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7)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7>
호 12:11-13:4를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라헬에 시선을 집중한 야곱과 그런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야웨 하나님의 대조를 보았다. 이 대조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루신 야웨 하나님과 에브라임의 죄의 대조로 진전된다. 즉, 아내 얻기 위하여 봉사했고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지켰던 야곱의 사건을 에브라임의 교만과 연결시키되, 이 에브라임의 교만이 바알 숭배 (13:1)로, 송아지 숭배 (2절)로 이어짐을 아주 자세히 묘사함으로 호세아는 대조법에 점층법을 더한다는 것이다. 대조가 야곱 개인에서 국가 범위로 넓어지며, 간단한 언급에서 자세한 설명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층법은 11:12부터 호세아 마지막까지의 보다 넓은 범위의 단락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다 넓은 문맥에서의 점층법
11:12-12:10에서는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야곱, 벧엘의 야곱, 출애굽, 선지자들을 보내신 사건들로 역사적 시점이 이동하고, 12:11-13:4에서는 아람의 야곱, 출애굽, 북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로 이동하며, 13:5 이하에서는 광야, 사무엘 시대 (왕을 요구함), 북이스라엘 시대로 이동한다. 이 세 단락은 겹치는 시간대가 있지만, 각각 시작 시점이 점진적이며, 각각의 종결점도 점진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층법은 보다 더 큰 그림에서도 보인다.
더 큰 그림에서의 점층법
4:1-6:3의 첫머리에서 호세아는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곧 3중적 표현, ‘없고’ ‘없고’ ‘없고’로써 언약 백성으로서의 기본 품성을 결여-상실한 이스라엘을 직설적으로 언급한다. 그런데 6:4-11:11의 단락의 첫머리에서 호세아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4, 6)고 함으로써 변이를 띄어 앞의 분위기를 좀더 고조시킨다. 곧 2중의 수사적 질문 ‘…어떻게 하랴…어떻게 하랴’, 2개의 모티프들을 사용한 직유 ‘아침 구름,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리고 동의병행법을 통해 기계적 예배 (제사) 보다 하나님의 품성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의 중요함을 제시한다. 앞 단락에서 단순히 직설적으로 언급한 것과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내용은 같은 내용인데 마지막 단락11:12-14:9에 오면 이제는 표현들이 더 부가된다. 이로써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그런즉 너의 하나님께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어다…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12:1하, 6; 13:3) 곧 호세아는 여기서 인애 외에도 하나님의 품성 중에 신실, 거룩, 정의 등을 추가하고 회개 권면에서 인애와 정의를 언급한다. 또한 그는 둘째 단락에서 사용했던 2개 모티프들 (아침 구름, 쉬 없어지는 이슬)을 4개로까지 늘리는 것이다 (아침 구름, 쉬 사라지는 이슬, 쭉정이, 굴뚝의 연기). 더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이 세 단락의 첫부분에 오는 내용이 점점 고조되고, 또한 뿐만 아니라, 끝부분에 오는 회개-회복 예시 내용도 점점 고조된다.
요컨대, 호세아의 반복 (repetition)은 변화 (variation)를 띈 반복이며 이를 통해 그는 분위기 (mood)를 점차로 (progressively) 고조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법은 결국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한 의도적 글쓰기로 여겨진다. 이는 호세아 선지자의 문학적 천재성을 보이는 외에도 특정 본문들을 절단하여서 그것들을 다시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역사비평가들의 시도가 오류임을 드러낸다. 호세아는 인과성 (causality)에 의해 글을 쓰기 때문이다.
