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푸코, 사유와 인간
폴 벤느 / 산책자 / 2009.10.15
- 푸코는 회의주의 사상가이다! 오랜 학문적 동반자, 역사학자 벤느의 내밀한 증언 : 푸코의 30년 지기였던 현대 역사학계의 대가 폴 벤느가 들여다 본 푸코의 삶『푸코, 사유와 인간』

이 책은 폴 벤느 자신이 이해한 푸코의 저작, 그리고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푸코의 삶과 말을 담았다. 푸코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과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이 책과 함께 인간 푸코의 고뇌와 웃음을 만나본다.
벤느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책의 제목을 원래 ‘사무라이와 금붕어’라고 붙이려고 했다고 밝힌다. 사무라이가 정치를 상징한다면, 금붕어는 학문을 상징한다. 즉 벤느는 막스 베버의 고전적인 테마인 ‘학자와 정치’라는 관점에서 푸고의 사유와 사상을 논한다. 푸코의 학문과 정치 활동은 각각 어떻게 특징지어지는가. 그 둘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이것이 벤느의 핵심 질문이다.
책 속에서 벤느는 기본적으로 푸코가 회의주의자라고 말한다. 저자는 기존의 이해를 깨나가는 과정에서 푸코의 철학적 기획을 요약하고, 주요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하며, 푸코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의 삶과 철학이 어떤 식으로 서로 조건을 지으며 구성해갔는지 보여준다. 벤느가 푸코와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와 깊은 우정의 흔적을 통해 푸코에 관하여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 목차
들어가며
1장. 세계사 안의 모든 것은 독특하다: 담론
2장. 역사적인 선험성만이 있을 따름이다
3장. 푸코의 회의주의
4장. 고고학
5장. 보편주의, 보편소, 사후형성: 기독교의 초창기
6장. 하이데거가 뭐라고 했든, 인간은 지성적인 동물이다
7장. 자연과학과 인간과학: 푸코의 프로그램
8장. 진실의 사회학적 역사: 지식, 권력, 장치
9장. 푸코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가? 그는 빌랑쿠르의 기를 꺾어놓는가?
10장. 푸코와 정치
11장. 사무라이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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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폴 벤느 (Paul Veyne)
폴 벤느는 1975년부터 1998년까지 프랑스 학계의 최고 영예로 꼽히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마사 담당교수를 지냈으며, 명예교수를 역임한 고대사 분야의 세계적인 거장이다. 박학다식과 반골기질, 그리고 거침없는 글쓰기로 무장한 벤느의 저서들은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논쟁적인 주장으로 유명하다.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1971) 『빵과 원형경기장』 (1976)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1983) 『사생활의 역사 1권』 (1987) 『고대 로마 사회』(1991) 등이 대표적 저작이다. 1930년생인 그는 은퇴 이후에도 활발한 저작 활동을 벌였다. 880쪽에 달하는 연구서 『그리스 로마 제국』 (2005)이라든지, 인터뷰 형식의 대중 역사서 『고대 로마의 성과 권력』(2005),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각종 학술상을 수상한 역사 에세이 『우리 세계가 기독교화 되었을 때 : 312-394』 (2007) 등이 그 증거다. 벤느는 저명한 역사가이면서 동시에 (직업사가로선 이례적으로) 철학에 많은 관심을 쏟아왔던 저자이기도 하다. 초기작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이후 그는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 역사인식론과 방법론에 관한 성찰을 거듭해왔다. 그런 그의 작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가 바로 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미셀 푸코다. 그는 이미 1978년에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라는 논문을 써서 푸코 철학의 핵심과 역사학적 중요성을 정리한 바 있다. 철학자 아놀드 데이비슨의 전언에 따르면, 이 “전설적인 논문”은 푸코 자신에 의해 자기 사상을 꿰뚫은 단 한편의 가장 통찰력 있는 에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벤느는 다양한 글로써 꾸준히 푸코 사상에 대한 경의와 친연성을 드러내왔다. 푸코 또한 『성의 역사』 2권과 3권이 벤느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빚을 졌다고 서문에서 고백하기도 했다. 벤느는 『푸코, 사유와 인간』에서 자신의 30년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였던 푸코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유려한 필체로 펼쳐보이고 있다.
