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50)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요나서 (2)
요나서의 구조 이해에 중요한 세 가지
요나서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는 3가지가 중요하다. 먼저는 필리스 트리블 (P. Trible)의 연구에 나타나듯 요나서는 1-2장과 3-4장이 서로 조응을 이루는 요소들이 많기에 요나서는 두 개의 큰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러나, 첫째 덩어리의 끝에는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회개 기도시편이 있다는 것이요, 셋째는, 둘째와 연관된 것으로서, 둘째 덩어리는 요나의 회개기도시편이 없고 그냥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괴상한 불안정한 구조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먼저 1-2장과 3-4장에는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첫부분 (1-2장)에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난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으니라” (1:2) 둘째 부분 (3-4장)에도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난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3:2). 첫 부분에는 요나의 완강한 거부가 보인다. 그는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풍랑이 일어도 나 몰라라 배 밑에서 잠을 잤고 죽기를 자청하였다. 둘째 부분에도 요나의 마지못해 하는 태도가 보인다. 3일 길이 되는 니느웨 큰 성읍을 대충 하루 동안 다니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며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첫 부분에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다. 풍랑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풍랑이 멎고 ‘이방’ 선원들 (참고. 1:8)이 목숨을 건진다. 둘째 부분에는 요나의 심판 메시지에 ‘이방’ 니느웨가 회개를 한다. 요나의 전한 말씀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영혼을 건짐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반응이 나타나자 요나는 첫 부분에 바다에 던져 자기를 ‘죽이라’고 했듯이 이번에는 여호와께 화를 내며 ‘죽여 달라’고 한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3).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하는 요나는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기가 전한 말대로 니느웨가 무너지는가) 보려고 성읍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았다. 첫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셨고, 그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큰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심으로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셨다. 이를 통해 요나를 교훈하시고 요나를 구원하신다. 둘째 부분에서도 비슷하게, 하나님은 해가 요나에게 쪼이지 않도록 박넝쿨을 예비하셨고, 벌레를 예비하사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다시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게 하셨다. 하나님이 식물과 동물과 자연 만물을 주무르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이를 통해 요나를 교훈하려고 하셨다. 즉 ‘요나’를 아끼셔서 바다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그’ 시대의 ‘그’ 니느웨 사람들도 요나만큼이나 사랑하셔서 멸망에서 구원하시기를 바라신다는 메시지다. 해가 자기 머리에 내리쬐자 기절할 지경이 된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4:8) 하며 하나님께 화를 낸다. 하나님이,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자,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4:9)고 대든다. 하나님께 화를 이렇게 자주 내며, 직설적으로 퍼부으며, ‘죽음’을 들먹거리며 막장까지 가보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신구약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요나밖에는 없다. 하나님과 선지자의 대화 중에서 선지자의 주저함과 사양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화를 내시는 적은 보았어도 (출 3-4장, 특히 4:14) 거꾸로, 선지자 편에서 하나님께 대놓고 성을 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눈에 띄는 것은 첫째 부분에서는 징계 중의 요나의 회개 기도가 있는데 둘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질문만 있고 요나의 회개의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요나서는 물음표로 남김으로 첫째와 둘째 부분이 많은 대응점들을 제시하던 안정성 있는 구조를 아주 고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다. 여기서 요나서의 전체로 붙은 두 동의 연립주택 중에 두번째 건물이 사탑 (斜塔)처럼 불안정하다. 요나서는 이 점에서 괴상한 불안정을 드러내고 독자에게 긴장을 유발하며 뭔가 생각하게 하면서 맺음한다. 즉, 첫째 부분에서 요나는 막상 자기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2:2),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2:10)하나, 둘째 부분에서는 부르짖는 니느웨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조치를 보고서는 이를 못마땅해 하고 그 사랑이 잘못 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본문 상으로는 이 회개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자기 아닌 남의 구원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모진 마음을 품었는데 이에 대한 회개가 나타나 있지 않다. 이기적 언약백성주의, 이기적 이스라엘민족주의에 대한 회개가 나타나 있지 않다. 요나 자신의 죄, 요나가 속한 언약 공동체에 대한 죄의 회개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른 선지서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 주제가 요나서의 끝에서는 생략된 채로 있는 것이다.
