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그리스·터키·한국 여행공부
인문학자 다산을 찾아서

방문 일시
2019년 11월 2일 (토) 오후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늦은 시간 전남 강진읍에 도착하여 프린스호텔에서 묵게 됩니다 (강진군 강진읍 보은로 113-1, 전화 82 61 433 7300. 저녁과 다음날 아침과 점심 식사는 식당에서 할 예정임). / 3일 (일) 아침부터 (1)사의제, (2)영랑생가와 문학관, (3)다산초당과 백련사 (다산초당, 정석, 동암, 서암, 천일각, 백련사 등, 시간이 하락된다면 다산박물관을 둘러 볼 것인데 입장료는 1인당 1500원) 등을 방문한 다음 오후에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과 하회마을로 떠나는 1박 2일의 일정입니다. 가이드는 강진군청 관광과 문미정 선생 (82 61 433 4114)이 섬겨주실 예정입니다.
방문의 목적
다산 정약용은 18, 19세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문학자라고 보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물론 다산은 여러가지 다른 명칭으로도 불리웁니다. 사상가, 철학자, 실학자, 경륜가, 고위 관리, 의학자, 약학자 등을 붙일 수 있습니다. 위당 정인보선생의 말대로 ‘다산 한 사람의 연구는 곧 조선사, 특히 조선 근세사상사의 연구요 조선의 혼을 연구하는 것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하여튼 우리가 강진을 방문하는 목적은 인문학자 다산을 만나 보려는 것입니다.
다산의 생애

1762년 경기도 광주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정조 13년에 대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했습니다. 본래는 성리학자 (유학자)였으나 3째 형 정약종 (훗날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초대 성도로 순교를 당했음)을 따라 천주교를 받아드렸으나 (세례명 요한) 그 후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고 1801년 12살 먹은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어린 순조 대신에 정순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완전히 노론의 편에 서서 당시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발본색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남인을 천주교와 결탁되었다고 몰아 부치면서 1801년 그 유명한 신유사옥을 일으킵니다. 그 이전 정조는 비교적 카톨릭에 대하여 온화정책을 펼쳤습니다만 왕권이 바뀌자 노론 (벽파) 세력은 남인 (시파)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천주교도들은 인륜을 무너트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학 (邪學)의 무리들이다. 그들은 금수와 마찬가지다’ 정순왕후는 이 하교를 통하여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 강완숙 등 300여명을 죽였습니다. 한 때 천주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지만 그 후 이념의 차이로 천주교를 떠났던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참수는 면했지만 결국 노론세력에 밀려 잠시 경상도 장기를 거쳐 마침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어 그 곳에서 18년이나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둘째 형 정약전도 그 때 함께 유배되어 그는 전라도 흑산도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다산은 40살에 시작된 귀양사리를 57까지 하다가 1818년 귀양지에서 풀려난 후, 고향인 경기도 광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다가 183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이어진 황사영백서는 정약종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이 이 신유박해의 실상을 적어 당시 북경에 있던 구베아주교에게 보낸 밀서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사건입니다. 황사영백서는 현재 바티칸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으며 충북 제천에 있는 배론성지에는 황사영이 머물던 토굴과 기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요저서

3대 저서로는 1) 목민심서 (牧民心書) –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지도자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기술한 책과 2) 흠흠신서 (欽欽新書) – 판결과 형벌에 대한규범을 기술한 책과 3) 경세유표 (經世遺表) – 각종 세제와 과거제도 등 국가경영에 대한 법치주의적 제도를 기술한 책이 있습니다. 그 외 자신의 일대기를 기술한 ‘자찬묘지명’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주역사전’ ‘대학강의’ ‘시경강의’ 등 600여권이 있습니다. 정인보 선생은 아마 한자가 생긴 이후 한 사람이 쓴 책으로는 다산 보다 더 많은 책을 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타 창비에서 1991년 초판을 찍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박석무선생의 다산에 대한 연구서들이 있습니다.
인문학자 다산의 핵심사상
주자학 (朱子學) 만을 절대시하여 이기론 (理氣說)과 예론 (禮論)에만 골돌하던 조선 후기 18, 19세기에 다산은 경세치용의 실학을 세우려고 노력한 인문학자였습니다 (경세 [經世]란 ‘세상을 다스림’이란 뜻이고 치용 [致用]이란 ‘실제로 쓰임새가 있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다산은 조선 후기 공리공론에만 머물러 있던 성리학을 극복하고 백성들이 실제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실질적이며 실용적인 제도 개혁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다산에 앞선 실학자들로는 이율곡,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만 다산은 이런 선대의 모든 실학 사상가들의 생각을 집대성했다고 봅니다.
이들은 당시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구 계몽주의 이후 펼쳐지기 시작한 합리성, 자연과학의 발전, 종교의 다양성 등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실학에서는 이런 영향을 받아 주자의 이기론을 거부하고 고증, 경세, 목민 같은 실제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다산은 일찌기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그 책임자로써 도르래를 발명하여 사용케 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다산은 유학의 병폐와 타락을 비판하고 성리학과 양반제도와 과거제도를 반대했습니다. 다산은 아직도 어두웠던 시대 속에서 합리적이며 실제적인 신유학을 세워 봉건 사회의 모순과 계급의식을 극복하려고 애를 쓴 혁명적 사상가라 하겠습니다.
특히 다산은 인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맹의 양기설 (養氣設)을 목민사상과 연결하였습니다. 다산은 특정한 사람을 성인으로 추대하거나 권위주의에 빠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은 그 누구든지 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忠孝 못지않게 윗사람 역시 아랫사람에게도 慈愛를 베풀 줄 아는 상호존중을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다산은 당시 사회적 약자들인 과부, 홀아비,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들에 대한 국가적 애민사상 (愛民思想)을 제도화하도록 부르짖었습니다.
특히 다산은 그의 전론 (田論)을 통하여 당시 인구의 35%를 넘어 섰던 농노들에게도 토지를 재분배토록 파격적 주장을 했습니다. 그는 5천년 한국사에서 최초로 토지공개념을 주장한 사람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다산의 사상은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세치용 (經世致用)’입니다. 사회개혁을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그 핵심은 토지제도의 개혁이었습니다. 둘째는 ‘이용후생 (利用厚生)’입니다. 외래문물,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농공상 모두를 제도와 기술로 도와 富國安民을 이루자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실사구시 (實事求是)’입니다.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고 실증주의적 접근을 하자는 주장입니다.
다산은 조선 후기 최초로 Modernism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사대주의를 버리자! 공리공론을 버리자!’는 표어를 내걸고 근대지향적 학풍을 조성하여 인간평등을 주장하고 ‘무실역행 (務實力行), 열매를 맺도록 진력하자는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증을 통한 합리성과 통합적 사고를 중시하고 민본사상과 민주사상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둘러보려는 다산의 흔적들과 김영랑 생가와 문학관

