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학개서 개관 : 진정한 성전의 재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시소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따르자니 믿음이 울고, 믿음을 따르자니 현실이 우는 상황이 항상따라 다닌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사는 삶이 실패하면 그에 따라 현실생활에도 문제들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학개서는 이와 같이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던져진 말씀이다.
남유다는 B.C.586 년에 멸망을 당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표방한 우상숭배와 죄악에 대해 나타났던 하나님의 정의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끝내지 않으시고 회복을 준비하셨다. 남유다를 집어 삼킨 난공불락의 성과 같은 바벨론이 메데와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왕 고레스를 사용하신다. 고레스가 B.C.539년에 칙령을 발표하여 그들이 본토로 돌아가 성전을 짓고 살기를 허락한다. 굉장히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고레스 칙령이후가 문제이다. 우리는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의 조국을 향해 떠날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그때 고레스의 칙령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운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50년이 지남으로 인해서 바벨론의 번영에 동참했고, 바벨론에 삶의 터전을 세운 사람들이다. 따라서 바벨론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대신 바벨론에 쌓아 놓은 재정적 안정과 평안을 선택한다. 실제로 고토 유대를 향한 사람들은 불과 5만명 정도였다 (스 2:64 : 느 7:66) 또한 이 소수가 유대땅에 왔을때 그들은 혹독한 환경에 직면한다. 폐허와 같이 버려진 땅이었다. 또한 그 땅에 들어왔을 때 그곳에 남아있는 주인들과 분쟁이 불가피했다 (겔 11:3,15). 그땅에 남아 있던 하층민들이 그들이 놓고간 소유를 취하고 있어서 권리의 문제등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이웃민족과 페르시아 관료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스 4:1-5, 5:3-5) 그러한 환경은 이사야가 말한 미래의 청사진과는 딴판이었다. 사막에는 꽃이 피지 않았고, 흩어진 백성 전부가 귀환한 것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시온은 영화롭지 않았으며, 이방 민족들이 엎드려 굴복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뒤 얽힌 상황속에서 그들은 귀환이 시기 상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 귀환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팽배하면서 서서히 성전 건축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성전 건축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삶의 경영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삶에 치중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당면한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대부분이 바벨론 태생으로 낯선 토양과 불안정한 날씨, 흉작과 적응의 어려움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도외시한 채 자기의 삶에만 치중했지만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 되었다. 이렇게 귀환한 이후 18년이 유야무야 지나가면서 이제는 페르시아에서도 고레스의 칙령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었다. 18년이 지나는 사이에 페르시아도 새로운 정치적 상황이 대두되어 다리우스가 황제가 되고 유다에서도 1차 귀환의 주역이었던 세스바벨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스룹바벨이 등장하는 등 새로운 지도력의 변화를 맞이하자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재건 공사를 독려하게 된다. 그리고 다리우스 6년인 B.C. 515년에 성전이 재건되고 봉헌된다. (에 6:13-18) 이른바 제 2성전인데 이것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무너질때까지 약 600년간 유대사회의 중심역할을 하게된다. 학개는 이 제 2 성전의 재건을 준비하는 시기에 활동한 한 예언자의 고뇌와 이상을 읽게해준다. 따라서 학개서에는 이런 배경하에서 학개가 성전 건축을 독려한 4편의 메세지 내용이 담겨 있다. 학개가 받아 전한 신탁의 메세지의 특징은 받은 날짜와 순서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첫번째 신탁 (1:1-11) : 다리오왕 2년. B.C. 520년 6월 1일
학개는 작황이 실패한 근본이유를 들면서 성전 건축을 독려한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유대사회는 성전이 그 당시에 재건되어야 하느냐 마느냐(1:2)에 대해 논의 하면서 성전 공사 연기를 합리화 시키기에 쉬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성전의 기초가 놓여진후 16년이 지났어도 폐허처럼 내버려 두었다. (1:4) 자기 집과 밭, 과수원에는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아직 시간이 이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1:2) 하나님 섬기는 일에는 소홀히 하였다. (1:9)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지극한 공을 들였지만 작황의 실패로 경제적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학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선권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기집일에만 집중하고 하나님 집일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해답으로 성전을 건축하자고 독려한다(1:8). 왜 너희들이 많이 뿌렸으나 수확이 작고, 많이 먹었지만 배부르지 않고, 많이 마시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고 일한 댓가로 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주머니에 넣은 것처럼 나가 버리는가?(1:6) 하나님의 관심에 무관심하고 언약백성으로 살기를 주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첫번째 설교에서 학개는 문제의 중심에 있는 유대의 문제 원인을 찾는다.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 지니라 (1:5,7). 이에 대해서 백성들은 열정적으로 반응한다 (1:12-15)
두번째 신탁(2:1-9) : 다리오왕 2년. B.C. 520년 7월 21일
이렇게 시작된 성전재건의 공사가 약 2달이 되어갈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실망이 생겼다. 왜냐하면 지금 지어지는 제 2 성전이 솔론의 제 1성전에 비해 외관상 초라 했기 때문이다(2:3). 아마 사람들이 속으로 적잖게 실망하는 분위기였던 것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전이 이전에 장엄했던 솔로몬성전보다 실제적으로 더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단언하신다.(2:9) 이전의 성전보다 외관의 화려함은 현저히 떨어져서 사람의 눈에는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2:9)
“어찌하여” 보잘것 없는 제 2 성전이 화려했던 제 1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울 수 있는가?
