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아모스서 개관 – 짧고도 찬연한 일몰의 시간을 지날 때
과거 우리 한국사회에서 꽤 인기 있던 구절이 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5:24) 아마 한국사회가 처해있었던 독재와 비민주적 세력들에 의한 억압들을 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외쳐졌던 구호였을 것이다. 시궁창 같은 물을 흘리는 사회에 대한, 또한 사악한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구절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흘려 보내기 보다는 불의와 부정이 가득찬 시궁창 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자신들의 국력에 대한 긍지와 국제정세의 호전등에 기인했을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왜곡된 신뢰가 그 바탕을 이루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의 보증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언약의 규정과 의무에 대해서는 염두해 두지 않았다.(3:1;9:7) 이렇게 신앙이 내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이교도 신앙으로 변질될 위험에 처했고 실제로 또한 그러한 길을 가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2세(BC793-753년)가 다스리고 남유다는 웃시야(BC792-740년)가 치세하던 때였다. 특별히 아모스는 커다란 성공과 어두운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던 북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여로보암2세는 동북쪽으로는 다메섹이 북왕국을 지배하여 영토의 대부분을 정복했던 시기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왕하14:25-27) 또한 당시의 앗시리아는 우라루트(Urartu:지금의 아르메니아)로 부터의 심각한 위협과 바벨론 문제로 인해 이스라엘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남쪽상황은 어떠했나? 당시의 이집트는 리비아출신의 왕들의 통치하에서(제22,23왕조:BC950-730년) 오랫동안 무기력한 시기를 보낸다. 이 시기가 끝날 무렵 나일강 삼각주의 여러 지역들이 이집트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한다. 따라서 남쪽의 강국인 이집트 역시 이스라엘과 유다를 간섭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여로보암2세 때는 짧은 기간이나마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주변 상황으로 인해서 당시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제국 시절의 영토를 거의 포괄할 정도가 되었다.(왕하14:25)
이런 군사적성공과 영토확장의 결과로 막대한 부가 이 두 왕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영토확장과 맞물려 경제적 호황을 누리는 때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비록 그때가 외적으로 찬연함을 자랑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짧고도 찬란한 일몰의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2세가 죽고(BC743년) 그로부터 불과 22년이 지난 후 북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살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급격한 몰락의 길로 치달았을까? 당시 북이스라엘은 외적으로 강대국이었지만 내부로는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끈이 끊어진 상태에서 표류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교적 평화스럽고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도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현상들이 폭발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채 불의와 탐욕, 부도덕과 향락주의가 배금주의와 함께 독버섯처럼 만개했으며,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며 각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대한 아모스의 사형선고>
이렇듯 인간의 눈으로 보고 세속적 평가기준으로 볼 때 비교적 모든 상황들(국제정세, 외교, 경제적)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거짓 풍요로 인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샬롬을 서로 이야기할 때, 돌연 아모스는 그 사회에 비수를 꽂는 메시지를 선언한다. “너희는 죽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만개한 최상의 국력을 자랑하는 혈기 있는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장송곡(a funeral song)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사망을 선포한다.(5:1-2) 여기서 처녀 이스라엘이란 당시에 가장 슬픈 감정의 표현법이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의 죽음, 다시 말해 자신의 이름을 이을 자녀가 없는 죽음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주체할 수 없는 격한 슬픔의 제공처였다. 이것을 당시의 이스라엘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모스는 이 장송곡적 표현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공표함으로 인해 임박한 『국가 이스라엘의 죽음』에 대해 통곡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모스는 장송곡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일까? 왜 그토록 잘못되었다고 격분하는 것일까? 사실 아모스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죄의 목록들은 일반화시키면 오늘날의 징역형이나 집행유예 정도의 죄라 할 수 있다. 저울을 속이고, 부유층이 사치하고, 재판하는 사람이 뇌물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준엄하게 사형선고를 내리신다. 다시 말해 아모스로 하여금 장송곡을 부르게 하시고 그 후에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사라진다. 과연 이런 하나님의 판결이 공정하신 것일까? 자기 백성에 대해 그토록 매몰찰 수 있으시단 말인가? 그 답이 3:2에 나와있다.“내가 너희만 알았나니.”이 말속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이 담겨져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19:5-6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신 것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기대와 사명이 담겨져 있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특권을 받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신 마음을 삶으로 증거할 존재로 “너희만 알았다. 너희만 택했다. 너희만 기대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헛된 영광과 허욕, 탐욕과 자기만족을 자신들의 신(神)으로 담는 우상숭배자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진정한 삶이 오직 하나님과 너희 이스라엘 사이에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희의 축복이요 특권임과 동시에 의무요 책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장자의 특권, 제사장나라의 특권을 주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쓰레기 같이 불출되는 주변의 우상숭배자들의 불건전한 탐욕의 물줄기와 결별해서, 착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정말 “다른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 “누구나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우정의 착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들에서 실패했다. 