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인문학과 과학: 과학으로 조명하는 인간의 본질
‘나는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것은 나의 사상, 주의, 주장뿐만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행하는 습관적 행동 및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를 감추거나 꾸미는 것은 불가능하며. 혼자 있을 때나 무심코 드러내는 무의식적인 생각과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줄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담론’의 저자 신영복 선생은 “생각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다”라면서 “생각은 그 만큼 완고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코끼리와 개미가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개미가 술래가 되어 코끼리가 숨었는데, 몸집이 커서 금방 발각되었다. 코끼리가 술래가 되자 개미는 코끼리가 들어올 수 없게 작은 사원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쉽게 개미가 숨은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개미가 평소의 습관적 행동대로 신발을 벗어 놓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인도 우화).
영혼(soul, spirit, psyche)은 간혹 ‘정신’이라는 단어와 구분없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영혼이 혼, 정령, 귀신 등의 의미로 쓰일 때 검증 가능한 형이하학적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은 자각, 의식, 제정신(Consciousness, awareness, wakefulness, alertness, responsiveness, sentience)을 의미할 때 동물 행동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네덜란드의 신경과학자 란달 쿠너는 “정신은 물질적 토대 없이 존재하기 힘들며 마음은 인간의 뇌라는 생물학적 기관의 산물이다”하고 주장했다.
인간: 관찰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주체 (I am consciousness)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다. 한때 나였던 것들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눈 내리던 겨울 불안함과 초조함 속에 엄마 손에 이끌려 가던 국민학교 첫 입학식의 나, 학교에서 집에 오면 오줌을 저리며 가슴에 뛰어들어 얼굴을 핱아주며 반기던 강아지의 죽음을 괴로워하던 나,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도, 30대·40대의 나도 이젠 더 이상 없다.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이 그것들을 나라고 느끼게 한다.
그런 기억은 삶을 비가역적인 무엇으로 만든다. 사랑이 불가역적인 반응인 이유도 기억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이 남긴 기억으로 인해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처음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우리를 늙게 한다. 첫사랑을 다시 할 수 없고, 첫 키스를 새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것을 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기억을 풍화시키고, 죽음은 마침내 기억을 소멸시킨다. 나는 한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타자의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기억이 있다. 생명이다.
생물학적 인간학
인간도 다양한 생명체들 중 하나라는 관점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의 물음에 접근하는 것이 바로 ‘생물학적 인간학’이라고 한다. 다윈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 진화론에서는 유사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동물과 비교한 결과, 인간은 무척추, 척추동물인 물고기, 파충류, 포유류 유인원 인간 순으로 진화되었다고 믿으며, 모든 정신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뇌)을 기반으로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견해만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인간을 전적으로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과 반응에 따라 해석하려는 위험이 있어,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치론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사실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인간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비인간화를 가속화시킬 우려가 있다. 인간은 분명히 물질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과론적인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이지만, 현재 이러한 방법만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생명체는 사건을 끊임없이 재현한다. 세포가 분열하여 똑같은 세포가 나오고, 그 세포들이 분열하여 다시 똑같은 세포를 만든다. 하나의 세포가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고, 그 알은 다시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는다. 아버지가 딸에게 파란 눈을 물려주고, 그 딸이 어머니가 되어 다시 그 파란 눈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기억하는 것 마냥 유사한 행동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생명은 그 탄생이후 단 한순간도 재현을 멈추지 않았다. 38억년 동안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기억, 생명은 바로 그 영속하는 기억이며, 인간은 그 기억 안에 있다.
1. 인간은 동물이다(다윈)
우리는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아도 1의 가정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연장물(延長物)로서의 2의 가정을 이해한다.
2. 동물은 기계이다(데카르트)
데카르트는(Descaarte) 동물의 인지적 기능을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만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각각 연장과 사유의 속성을 가진 것이라 했다. 곧이어, 사유하는 정신도 결국은 두뇌의 기능일 뿐이라는 기계론의 주장이 나왔다.
3. 그러므로, 인간은 기계이다(라 메트리)
그러나 3의 결론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꺼려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도덕적이며 정신적 가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마치 인간을 물질 세계와 독립하여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여긴다.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해묵은 것이고 기계라고 해도 도덕적인 규율의 적용을 받게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의 특유한 위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믿어 왔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을 기계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다윈(Darwin)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처럼 아마도 심한 거부감을 느낄런지도 모른다. 동물에 대한 선입관과 마찬가지로 기계에 대한 선입관 또한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인공지능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기계 개념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영리한 기계’(smart machine)이다.