난 푸코에게 말했다. “너 알아? 나 엄청난 발견을 했어. 나 니체를 읽기 시작했어.” 그는 내게 말했다. “너에게 관심 있는 것은 들뢰즈의 니체겠지.” “아니야. 왜냐면 들뢰즈의 책은 한 가지 결점이 있거든. 들뢰즈는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이 한마디에, 푸코는, 말하자면, 내게 한 눈에 반했다!
그가 보기에, 나는 역사의 가장 큰 문제가 진리라는 점을 알아차린 유일한 역사가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폴 벤느
– 역자: 이상길
이상길은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및 동대학원에서 학사 ? 석사학위를 받은 뒤, 파리5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1대학교에서 철학과 DEA과정을 수료했다. 미디어와 문화연구 분야에서 글을 써왔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저서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2007) 『근대한국의 일상생활과 미디어』 (2008)를 펴냈고,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다』 (2007)를 우리말로 옮겼다. 푸코의 글로는 『비판이란 무엇인가?』 (1995)를, 벤느의 글로는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2004)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물론 회의주의자로서 푸코가 모든 철학적 담론을 근원적으로 의심하면서도, 일상생활의 규범에는 순응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평안만을 지향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핵심은 회의주의가 사유와 일상 사이의 급진적인 단절을 하나의 실천원칙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 두 차원의 명백한 구분과 분리가 바로 회의주의자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따라서 벤느가 푸코를 회의주의자로 바라볼 때, 그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하는 셈이다. 모든 초험적, 초월적 토대를 거부하고 인식의 틀을 역사화하는 사유의 급진성, 그리고 사유와 삶이라는 두 세계의 서로 다른 논리에 대한 인정과 포용. -「옮긴이의말」에서

○ 출판사 서평
- 푸코의 삶과 사유와 정치 활동은 어떤 관계를 맺었나? 들뢰즈의 『푸코』에 뒤이은, 또 다른 대가가 쓴 푸코론의 출현
아니다, 푸코는 구조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는 이른바 ‘68사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상대주의자도, 역사주의자도 아니었다. 그가 이데올로기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고 간파해냈던 것도 아니다. 이 세기에 매우 드문 일인데, 그는, 스스로 고백한대로, 회의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사실들, 그가 쓴 책의 모든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의 진실만을 믿었다. 그는 결코 일반론의 진실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토대가 되는 그 어떤 초험성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허무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 자유의 존재를 인정했다. -본문에서
- 오랜 학문적 동반자가 생생하게 기술하는, 예기치 않은 ‘새로운 푸코’의 초상
푸코의 30년 지기였던 현대 역사학계의 대가 폴 벤느가 자신이 이해한 푸코의 저작, 그리고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푸코의 삶과 말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하나의 ‘특이한’ 텍스트를 직조해냈다. 기존의 통념과 해석들을 비켜가면서, 새로운 푸코의 초상을 그려낸 이 책 (원제 〈푸코〉)에서 벤느가 그리는 푸코는 구조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하이데거주의자도 아니다. 그렇게 기존의 이해를 깨나가는 과정에서 그는 푸코의 철학적 기획을 요약하고, 주요 개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며, 푸코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의 삶과 철학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조건 지으며 또 구성해갔는지 보여준다. 벤느가 푸코와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와 깊은 우정의 흔적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때로는 놀랍게 드러난다.