하나님의 착하신 마음이 담긴 율법을 따라 사랑과 공의와 절제가 어우러지고, 서로를 돌보고 세우는 형제우애적 공동체가 아닌, 주변의 쓰레기 공동체와 방불한 모습으로 한없이 추락했다. 그들의 추락한 모습이 어떠한가? 올바르게 살면서 갚아야 할 빚이 없는 사람인 의인(2:6)조차도 매매하고, 신 한컬레를 위해 가난한 자를 팔았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거늘 오히려 그들을 의도적으로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사회풍토가 만연했다. 또한 상류층은 사치로 흥청거린다.(6:1-7) 풍요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부유해졌으며 어떻게 부를 사용하는지를 물으신다. 8:4-6에서 부정직한 상업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데, 곡식을 측량할 때 규정보다 작은 기구를 사용해서 남은 것으로 부당이익을 취하거나(8:5), 곡식에 다른 것을 섞어서 파는 행위 등으로(8:6) 경제적 부를 이룬 사람들이 시대의 평균을 훌쩍 넘는 과도한 사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사법제도의 부패였다. 당시 사법제도는 성문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성문에서는 법의 정의가 이루어져야 했다.(5:7,15,24;6:12) 여기서 법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책임을 지닌 장로들이 재판을 할 때, 뇌물로 인해 “올바르게 사는 의인들”이 소송에서 패했다. 따라서 사법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업상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나 자신이 지지 않은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 발생해도 그들이 의지할 수단은 없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당시 이스라엘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당시 고대사회의 곳곳에서 심지어는 오늘날의 현대사회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어두운 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인가? 너희 이스라엘은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의 진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지 않을 때 발생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장로님 세분이 대통령이 되셨는데 그로 인해 한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전도에 긍정적인 요인이 된 적이 있었는가? 그렇다고 말하기가 선뜻 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또한 기독교신자가 사장이 되나 불신자가 사장이 되나 그 형태가 똑같고, 교인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모습이나 교회 문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장사하는 모습이 똑같다면 이 어찌된 것일까? 결국 아모스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은 “너희는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구조>
결국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닮아 주변과 다름을 추구하지 않고 똑같이 시궁창물을 흘리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육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모스서 전체의 구조를 결정한다.
먼저 1장-2장에서는 열방에 대한 신탁이 등장한다. 다메섹 – 블레셋 – 두로 – 에돔 – 암몬 – 모압 순으로 심판을 선언하는데 주로 그들이 전쟁 때 향한 잔혹행위를 지목하신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칼날 같은 책망의 혀 끝은 유다(2:4-5)와 이스라엘(2:6-8)을 향한다. 이스라엘은 주변 적국들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는 신탁을 듣다가 갑자기 튀어 오르는 덫과 같이 자신들에게 닥쳐온 심판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둘째 단락은 3-6장인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의 말씀들이 전개된다.
셋째 단락인 7장-9장에서는 그들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다섯가지 환상을 보여주신다. 처음 두 환상인 메뚜기 떼와 불(가뭄)은 농경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재앙인데 이것들은 아모스의 중재로 인해 심판이 유예된다. 세번째 환상인 다림줄은 율법을 의미하는데 이 다림줄인 율법으로 측정해볼 때 이스라엘은 어긋나있다. 벽이 어긋나있는 성채가 유지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다림줄인 율법에서 어긋난 이스라엘의 무너짐을 경고 한다. 네번째 환상인 여름광주리 환상과 다섯번째로 성전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임을 선언한다. 결국 아모스서 전체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총체적인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비록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 때에 제2의 전성기로 유래 없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가파른 상승으로 인해 환호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고 이방민족화 됨으로 인해 시궁창 같이 된 허물뿐인 공동체에 음울한 장송곡이 울려 퍼짐을 보았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언약백성 삼으시고 “다르게 삶”에 대한 비젼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적 탐욕에 사로 잡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망각함으로 멀리 갔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견고한 구원신앙이 모든 것을 덮어주지는 않는다. 이 시대에도 만연하는 번영의 신학속에서 성공 신드룸에 걸려 하나님의 진정 어린 심정보다 세속적 영화에 더 깊이 목매고 있는 것이 혹시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혹시 한국 교회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믿고 말씀속에 확립된 공법과 정의를 향한 내공에 소흘히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일까? 겉모습을 보고 스스로 위안하기에는 우리가 참된 경건을 너무 많이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로보암2세 때의 아모스 시대가 외형적으로 대단한 때였으나 내부적으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짧고도 창연한 일몰의 시간이었듯이, 우리 역시 말씀과 성경의 인도아래 순종하고 각성하여 다름을 나타내는 공동체로 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정말로 짧고도 찬연한 일몰의 시간이 안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아모스서의 핵심주제인 “우리의 다른 모습” 즉, 진정한 경건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섬기고, 거짓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맑은 물을 이 세대에 흘려 보낼 때 우리세대는 짧고도 창연한 일몰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풍성이 나타나는 열정적 한 낮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