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9)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9>
보통 학자들은 선지자들이 하는 사역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첫째는 당대 백성들 앞에 나아가 말씀 전하는 것 곧 설교 (forth-telling)요, 둘째는 미래 일을 미리 알리는 것 (fore-telling)이다. 여기서 후자 곧 미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선지자’에게는 한 중요한 특징이다. 왜냐하면 ‘미래 일을 말하는 것’이 선지자에게 있는 기능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때 그가 한 말의 성취 여부에 대한 것을 기준 (신 18:22)으로 제시하는 일이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지자에게 있어서 미래 일을 알리는 것과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그의 사역이 (참) 선지자의 사역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현재 백성에게 나아가 그들의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 뜻에 맞는가를 점검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고하는 일은 모두 다 그 선지자가 그 일을 ‘알아야’ 그것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는 것’ 곧 ‘지식의 수납’ (혹은 ‘인지’)은 현재 것이든 미래 것이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과 그 언약의 조항들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의 조항들은 우리가 아는대로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 (거룩과 사랑과 의 등)과 관련되었고, 또한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시행 및 그 계획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표와 관련이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계획과 그 목표에 무지할 때 혹은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고 다른 영에 속고 있을 때 결국 그는 자기 마음에서부터 나는 것 (자의적인 것)을 말하게 되어 있고 심지어는 마귀가 원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는 현재 이스라엘의 마음과 행위에 대한 설교에 있어서든 미래 일을 말하는 것에 있어서든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것을 말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들과는 반대되는 선지자 자신 혹은 그와 관련되어 있는 현세적인 이익들, 혹은 마귀의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래 예언은 무시되어 왔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표를 전하는 선지자의 사역 -설교든 미래 예언이든-이 중요함에도 이 둘 중에 특히 ‘미래 예언’은 무시되어 왔다. 여기에는 그럴 말한 두 가지 큰 이유들이 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죄와 욕심을 따른 말을 함부로 지껄여댐으로써, 특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자기 정욕에서 나온 상상의 말을 함으로써, 여러가지 폐단들이 나타나게 됨으로 사람들은 참 선지자들의 미래 예언에 대해서도 이러한 폐단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을 ‘나쁜 것’인양 취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구속 계획 그리고 그 목표들을 생각하면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으로 건전한 해석을 할 수 있고, 그것들을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 건전하게 적용할 수 있건만 계시록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수많은 이단들이 출현한 관계로 계시록이나 종말이나 미래 일에 대한 말만 나와도 거부하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의 속담처럼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현실 일과 미래 일에 대해 알려주시는 것, 곧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소위 ‘직통계시’를 성경보다 중요시 하는 이단사이비들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하면 무조건 잘못된 것인양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성령의 음성을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최대한 우리 삶에 활용하는 것이 좋은 일임에도 이것이 현시대에는 점점 무시되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일들이 ‘나쁜 현상들’ 때문에 나쁜 것들인양 인식된 것이다.
둘째는 자유주의자들이 미래 예언을 무시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는 미래 예언들이 무시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특징은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성을 존중하되 초자연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들, 그분이 갖고 계신 미래의 계획들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 예언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기원전 6세기의 다니엘의 미래 예언은 미래 예언이 아니라 그 예언이 역사상에서 성취될 즈음에 그 성취될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 된 상태에서 그것을 예언처럼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라 한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기원전 2세기의 ‘예언으로 각색한 역사’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 포로 예언이 다니엘 때에 이루어졌고, 다니엘 때에 70이레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졌고, 예수 메시야가 오셔서 하신 말씀 곧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예언은 앞으로 이루어질 것인데, 자유주의자들은 다니엘의 예언-성취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예언도 (나아가,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 더 자세하게 한 예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들의 대표자가 자유주의 신학자인 트뢸치 같은 사람이다. 그는 ‘역사의 유추’를 말한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과거에 일어난 것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현재에 일어나는 것이 미래에도 일어난다;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현재에도 일어날 수 없고, 현재에 일어나지 않는 것은 미래에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현재 일어나지 않는 일들, 홍해가 갈라지거나 사람이 물 위로 걸어가는 일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었고, 미래에도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의식을 잃었다가 며칠만에 깨어나는 예 말고) 현재에 육신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자가 며칠 만에 살아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고, 또 미래에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은 역사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들의 실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못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자유주의에 한 발을 담그고, 또 한 발은 어떻게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살려보려는 사람 중에는 바르트 같은 ‘반쪽’ 자유주의자가 있다. 그는 말한다. ‘부활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다만 우리 마음 속의 신앙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다’라고. 부활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못믿으나 믿음은 갖고 싶고, 믿음을 갖자니 이성의 잣대로는 부활의 역사성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러나 어쩌랴, 반쪽 자유주의자도 자유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을! 바르트의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부활이 실제 역사상에서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믿고 그것이 우리 실제 역사에서 성취될 것을 알고-믿는 것이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 바르트의 말을 들으면 ‘이 사람 정말 불쌍하다…’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아내가 만들어준 꽈리고추를 넣은 멸치 볶음을 저녁에 먹었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밥을 두 그룻이나 먹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오늘 나는 아내가 만들어준 꽈리고추를 넣은 멸치 볶음을 ‘실제로는 먹지 않았지만 신앙 속에서’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진짜 먹은 것인가?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 것이 진짜 예수 부활을 믿은 것인가? …자연주의 세계관의 토대에서는 ‘다른 복음들’이 양산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구속에서 시작하여 윤리와 사회 정의와 평화를 말해야 하는데, 구속의 계획과 완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니 그것들은 제껴놓고 혹은 본말전도 (本末轉倒)시켜서 현실적인 정의, 사랑, 평화, 에큐메니칼을 단골 메뉴로 외치게 되는 것이다.
