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2)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2)
호세아서 6장 4절-11장 11절까지의 긴 단락은 그 중간쯤부터 시작하여 두 개의 병행 단락을 휴대한다. 그 첫째가 8:11-9:17이요, 그 둘째가 10:1-11:11까지다. 이 두 병행단락은 똑같이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주제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날에 있을 심판 주제로 진행한다. 이 두 단락 중에서 두번째 단락의 말미는 출애굽 회상이 나타나는데 (11:1-7) 이 출애굽 주제가 11:12부터 호세아 끝 언저리인 12-13장에 여러번 나타나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호세아서의 내용 그분을 할 때 10:15까지를 한 단락으로 묶고 그 다음 11장부터 마지막 까지 (13장 말미든, 14:9까지든)를 결론으로 묶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할 수 있다. 첫째는 6:4에서 시작한 단락이 11:8-11의 이스라엘의 종말의 회복을 알리는 내용으로 큰 흐름이 마감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요, 둘째는 11:12의 시작이 4:1의 시작 부분, 6:4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주제와 같은 주제 (신실함=인애가 없는 이스라엘)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의 단락의 말미 언저리에 과거 역사 회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2:2-23의 단락의 끝 언저리 (2:15)에 출애굽 주제가 나타난 것과 비교된다. 물론 광야 회상은 9:10에 보이고, 기브아 시대에 대한 회상은 9:9; 10:9에도 보임으로 과거 회상은 출애굽 사건 하나에 국한된 것은 아니나 선지서들에서 과거 회상은 대체적으로 한 단락의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다. 반면, 신명기는 각 병행단락 (1장, 4:44이하, 28장)의 맨초입에서부터 과거를 회상하는 점에서 같은 예언서의 특성을 보이는 책으로서는 예외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선지자의 과거사 언급 이유
그러면 선지자들이 그들의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과거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있는데 첫째는 역사의 주관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대조해 보여주기 위함이다. 11:1-4의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이 철부지 (아이)였을 때 내가 그들을 사랑하였고, 나는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나오도록] 불렀다. 그들이 (선지자들이) 그들을 불렀으나 그렇게도 그들은 그들 면전을 떠나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을 바쳤고 새긴 우상들에게 향을 태웠다. 나는 그들의 팔을 잡아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쳤건만, 그들은 내가 [제대로 걷도록] 고쳐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의 줄들 곧 사랑의 끈들로 그들을 끌어준 반면, 그들을 대함에 턱에 걸린 멍에는 벗기듯 하였고 그들 앞에 슬쩍 먹을 것을 (놓아두었다).” 하나님이 이 대목을 말씀하실 때 무척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다. 이 사랑은 상대방이 모르는 가운데 혼자만 가슴을 앓는 짝사랑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은 사랑하고 행동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이 (여기서 아이는 히브리어로 ‘나아르’, 참고 2:15 ‘네우림’, 이 두 단어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NAS 관주사전)에 비유하신다. 아이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은 풀어주시고 사람의 손길로, 사랑의 손길로 이끌어주셨다. 두 팔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떼어 제대로 걷도록 틀린 스텝은 고쳐주시고 배 고플 때는 몰래 이곳 저곳, 금방 아이 눈에 띄는 곳에 먹을 것을 갖다 놓으셨다. 하나님의 사랑 (자애)의 동기에서 나온 이스라엘 구원, 양육, 교육, 배려와 이스라엘의 무지, 완악, 일탈, 배은망덕이 대조된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호 11:1; 출 4:22)이라 하시나 그 아들은 배은망덕한 아들이었다.
호 11:1을 보는 마태의 시각
신기한 일은 마태가 호세아의 이 구절을 예수님과 관련해 인용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시에, 그리고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부르셨는데, 마태는 그 ‘내 아들’ (이스라엘)을 예수님에게 대입한다는 사실이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출애굽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사건 (말하자면, ‘입애굽’)을 마태가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장 14-15절은,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개역개정) 즉 호세아는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불러내셨다고 하였고, 마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로부터’ 아기 예수님을 불러내셔서 애굽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을 가지고 호세아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적용시킨 것은 일단은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피조물에 불과한 이스라엘임을, 그러나 예수님은 거룩한 아들, 하나님이신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에 부가하여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은 죄많은 이스라엘, 피조물인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 곧 이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거룩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들 예수님 안에서 구속을 받아 거룩하게 되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아들 이스라엘, 더 나아가서는 부활을 입어 영광스럽게 된 아들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라.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같이 영화롭게 되었어도 여전히 이스라엘이지만 흠도 점도 없이 거룩하게 된 측면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아들’인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출 4:22에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하신 것은 이런 이상적 언약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마태가 ‘출이스라엘’하신 아기 예수님을 ‘출애굽’의 호세아 말씀에 적용한 것은 그가 아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정황은 악한 바로가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 (사실은 예수님)을 다 죽이려했던 상황인데 아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말은 이스라엘이었지 실상은 그 옛날 애굽의 상황과 별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곧 당시 이스라엘은 바로왕처럼 남자 아기들을 살해한 헤롯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헤롯의 할퀴는 발톱에서 구출 (출이스라엘)하셔서 안전한 곳에서 양육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어낼로지한 예언-성취가 성립된다 (참조. Our Beans. Ed Gallagher 박사의 글). 당시 예루살렘을 영적인 애굽으로 취급하는 마태의 씨니컬한 어조가 그의 호세아 인용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1세기 유대인들 중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소수뿐이었고 언약 안에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실상은 배은망덕한 우상숭배자 애굽인들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콘트라 새관점).
역사 회상과 역사 인식
우리는 세상 나라의 풍속대로 행하던 과거의 때를 그리워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세상나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과거 구원 역사를 회상하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3-14)고 했지만 같은 장에서 육체를 신뢰하던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과거사를 똑똑히 돌아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자신의 구원 받은 역사 회상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반대편에 있었는가 반대로 하나님은 얼마나 오래도록 참으셨는가 그리고 결국 은혜의 구원을 베푸셨는가를 되뇌임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믿음 생활에 동력을 얻는다. 이것을 넓게 적용하여 하나님이 소망 없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우리 한국 교회는 자꾸 되뇌여서 정말 한국 교회가 빛이신 하나님을 전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역사 인식이요 동시에 나의 역사 인식이다.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