점층법이 전하는 메시지
결국 호세아의 점층법은 언약에 신실하신 인애 (헤세드)의 야웨와 언약에 불충하여 다른 신들 숭배로 치달은 이스라엘을 대조함으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호세아는 바알 숭배가 에브라임의 자기를 높임 (히브리어로 ‘나싸’)에서 시작한 것임을 보여준다. 에브라임의 자기 높임, 바알 숭배, 송아지 우상 숭배, 우상숭배자의 공허성과 허무성 (아침 구름 등 4개의 모티프들 사용)이 차례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4절이 13:1-3과 대조적 내용으로 위치한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바알 (다른 신) 숭배가 왜 나쁜가? 그것은 더럽고 거짓된 잡신을 숭배함으로 거룩하신 야웨께는 죄를 짓는 것이고 그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바예솸 바바알 바야모트’). 분명히 바알 숭배로 죄를 지은 결과 에브라임이 ‘죽었다’고 본문에 명기되었다 (한글개역개정에는 ‘망하였거늘’). 이에 반해 사는 길은 오직 야웨 밖에는 없다고 4절에 나타난다. “벨로힘 줄라티 로 테다 우모쉬아 아인 빌티” (나 외에는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적용: 종교다원주의는 죽음의 길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 문장은 바아르 선언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노선들과 길들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서 선과 진리와 거룩을 보아왔고 경험해 왔기에…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께 명시적으로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 제한하는 하나의 신학을 넘어설 필요를 깨닫고 있다.” (Baar Statement는 1990년, WCC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Resources란에 있음; 필자의 졸역) “Because we have seen and experienced goodness, truth and holiness among followers of other paths and ways than that of Jesus Christ…We find ourselves recognizing a need beyond a theology which confines salvation to the explicit personal commitment to Jesus Christ.”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꼭 명시적으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타종교의 창시자를 믿어도 구원을 받고 예수님이 아닌 야웨만 믿어도 구원 받는 것이 아닌가. 오늘 다룬 본문과 관련해 생각해 본다면,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은 오직 야웨가 구원자라고 했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고 하지 않았쟎은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구원자 야웨는 다윗의 씨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다 (호 1:11; 3:5). 구약시대에는 예수라는 명시적 이름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는 선재해 계셨고 (요 8:56-58), 이 사람으로 오실 아들을 수없이 예언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은 야웨를 믿고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구원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현재 야웨를 믿는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야웨만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야웨를 참으로 영접하는 자는 아들 예수를 참으로 영접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
둘째는, 예수 믿는 길처럼 다른 노선들과 길들 (곧 여러 종교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선과 진리와 거룩과 같은 삶의 표지들이 나타나니 그들의 종교도 결국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바알에게 절하는 사람 (예를 들어, 이세벨)에게도 선이 나타나면 바알종교도 구원의 길이 아닌가. 그러나 타종교인들을 통해 나타나는 선은 구원주 야웨의 은혜 안에서,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타나는 선 (이것을 ‘영적 선’이라 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선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과 관련된 자연적 선이다. 한편, 이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은 자에게는 당연히 영적 선이 나타나게 되어 있지만, 그리고 예수 믿은 자는 죄를 이기고 영적 선이 나타나도록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이니셔티브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택하신 자로 하여금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그에게서 선, 진리, 거룩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의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최덕성 교수의 글 “WCC는 종교다원주의 이단”을 읽어보기 바란다 (인터넷 검색). 최덕성 교수가 거론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로는, 한신대학교의 김경재 박사 (이름 없는 하느님, 2002),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자 칼 라너 (Karl Rahner, ‘익명의 그리스도론’),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인 라이문도 파니카 (Raimundo Panikkar, ‘보편적 그리스도론’), 미국 클레아몬트 신학교 교수인 존 힉 (John Hick, ‘신중심주의 신학’), 폴 니터 (Paul F. Knitter, ‘신중심주의 그리스도론’), 예수 세미나의 로버트 펑크과 존 도미닉 크로산 등이 있다. 최덕성 교수는 요 14:6 “내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와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를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종교가 동등한 구원의 길이라고 보는 종교다원주의는 이단이다. 기독교를 괴멸시키려고 덤벼드는 적이다. 종교다원주의자는 거짓교사이며 이단자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