그곳은 외관상 초라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와 같이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실것이고(2:4-5),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하심으로 인해 그들의 모든 두려움을 제거해 주셔서 용기있는 담대한 삶을 살게 하실것이기 때문이다. (2:5) 또한 만국의 보배로 채우심으로 만민이 동참하는 길을 열어 주심으로 만백성들이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성전을 화려한 물질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우실 것이라고 위로하신다. 따라서 지금 그들이 짓고있는 성전은 외관상 초라해 보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뛰어난 성전이 됨을 백성들에게 통지하신다.
세번째 신탁 2:10-19 : B.C. 520. 다리오왕 2년 9월 24일
그렇다면 이렇게 지어진 성전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건축되고 있는 도중에 앞으로 성전에서 제사하면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제사장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신다. 첫째, 사람이 거룩한 제물인 고기를 옷자락으로 쌌는데 그 옷자락이 떡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다른 음식물에 닿으면 어떻게 되겠냐는 질문이다(2:12). 거룩한 제물을 싼 옷자락이 다른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제사장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렇다면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사람이 음식물중 하나를 만지면 부정해지느냐고 묻는다. 제사장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무슨교훈인가? 성전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신다. 거룩한 제물인 고기가 속된것을 거룩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바쳐진 제물이 그들의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시체를 만진 사람으 즉 인격체의 부정은 전염되는것 같이, 성전건축과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내버리고 자기의 부귀와 안일만을 전념했던 부정이 그들의 모든일과 나라와 공동체를 부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즉, 제물이 핵심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인격체가 중심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성전을 주신 이유의 근본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참회하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변화된 너희의 인격만이 다른 사람들과 공통체에 전염되어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원천적 교훈이다. 하나님이 중요시 하시는 것은 제물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 성도라는 인격체이다. 이것이 지금 지어지는 성전의 참된 의미이고 역할임을 보여준다.
네번째 신탁- 세번째 신탁과 같은 날
성전의 궁극적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전은 단순히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에만 연관 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의 상징이다. 성전을 통해서 하늘과 땅의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은 스룹바벨에 의해 유대공동체의 삶을 변혁시키는 성전이 지어졌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변혁시킬 참된 성전의 도래를 명시하신다. 진정으로 인류전체를 포함한 우주의 회복이 참 성전되신 예수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요2:21), 또한 이땅의 성전으로 세움받은 성도들에 의해 맛보게 될 것을 (고전 3:16, 6:19) 선포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4번의 신탁을 통해서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 보이신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성전건축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기필코 그 일을 이루시는 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참된 의미를 회복한 성전이야 말로 그 시대를 살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세우는 복된 하나님의 통로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고, 우리를 통해 이 땅에 비춰지고 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참된 소망인 성전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이다.
때문에 우리는 본서에서 성전 건축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어린 독려를 발견해야한다.
첫째,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1:8)”라 말씀하신다. 레바론의 백향목이나 황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걸어 올라가 베어 가져올 수 있는 나무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성전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과 정성과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화려한 교회나 성당의 외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그리고 산에가서 베어오는 나무는 누구나 동참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둘째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있다.
성전건축에 대한 독려말씀속에 하나님께서는 “굳게할지어다 (2:4에 3회), “두려워말라 (2:5), “너희와 함께 하리라(2:4)”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이것은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가나안 땅에 입성하려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상기시켜준다. (수 1:5-9)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분투 하는것은 바로 우리 시대에 감당할 진정한 영적 전쟁이고, 그 지극히 선한 우리의 열정을 행해 하나님께서는 격려의 말씀과 손길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가 이 시대의 성전이기 때문에.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