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은 장차 들뢰즈의 『푸코』와 비견할 만한,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푸코론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벤느는 이 책의 출간 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저 ‘인간 푸코의 매혹적이고 인상적인 실루엣을 그리고 싶었으며, 무엇이 그 사유의 가장 단순한 요약일지, 무엇이 그 기초이자 근원이었는지를 말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솔직하고도 겸손한 답변은 『푸코, 사유와 인간』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이 책은 철학적인 주해와 전기적인 일화가 유려한 문체 속에 어우러져 있는 책이다. 투사의 그림자 뒤에 가려져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역사가 혹은 작가로서 푸코의 모습을 불러낸 이 책에는 푸코의 사상에 대한 과감하고도 직설적인 논평이, 때로 읽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인간적 면모의 내밀한 단편들과 뒤섞여 드러난다. 그 사이 출몰하는 도발적 해석은 지금껏 푸코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지반을 뒤흔들고 균열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이 기억과 사유의 덩어리에 응집성을 부여하는 힘은 무엇보다도 벤느의 우정 어린 시선에 있다. 스스로의 편파성을 감추지 않는 이 편애의 시선은 ‘주인공’ 푸코의 사유에, 그리고 사람에, 어쩔 수 없이 내재하는 모순과 분열과 간극을 시종일관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 우상의 옷을 벗은 ‘인간’ 푸코 : 푸코의 결단과 용기, 그의 ‘근본적인 의심’과 인내
폴 벤느는 이 책에서 오랜 친구의 예기치 않은 초상을 그려내면서, 푸코의 신념과 사상에 관한 논쟁을 다시 지핀다. 그는 주장한다. “아니다, 푸코는 우리가 생각했던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우파도 좌파도 아니었던 그는 혁명도 기성질서도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기성질서를 믿지 않았기에 우파는 그를 혐오했고, 좌파는 그것만으로도 그가 좌파에 속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푸코는 사람들이 말했던 식의 구조주의자가 아니라, 회의주의 철학자였다. 몽테뉴에 가까운 경험주의자로서 그는 자기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진리게임’, 각 시대에 고유한 독특하며 구성된 진리들에 관해 질문했다. 이 책은 스스로 아방가르드라고 믿었으나 사실은 고정관념에 불과했던, 푸코에 관한 기존 논의들과 전면적으로 단절하며, ‘우상’의 옷을 벗은 ‘인간’ 푸코의 웃음과 고뇌를 들려준다. 벤느는 『푸코, 사유와 인간』의 앞부분에서 책의 제목을 원래 ‘사무라이와 금붕어’라고 붙이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무라이가 정치를 상징한다면, 금붕어는 학문을 상징한다. 즉 벤느는 막스 베버의 고전적인 테마인 ‘학자와 정치’라는 관점에서 푸코의 사유와 사상을 논하려 한다. 푸코의 학문과 정치 활동은 각각 어떻게 특징지어지는가? 그 둘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이것이 벤느의 핵심 질문인 것이다. 책 속에서 벤느는 기본적으로 푸코가 회의주의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회의주의자는 어항 속의 금붕어들을 관찰하는 한편, 그 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금붕어다. 그런데 이러한 ‘분신술‘에는 아무런 비극적 요소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삶의 조건이자 철학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반론과 형이상학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푸코의 회의주의는 실증적이고 엄밀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연구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것은 흔히 상상하듯 정치적인 처방으로 직접 이어지는 담론이 아니다. 푸코는 수많은 정치적 개입 활동을 벌였지만,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문제와 지점들에 대한 참여였을 뿐, 일반적인 행동프로그램 아래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푸코의 연구도 그의 정치 행동을 뒷받침하거나 이끌어내는 데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개입과 참여는 푸코라는 주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행사하고, (권력에 의해 ‘주체화’되는) 스스로를 ‘미학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궤적일 따름이다 (“그의 지적인 검술은 펜을 마치 칼처럼 솜씨 있게 다루었다.”). 이처럼 벤느에 따르면, 푸코의 철학적 회의주의와 정치적 결단주의는, 니체철학의 영향 속에 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의 이미지로 돌아가 말한다면, 사무라이는 결단과 용기와 죽음을, 그리고 금붕어는 (데카르트가 찬양했던) ‘근본적인 의심’과 관찰자의 인내와 삶을 은유한다.