해리슨과 조휘 교수의 인사이트
롤란드 해리슨 (R. Harrison)은 그의 구약서론에서 이렇게 쓴다. “…또한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완악하고 믿음이 없는 것으로 악명 높은 유대인들에게 유익한 교훈을 준다 (마 12:41)” (구약서론, 504-5쪽).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의 조휘 교수도 비슷하게 판단한다. “이 구조에서 요나서의 종결부가 상당히 강조되고 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등의 해소에 관한 부분은 독자의 판단에 남겨진다. 즉, 요나와 더불어 독자는 4장 4절과 11절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초청된다…요나서의 실제 독자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은 있으나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지 못하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들의 통념에 도전을 준다. 그들은 그들뿐 아니라 이방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 (조휘, 소선지서: 요나서 교안) 학자들의 이와 같은 이해와 통찰력은 정말 훌륭하다.
그러면 요나서의 1차 독자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요나서를 읽는 1차 독자인 여로보암 2세 시대의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요나서를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호세아와 이사야의 증거를 통해 아는 것은 그들이 심히 썩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네 하고 교만을 떨면서 음주와 가무와 호화와 사치와 음행에 중독된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단 한번의 심판 메시지에도 왕부터 백성까지 가축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처절하게 회개하고 죄악의 행위를 돌이킨 니느웨 사람들을 보아라! 이들은 너희가 이방 죄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다. 너희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유린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한 마디 말에 이들은 떨면서 회개하였다. 십계명도 없고, 제사도 없고, 선지자도, 말씀도 없이 돼지처럼 개처럼 살던 이들도 떨면서 회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아, 너희는 어떠냐. 내가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냈건만, 그렇게도 자주, 그렇게도 많이 보냈건만, 너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희가 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너희는 영원히 안전하다고 하느냐. 죄를 밥 먹듯 지으면서도 나의 자비가 너희에게 영원할 것이라고 믿느냐. 내 이름에 먹칠을 하고도 교회당 베름빡에 분(糞)칠을 하고도 너희가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라 하느냐. 너희는 개 같은 족속들, 또는 돼지 같은 족속들로 생각되는 자들의 운명에 얼마나 치심하느냐. 날마다 귀신에게 분향하며 죽은 자들에게 축문을 읽으며 무당에게 자신의 머리를 들이미는 자들의 운명을 얼마나 슬퍼하느냐.”
회개와 선교로 이끄는 요나서의 괴상한 구조
요나서의 괴상한 불안정한 구조는 우리를 회개와 선교로 이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짐승 같이 살며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향하여 오히려 슬퍼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작 많은 말씀과 긍휼 속에서도 실제로 개와 돼지에 해당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회개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 나, 나의 안일 (安逸)과 자만 (自慢)을 보게 된다. 즉, 구조적으로 볼 때 요나서의 끝부분 (4장 11절 다음)은 2장에 있는 요나의 회개 기도 같은 회개 기도 (결단, 구원주에 대한 간절한 소망, 감사의 예배)가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요나 개인 뿐 아니라 요나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의 회개 기도가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공백, 그 여백을 내가, 우리 믿음의 교회가 채우라고 하신다. 그 고집을 누가 꺾겠나 하는 요나,아무도 못말리는 한 성질 하는 요나, 그 요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면, 혐오해서 다가갈 수 없던 사람들에게 다가살 수 있게 된다. 또,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면, 그들의 회개를 거울 삼아 나 자신의 깊은 내면을 보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주장하시면, 그 때 나는 혐오스런 나를 보고 돌이켜 다시 거룩하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면,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리는 박넝쿨을 아끼던 나도 이 시드니의 혐오스런 우상숭배자들을 아낄 수 있게 된다.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