖추고, 백지 한 묶음은 혹시라도 책을 베끼는 데 쓰기 바라네. 붓이 얼어 급히 쓰네. 9일, 계로(溪老)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사문수간(師門手簡)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나이 27세인 1550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570년까지 이황이 조목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으로, 월천의 나이 65세에 직접 8책으로 첩을 만들어 이황의 후손에게 전해 도산 서원 광명실(光明室)에 보관했다. 이후 정조 16년(1792) 도산과(陶山科)를 보일 때 이만수(李晩秀, 1752∼1820)가 『사문수간』을 가지고 상경해 정조에게 올렸다. 이 서첩을 본 정조는 2년 뒤인 1794년 직접 발문(跋文)을 지어 승지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을 통해 도산 서원으로 보내 지금까지 전해져 오다가 지금은 옥진각(玉振閣)의 전시용 2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국국학진흥원 고문서자료실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조목은 15세(1538) 겨울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이황은 38세로, 조목과는 23세 차이가 난다. 당시 이황은 정6품 좌랑의 관직으로 서울에 있다가 한 해 전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다. 이후 조목은 18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잠깐 성균관에서 지낸 때를 제외하고는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공부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제자에게 이황은 수시로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펴거나 학문적 토론을 이끌기도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