푸코를 회의주의자로 규정하는 벤느의 관점은 두 가지 유형의 대립적인 푸코 이해를 겨냥하며 반박한다. 먼저 푸코의 학문과 정치를 ‘지행일치’, ‘이론과 실천의 통합’으로 보는 지지자들의 이해. 그것은 적어도 벤느가 아는 푸코 철학의 기본원리, 그리고 실제 그의 여러 활동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푸코의 학문과 정치에 현격한 간극이 있으며, 규범적인 기초가 결여 또는 은폐되어 있다는 비판자들의 이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모든 관념적 토대를 우화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푸코의 철학은 그 자체 비판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이다. 또 현실의 문제에 개입하고 특정한 편을 들고 권력에 저항하는 그의 정치학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 존재의 미학화의 실천이다. 이 철학의 정치, 정치의 철학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삶으로서의 작품, 작품으로서의 삶 속에서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다. – 「옮긴이의말」에서
한 가지 더. 이 책은 푸코에 대한 새로운 주석서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들뢰즈의 『푸코』가 그렇듯이, 이 책 또한 푸코 사상의 해설이라는 틀 안에서 벤느의 기획을 펼쳐놓는다. 벤느는 이 책에서 푸코 철학이 역사학의 대상 구성과 연구 노동에 어떤 식으로 이용되었으며 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상술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역사학자 벤느 자신의 역사쓰기에 대한 회고적인 논평이자 주석인 셈이다. 조금씩 자기비판을 통해 수정되고 진전하는 사유의 여정이 그 아래 스며 있는 중층적인 텍스트이자 시간의 잔해 너머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기성찰의 책이기도 하다.
- 푸코 르네상스? 세계는 왜 다시 푸코를 불러내는가
푸코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푸코의 저작과 이론 그 자체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푸코를 준거로 삼아 그가 다룬 주제들을 탐구하는 연구들도 철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행정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특히 두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프랑스에서 이어지고 있는 ‘사후 출간’이다. 푸코는 ‘유고 출간’을 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유고’가 아닌 말과 글들이 푸코의 동료 연구자들과 유족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후 출간’되고 있다. 이는 푸코를 아직 철학자로서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1994년 생전에 공적으로 발표되었으나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글들이 먼저 정리되어 묶인 바 있다 (『말한 것과 쓴 것』 총 4권, 갈리마르 출판사). 1997년부터는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느린 속도이지만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푸코는 강의 준비에 많은 공을 들였고, 그의 강의는 13년 동안 매주 수백 명씩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푸코 생전에도 강의록 테이프가 복제되어 암거래되거나, 이탈리아 등에서 무단 출판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비록 완성된 저작은 아니지만, 푸코의 연구 관심사와 여러 가지 미완성 아이디어들을 보여주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록 시리즈는 많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푸코의 사상을 다시금, 다른 식으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 강의록 출판은 특히 푸코가 70년대 중반 이후 관심을 기울였던 여러 주제들과 연구 방향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는 많은 연구자들의 새로운 탐구를 자극하고 있다. 사실 푸코 말년의 관심사인 신자유주의 통치성 governmentality, 이슬람, 치안, 윤리, 생정치 bio-politique, 저항과 연대 등은 그 현재성이 매우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생전에 출간했던 저작들에서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이론적 영감과 접근방식, 고민들이 충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강의록 출판은 그것들을 미완성이지만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연구지평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경영기술이나 자기계발 담론의 분석, 이슬람에서의 정치적 영성 문제, 사회보장과 위험의 계보학,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정치적 분석, 대안적인 존재윤리와 언론 자유의 문제, 주변화되고 박탈당한 다중들의 새로운 연대와 사회 운동 등이 푸코의 논의로부터 새롭게 정식화되고 탐구되고 있다. 니콜라스 로즈 Nicholas Rose, 미첼 딘 Mitchell Dean, 콜린 고든 Colin Gordon 같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통치성 연구 governmentality studies’가 활성화되고,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조르지오 아감벤 Giorgio Agamben 등이 생권력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철학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도 ’푸코 다시 읽기‘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90년대 후반 이래 푸코 미완성 논의들의 출간, 그리고 그의 말년의 관심사가 현재와 접속하는 여러 지점들 덕분에 푸코 철학은 우리시대의 현재성을 사유하는 새로운 연장통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독자의 평 1
한창 푸코를 읽을 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취해 그의 의도를 파악할 엄두 같은 건 차마 내지 못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서였다는 식의 얘기는 사족에 속하겠다. 다만 그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구경할 수 있었고, 그 희열에 취해 그의 책을 읽어나가는 데 그저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책을 쓴 프랑스의 역사학자 폴 벤느도 비슷한 처지였던 모양이다. “나는 푸코의 책들을 읽었지만,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푸코와 오랜 우정을 나눈 존경받는 석학의 고백과 철학이 뭔지도 모르는 나 같은 필부의 그것이 같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라도 그의 의도를 파악할 엄두라도 낼 수 있는 듯 보이려면 벤느 같은 안내자를 따라가보는 게 최선이다.