비 생물학적 인간학
우리는 이미 ‘컴퓨터 문화’나 ‘기계 문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은 일상의 삶에 이미 참여 하고 있다. 정신적 가치는 아마도 문화적 가치라 해야 될 것 같다.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정서를 경험하며,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독립적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된 것은 1956년이다. 맥카시(J.McCarthy), 민스키(M. Minsky), 사이먼(H. Simon), 뉴웰 (A. Newell) 등이 인간처럼 지능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는 모임에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드레퓌스(H.L. Dreyfus)는 인공지능 구성 철학은 “지능은 어떤 원리에 의존한다”라고 본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플라톤, 홉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쯔 등을 거쳐 사이먼과 뉴웰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해결해야 될 난제에 대한 해답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사람이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의식(Consciousness)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기술적인 발전만으로는 인공지능이란 목표를 달성하는데 단 한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과학자들은 토로한다. 따라서 넘어야 될 첫 번째 장벽은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서 철학은 인식체계를 탐구하는데 유용한 도구다. 철학이 곧 지혜를 뜻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철학과 지혜는 적어도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지혜에는 역사가 없다. 반면 철학에는 하나의 역사, 우리가 공유하는 역사와 삶이 존재한다.
인지과학에서 인공지능까지
마음이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철학,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논리학, 수학, 신경과학 등을 포괄하는 다학문적 인지 과학이 탄생했다. 인지 과학은 마음, 컴퓨터, 두뇌를 대상으로 한다. 언어는 인지의 주 도구이며 형식이다. 언어 처리과정이 인지 과학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언어학적 연구가 요구된다. 인지는 인간이라는 종과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위에서 축척되었고 공유되어왔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로 귀결되며 점점 고도화되어 가는 인공지능 활용과 관련되어 발생하는 윤리적, 종교적, 사회적 문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공지능은 앞으로 도래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의 삶에 참여하고 있다.
마음의 과학이라 불리는 인지 과학은 라캉에 의해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영역을 구조론적 언어체계로 설명함으로서 과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명제에서 무의식의 존재 방식이 언어의 존재 방식과 같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캉은 거울을 이용한 실험에서 아이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능력에 있어 침팬지보다 못한 나이일 때에도 아이는 이미 거울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타자로 인정하면서 허구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혀 흥미를 느끼는 인간의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허상임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침팬지와는 큰 차이가 있음을 목격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언스’에서 “인간이 수 만년전 미천한 존재에서 지구전체 구석구석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절대 정복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침팬지와 다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사회 구성원들이 믿고 공유하는 능력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침팬지는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믿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반면, 인간의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수 있는 능력(예를 들면, 산너머에 사자가 있다, 어디가면 맛있는 열매가 있다)이 오늘날 호모 사피언스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 신앙, 종교가 호모 사피언스를 만들어 낸건 맞다.
현재 인간은 고유하고 특별한 자신들만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비생물적 존재인 인공지능과 공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바람이 현실화되어 눈앞에 인공지능의 기술을 응용한 제품들이 나타나면서 인간과 같은(혹은 능가하는)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인지 과학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물론 수 억년 간의 진화로 얻게 된 지능을 겨우 몇 십년 간의 연구로 모의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일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오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기계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짓는 것이다. 인간은 지능으로 인해 오늘날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고, 만물의 영장이라 불릴 만큼의 우월감과 여타의 다른 생물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과연 인간은 특별한 존재인가?
데카르트(Descaarte)는 동물의 인지적 기능을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만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각각 연장과 사유의 속성을 가진 것이라 했다. 지금까지 현대 과학은 동물들이 신나는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위협 당하면 두려워하고, 어미 곁에서 떨어지면 애타게 우는 행위를 단순히 ‘반응’이라 여겼고, 다만 인간이 그 반응 행동에 인간의 감정을 투사해 감정언어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다. 인간이 아닌 다른 포유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1990년대 말 에스토니아 출신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야크 팬크세프(Jaak Panksepp)였다. 그는 기쁨과 슬픔 등 원초적 감정은 대뇌 피질이 아니라 뇌의 하부(혹은 심부)에서 작동하며, 인간의 뇌는 750만 년 전 파충류에서 포유류가 진화한 이래 모든 포유동물이 그 원시뇌를 공유하고 있다고 밝혀지면서,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비교하여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불과 “5만년 전만 해도 동물세계에서 별 볼일 없던 호모사피엔스는 어떻게 지구라는 행성의 절대 강자가 되었을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아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성이야 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본질적 특성’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이성적 인간학’이 태동한다. 이성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는 점은 부인하긴 힘들지만, 문제는 인간은 항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이성적 사고와 행위를 시도할 때도 비이성적 요소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한다. 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 그의 자답은 간결하다. “그렇다”라고, 여기서 슈뢰딩거는 ‘안다’는 말 대신 ‘믿는다’는 말을 쓰면서 “그것은 경이로운 생명 현상에 대한 직감이며 느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정신은 고귀한 기능이지만 물리적 토대 없이 존재하기 힘들며,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발현은 본질적으로 형이하학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영혼이 없다고? 그저 뇌의 생물학적인 기저일 뿐이라고? 죽으면 끝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간 정신은 더없이 위대하고 고귀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뇌라는 물질 또한 정신을 만들어낼 만큼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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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연 박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암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소와 대학에서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 탐구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