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13)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13>
단 (Tel Dan)에서 99번 도로를 타고 조금만 내려오면 ‘다프나’ (Dafna)라는 지역이 있고 918번 도로와 만나는 곳에 이르기 전에 식당이 하나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 북쪽 지방에서는 송어 양식을 하면서 생선 요리를 하는 잘 알려진 레스토랑이다. 그 이름하여 ‘다게이 다프나 물고기 식당’ (Dagei Dafna Fish Restaurant)이다. ‘다그’가 이미 물고기라는 뜻이므로 fish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해 한번더 넣어준 것이다.
우리 학술 답사 일행은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2015. 12. 9). 식당은 실내와 야외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야외에 자리잡았다. 나무 테이블, 나무 의자들 주위에는 맑디맑은 시냇물이 갈래갈래 흐르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냇물을 유입시킨 것이다. 이스라엘 주머니빵 안에 올리브 유를 바르고 야채를 넣어 봉긋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먹고 우리는 이어서 나오는 송어 요리를 맛보았다. 디베랴를 떠나 고라신, 골란고원, 바니아스, 텔 단 등 걷는 곳이 꽤 많아 다들 출출하던 차에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옆에서는 연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바람에 나무들이 살랑거렸다.
식후 우리는 식당 옆에 있는 송어 양식장을 구경하였다. 수많은 송어떼- 헐몬에서 흘러온 물에 유유히 헤엄치며 노닐고 있었다. 자연을 선용하여 물고기를 기르고, 가축을 기르고, 골란산 유기농 청과물을 유럽에 수출하며, 황무지에서 올리브를 따고, 네겝에 대추야자를 심어 가꾸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우기에 땅 속에 배어든 물을 끌어 올려 거친 땅에서도 나무를 키운다. 갈릴리의 물을 사막에까지 이동시켜 나무에 물을 준다. 인간의 삶은 땅과 불가분 관계에 있고 땅의 회복은 인간의 삶의 윤택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땅을 살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며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연과 환경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성경은 자연의 어떠함을 항상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어떠함과 연결하여 말씀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은 그 자체 독립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의 명령에의 순종 여부에 따라 설명된다. 인간이 범죄하면 땅이 고통을 받고, 인간이 순종하면 자연도 회복된다. 반면, 현금의 어떤 생태신학자들 (ecological theologians)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으로부터 창조를 유리시켜 생태신학, 환경신학을 논한다. 이러한 저변에는 성경의 증언에 대한 두 가지 큰 오해들이 놓여 있다. 그 한 가지는 구약의 창조신학이 이스라엘의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역사-비평학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다른 한 가지는 죄를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으로 보지 않고 다만 인간사회의 시스템의 문제나 구조악의 문제 곧 인문학적 과제로 보는 오해다. 전자로부터 창조와 구속의 분리가 나타나며, 후자로부터 인간의 노력으로 자연(과 사회)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의 통일성과 죄가 인간과 자연의 근본 문제임을 직시할 때 자연과 환경의 회복 문제는 반드시 구속과 연관하여 다루어야 되는 것이다. 낙원-실락원-복락원은 이어져 있고, 창조-타락-구속-새창조의 완성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넓게는 우주, 좁게는 지구의 물리적 환경, 동식물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불신자에 대한 복음 전도에 집중하다 보니 환경에 대해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한다. 즉, “우리는 여전히 1차적으로 불신자에 대한 복음 전도에 집중하되 더하여 환경의 보전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로. 복음 전도를 뒷전으로 돌리고 환경 보전을 앞세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보호는 필요하나 인간의 죄로부터의 회복 없는 자연의 회복은 인위적 노력에 그치는 것이고 또 하나님 안에서의 진실된 회복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생태신학자들은 골로새서 1장과 로마서 8장을 예로 들어 마치 예수님의 포커스가 자연과 우주인 것처럼 말한다. 즉 그들은 이 내용들을 가지고 구속을 부정적으로 보며 환경에 포커스를 맞춘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새예루살렘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의 완성) 뿐 아니라 새하늘 새땅 (우주의 회복)이 구속의 완성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자연의 회복은 인간의 구속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복음 전파에 1차적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구속된 인간들의 애씀으로 자연 환경이 회복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만유의 회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오심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구속 받은 우리가 환경 오염을 막고 자연을 하나님 뜻에 맞게 가꾸어나가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우주가 회복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고 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1000년 왕국의 그리스도의 평화의 통치가 있고 난 다음에도 무저갱에 있던 마귀가 놓여나면 다시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인간의 평화가 깨지고, 자연도 황폐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역사적 전천년 입장).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자연의 회복과 보전에 힘을 기울이되 궁극적인 회복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자연 환경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토대가 타당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다음을 순서적으로 생각해 보라. (1) 인간의 죄로 자연이 고통하게 된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호 4:1). 그리하여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 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4:3). (2)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 문제가 처리되면 인간이 회복된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 (예수님. 참고 3:5)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1:11) (3) 인간이 회복됨으로 비로소 자연도 회복된다.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컬으리라 (2:16).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리라 (2:18).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리라 (3:22).
여기서 하나 덧붙일 것은 예수님의 구속은 자연의 회복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2:18 상반절)뿐 아니라 평화 (샬롬)의 도래와도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2:18 하반절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생태와 평화를 부르짖으며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통합을 꾀하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 구속을 중심으로 했을 때 자연의 회복과 인류의 평화가 뒤따르게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말을 전도시켜서 ‘오직 예수 믿음으로 구원’을 뒷전으로 몰아내고 환경과 평화를 부르짖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무서운 적대와 불신이라는 것이다. 자연 보호를 위해 타종교인들과 힘을 합치고, 평화를 위해 종교간 대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해야 하나, 종교다원주의는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자연을 잘 가꾸고, 맑은 시냇물을 끌어들여 송어 양식을 하는 이스라엘, 이제는 그보다 복음의 생수를 먼저 받기를 바란다. 예수 메시아를 주로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기 바란다. 그분의 생명 (‘조에’)으로 양육 받기를 바란다. 구속으로 영이 살아야 자연도 산다. 영이 살아야 짐승도 산다. 영이 살아야 물고기도 산다.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 그의 양떼를 눕게 할 것이라.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떼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렘 33:12-13).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