벤느에 따르면 푸코는, 그를 규정하는 화려한 수식어들이 무색하게도, 회의주의자였단다. 무엇을 회의했다는 것일까. 모든 인식의 토대가 되는 자명성을 회의했단다. 이를테면 누구나 자명한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토대 혹은 법, 제도 등이 그의 회의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법이란 물론 죄와 벌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 “그런 법이 어딨어?”라고 말할 때의 그 법이다. 언어로 치면 문법이 되겠고 사회로 치면 규범과 관습이 되겠고 종교로 치면 도그마가 되겠고 과학으로 치면 공리나 패러다임이 되겠다. 모든 논리의 심판자이자 모든 언설의 진위 판별자인 이들 법은 과연 어떻게 해서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막강한 토대로 기능하게 된 것일까. 이게 그가 품었던 의문이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그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들은 진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것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려고 했을까?”라고 묻는 식이겠다. 왜 사람들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오늘 점심엔 뭘 먹어야 할까라는 의문보다 중요할 뿐 아니라 (출세를 위해 혹은 지적으로 보이기 위해) 유용하기까지 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할 뿐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을 타고난다고 믿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왜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이자 세상의 주인이라는 다분히 도발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이 모든 물음에 당연하다고 답할 근거는 없다.
우리가 종교라고 여기는 것 혹은 과학이니 사회제도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 그런 공통된 블록으로 묶일 수 있을 만큼 나름의 공통적인 토대를 갖추기나 한 것일까. 각각의 종교는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과학과 사회제도들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더구나 종교로 인정받지 못한 종교들,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한 과학들까지 고려하면 의문은 더 깊어진다. 그 엄연한 ‘차이’들은 왜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인가.
이런 다소 엉뚱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푸코가 선택한 전략은 흔히 계보학이라고 불리는 역사학이다. 모든 초월성을 의문에 부치고 모든 것에 역사를 부여하는 전략. 무언가에 역사를 부여한다는 것은 일단 불멸성을 제거하는 것이고 의미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불연속적인 역사 혹은 현재의 역사다. 즉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진리란 없다. 단지 현재의 특이성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역사를 갖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도 그렇고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도 마찬가지다. 언어도 마찬가지고 종교, 과학, 정치, 경제 등도 예외는 없다. 각각의 특이성이 문제이지 시간, 즉 기원이나 종말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모든 자명한 것이 지극히 자의적인 것이 되는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의 특이점에서 생각하면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는 자명한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벤느 자신이 역사학자인지라 시종일관 역사학적 혹은 계보학적 접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벤느와 달리 푸코에게서 니체보다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흔적을 더 많이 보게 되어서인지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업을 ‘문법에 맞지 않는 말에 대한 사고’라고 부르고 싶다. 말하자면 바깥에 대한 사고인 셈이다.