미래 예언–조심해야 하나 존중해야 할 것
무엇보다, ‘미래’ 예언은 ‘현재’ 이스라엘의 삶에 대한 설교와 뗄래야 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따른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삶의 점검이 설교요, 그 약속을 하나님 편에서 시행하시겠다는 것이 미래 일이기 때문이다. 미래 예언은 단지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있겠다는 것이 포커스가 아니다. 즉 선지자가 ‘앞으로 무슨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무슨무슨 일을 하시겠다’는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요, 이를 전하는 것이 오늘날 설교자의 사명이다.
호세아 미래 예언=‘에흐예’ 하나님의 의지
호세아 14:1-8 (히브리어 본문 14:2-9)은 호세아가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 (1-3절)과 미래 예언=여호와의 의지 표현 (4-8절)으로 되어 있다.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 조항들 (계명, 법)에 비추어 이스라엘이 죄악된 상태에 있으니 그 상태에서 속히 돌이키라는 말인데, 이는 설교의 클라이막스이고, 그러나 이스라엘 자체로서는 돌이킬 힘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회복케 하실 것이라 (하시겠다)는 것이 이 설교의 절정에 미래 예언으로 이어져 나타나 있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설교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등등. 이것들은 모두 문법적으로는 미완료인데 모두 여호와의 의지가 담겨 있는 표현들이다. 특히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히브리어 ‘에흐예”라는 표현이다. “내가…일 것이다” 혹은 “내가 …가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의지로 해석하자면 “내가 …이겠다” 혹은 “내가 …가 되겠다”로 된다. 14:5를 이런 이해에 따라 번역하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을 것이다” 또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겠다 (이슬이 되겠다)”이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출 3:14에 나타난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하나님께서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대답하셨다. 영어로 번역하면, I will be that Ehye (“I will be”). 한글로 번역하면, 나는 “에흐예”일 것이다 혹은 나는 “에흐예”가 되겠다. 하나님은 이 절의 두번째 “에흐예”를 명사로 사용하신다. 문맥을 따라 정리하면, 이제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맺어 약속하신 것 (예. 창 15장, 하늘의 뭇별같은 자손, 이 땅, 네 자손이 섬기는 나라를 징벌할지며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을 시행하시는 분이 될 것이다 (혹은 되겠다)는 말이다. ESV, NIV, GWT 같은 영어역본들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I AM that I AM이라고 번역하고 각주를 달아, I will be what I will be라고 첨기하였다. 나는 I AM 보다는 I will be로 보는데, 그 이유는 이 번역이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그 약속을 시행하여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하나님을 잘 드러내는, 곧 문맥에 가장 적합한 번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구속’하실’ 분, 구원이 ‘되실’ 분, 건지’실’ 분, 빼내’실’ 분 곧 능력을 표현하는 이름 ‘엘로힘’ 보다는 언약의 약속을 시행하실 구원의 주 ‘야웨’의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다른 신명들을 가지고 (출 6:3) 나이브한 자료비평에 매달리지만 출 6:2-13을 읽어보면, 언약 하나님이 이제 그 언약에 기초하여 출애굽이라는 구원을 시행하실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나 (우리가 이 이름을 부르며 나아갈 때 여호와께서는 고개를 돌리시고 ‘무슨 일이냐?’ ‘왜 그러니?’ ‘응?’하시며 보신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그 호칭을 변함 없이 부를 ‘나의 이름 [쉐미, 지크리; 출 3:15]라고 하셨기 때문),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별명 ‘에흐예’를 일러주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갔을 때 ‘에흐예’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라고 해라”라고 하셨다. ‘에흐예’ 곧 ‘나는 …가 될 것이다’라는 것에 ‘구원자’, ‘회복자’, ‘구출자’, ‘약속 시행자’, ‘종살이에서 빼내는 자’, ‘치료자’ 등 무엇을 넣어도 된다. 여기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사상과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에흐예’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가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서는 큰 구도에서 반전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호세아서의 맨앞에서는 “아노키 로 에흐예 라켐” (나는 너희에게 ‘에흐예’가 되지 않겠다; 1:9)라고 하신 하나님이 맨 뒤에서는 이제 “에흐예 카탈 레이스라엘”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같이 되겠다 ‘에흐예’ 14:6)이라고 하신다. 호세아와 동시대 선지자 이사야는 이 구원에 대한 시행 계획을 호세아보다 더 자세히, 더 풍성하게 예언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만이, 그분의 의(義)에 의하여, 한 사람을 세우심으로 이 계획을 시행하시겠다는 것이다 (40:1-56:8, 특히 45:13 “아노키 하이로티후 베쩨데크 베콜 데바라카이우 아야쉐르 후 이브네 이리 베갈루티 예솰레아프 로 빔히르 베로 베쇼하드”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한글개역, 여기서 원문의 ‘그’를 ‘고레스’ (Cyrus)로 번역한 NIV는 오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 일’이다 (힌니 오세 하다솨 앗타 티쯔마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그것이 나타날 것이라). ‘에흐예’ 하나님의 포커스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하신다. “내가 예수 메시야 안에서 너를 구원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마,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주마. 앗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르카!”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