– 다산초당 (茶山草堂) :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언덕에 자리함. 18년 유배 생활중 11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많은 책을 저술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다산사상의 산실이라고 하겠음. 원래는 초가집이었을 텐데 50년대 기와집으로 지은 것인데 다시 초가집으로 복원할 예정. 원래는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으로 귤동마을에 사는 해남 윤씨의 자손들이 여기에 초가집을 짓고 천여 권의 장서를 갖추어놓고 학문을 하던 곳이었는데 다산이 이곳으로 오게 됨. 마침 정약용의 호가 다산이었는데 윤당의 초가집이 있던 산 이름도 다산이어서 자연스럽게 ‘다산’이라고 불리웠음. ‘다산초당’은 추사의 글체를 집자한 것이며 ‘보정산방’ (寶丁山房)은 추사가 직접 쓴 글이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여기는 산방).
– 정석 (丁石) : ‘정약용의 돌’이라는 뜻으로 초당에 남아있는 다산의 유일한 친필이며 귀양지를 떠나기 전에 직접 썼다고 전해짐. 군더더기 없는 그의 성품을 잘 나타냄.
– 동암 : 다산의 거처, 저술하며 손님을 맞던 방. 글씨는 다산의 글체를 집자한 것임.
– 서암 : 다산의 18제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공부했던 방. ‘다성각’이라고도 함.
천일각 : 다산 생전에는 없던 이 누각은 1978년에 세웠는데 다산은 여기에 와서 멀리 바다와 흑산도를 바라보면서 사색을 했다.
– 백련사 : 839년 신라 승려 무염이 창건한 백련사는 여러 곳에 있어서 ‘만덕산 백련사’라 함. 다산이 유배 생활 중 스승이요, 벗이요, 대화의 상대자였던 혜장선사가 있던 곳으로 초당에서는 800미터 쯤 됨. 가는 길목은 야생차와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음.
– 기타 : 초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다산의 18 제자중 하나인 윤중진의 묘와 묘비가 있음. 다산초당에는 차를 끓였다는 커다란 바윗돌과 작은 연못과 연못 가운데는 돌을 쌓아올린 작은 석가산과 약천도 있음.
– 사의제 : 강진읍내에 있는 4대 다산성지 중 하나임. 당시 귀양온 죄인은 아무도 받아주지 않던 시절에 강진의 한 주막집 주모가 다산을 받아 자기집 뒷방에 거처를 마련해 줌으로 그는 여기에서 1801년부터 1805년 까지 5년간 머뭄. [천명이 모두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속세에 / 단정한 선비 하나 의젓하게 살아 있으니 / 모두들 손가락질하며 그 선비 미쳤다고 떠들어대는구나!] ‘사의제’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 4가지를 갖춘 집’이란 뜻으로 첫째는 생각을 바르게 하고, 둘째는 용모는 단정히 하고, 셋째는 말은 적게 하고, 넷째는 행동은 신중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 영랑생가와 문학관 : 강진읍내에 있는 강진 태생 김영랑 (1903-1950, 본명 김윤식)의 생가와 문학관을 둘러볼 예정임. 북에는 김소월, 남에는 김영랑이라 할 정도로 우리나라 순수시와 서정시인의 대표자 중 하나. 1906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 짜리 집. 서울 휘문고와 일본 청산학원에서 공부한 시인으로 박용철, 정인보, 변영로, 정지용, 이하윤 등과 같이 1930년대 동인지 ‘시문학’을 만들어 일제시대의 설음을 문학을 통해 표현해낸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임.
대표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 /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 모란이 피기 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그 슬픔의 봄을”
참고도서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유홍준, 창비, 1993년 초판
2)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한길사, 2003년 초판
3) 그외 ‘경세유표’(이익성 옮김) / ‘정약용’(함규진 지음) / ‘조선의 의인들’(박석무 지음) / ‘조선사람 조선의 글’(다산의 서예) 등이 있음

홍길복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