직업상 맞춤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가차 없이 솎아내는 작업에 매달리다 보면 과연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건지 자문하게 된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개인적인 작업인가 아니면 돈은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일 뿐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 혹은 오문들이 세상에 퍼지지 않도록 일종의 게이트키퍼 (gatekeeper)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가. 후자라 해도 내가 그 심판자 혹은 진위 판별자가 아님은 물론이다.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오자나 비문이 발견되면 나 또한 욕을 먹거나 최소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위축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심판자인가. 문법이다. 우리 모두가 문법에 그만한 권위를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건 사회적 약속인가? 아니, 천만에. 난 그런 약속에 참여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랬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법이 사회적 약속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구사하는 것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표지로 삼는다.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은 악인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문과 오문들을 구사하는가. 그러고도 잘산다. 오해와 갈등 그리도 모순은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구사해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법에 맞기만 하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이 오해와 갈등 그리고 모순을 낳는다. 문법에 맞는 말의 입장에서 비문과 오문을 단죄할 뿐 거꾸로 비문과 오문의 입장에서 문법에 맞는 말을 살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문장은 비문이 아니다.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할 때 말하는 주체가 의도한 바는 보편적인 사랑 그 자체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 즉 역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결코 변질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사랑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니?”라고 말해야 옳다. 하지만 영화의 대사로 쓰이고 난 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함으로써 내 사랑이 변질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의사표현을 대신한다. 문법과 관습이 우리로 하여금 의도와는 상관없는, 별 의미조차 없는 말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이 말을 제대로 쓰자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다만 이런 사고가 가능하기만 하면 된다. 항상 새로운 사고. 사고 바깥까지 조명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사고 말이다. 그것은 푸코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는 의미에서의 새로움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자명성을 무너뜨리고 널리 받아들여진 친숙성을 흩뜨려버리는 데 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의지를 틀 짓거나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데 있지 않다. 지식인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겠는가? 다른 이들에게 법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188쪽)
“나는 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더 이상 이전과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쓴다.”(209쪽)
미셸 푸코는 1926년 프랑스 프와티에에서 태어나 1984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병명조차 낯설던 시절 에이즈로 사망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 독자의 평 2
푸코의 30년 지기였던 현대 역사학계의 대가 폴 벤느가 바라보는 푸코의 모습이 간결한 명제로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다음의 인용구를 보자.
“아니다, 푸코는 구조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는 이른바 ‘68사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상대주의자도, 역사주의자도 아니었다. 그가 이데올로기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고 간파해냈던 것도 아니다. 이 세기에 매우 드문 일인데, 그는, 스스로 고백한대로, 회의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사실들, 그가 쓴 책의 모든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의 진실만을 믿었다. 그는 결코 일반론의 진실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토대가 되는 그 어떤 초험성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허무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 자유의 존재를 인정했다. “(8-9쪽)
위 인용문에서 폴 벤느는 푸코에 대한 학계의 대표적인 오해 네 가지를 청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오해란 푸코는 구조주의 사상가다, 푸코는 68사상가다, 푸코는 역사주의자다, 푸코는 상대주의자·허무주의자다,라는 네 가지 선입견이다. 그럼 폴 벤느가 보는 푸코주의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푸코는 회의주의자다. 푸코의 권력의 계보학은 각 시대에 고유한 진리게임을 탐구한다.
.푸코는 정치에서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가다. 즉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푸코는 하이데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 즉 초월적 인간학에 반대하여 몽테뉴처럼 경험적 인간학을 주장한다.
.푸코는 오성의 철학자다. 즉 푸코는 해석학적 실증주의자다.
.푸코는 역사적 비판가다. 푸코의 역사적 고고학은 역사라는 우물에서 광기, 처벌, 섹스, 섹슈얼리티, 권력 등을 걷어올리고 이를 명료화하고 해석한다.
“역사 지식은 그것이 어떤 시대에 대한 분석을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한다면, 사회라든지 심성을 넘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갇혀 있었던 일반적 진리들에 다다라야 한다.”(10쪽)
푸코가 즐겨 사용하는 ‘담론’이란 개념에도 적잖은 오해가 존재하는데, 저자는 푸코의 담론은 하부구조도 아니고 상부구조도 아니고 또한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푸코적 의미에서 담론이란 “매 시대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사유하고 그에 작용하는 안경이다. 그것은 피지배자들이나 지배자들 모두에게 부과된다. 그것은 피지배자들을 속이고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자들이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다. ” 간단히 말해서 담론은 ‘역사적 선험성’이다. 푸코의 담론은 ‘비판언어학’적인 이해가 드러난다.
“담론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말하는 주체의 무의식이 아니라, 말해진 것의 무의식”이다. 행위자들의 “의식을 빠져나가는 어떤 층위, 지식의 실증적 무의식”으로, 행위자들은 “그에 대한 의식 없이” 그것을 이용한다.”(32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