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16)
제13강 무엇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줄까?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철학 이야기)
들어가는 말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온 말이고 지금도 가끔은 다시 생각해 보는 말입니다.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잊을 만 하면 거듭해서 묻는 화두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신은 ‘신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짐승 또한 ‘짐승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지만 유독 인간만은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며 자아를 성찰 합니다. 반성이나 성찰이란 어제를 돌아보며 과거를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래, 내일을 어제나 오늘 보다는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몸부림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대단히 많습니다. 옷, 집, 음식, 생각, 언어, 과학, 정치, 다양한 문화와 종교 등등 참 많습니다.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면서 ‘이성’ ‘덕’ ‘포용’ 그리고 ‘중용’ 같은 것들에다 촛점을 맞추어 보면서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금년 1월에 도서출판 ‘낮은 산’에서 낸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는 같은 제목의 다른 책들에 비하여 최근에 나온 책으로써 꼭 한번 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사상의 제일 주제는 ‘이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학문과 일과 놀이를 포함한 역사와 인생의 길에서 펼치어지는 일체의 모든 인간 행위는 다 ‘이성적’ 작업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입니다’ 그에 의하면 학문만이 이성적 작업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는 일들은 다 이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본 프레임입니다. 그에 의하면 학문을 하는 것은 물론 이성적 작업입니다만 그러나 꼭 공부나 연구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밥 먹고 잠자고 일하고 쉬고 놀고 섹스를 하는 것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등등, 심지어는 싸움이나 전쟁까지도 모두 다 이성적 작업입니다. 우리는 흔히 공부는 머리를 써서 이론적, 논리적, 과학적으로 하지만 노는 것(운동)이나 먹고 자고 일하고 싸우고 섹스를 하는 일들은 그냥 감각적, 혹은 충동적으로 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되는대로 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성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인간은 섹스도 이성적으로하고 노는 것이나 일하는 것이나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심지어는 싸우고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도 이성적으로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처음 저는 오늘의 제목을 ‘공부와 일과 노는 것 중에서 무엇이 가장 쉬운 일입니까?’라고 붙였다가 다시 고쳤습니다. 정답은 ‘다 똑같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은 한결같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분석적이고 종합적이어야만 하는 ’이성적’인 행위들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이성적 작업이지만 일하는 것과 노는 것도 모두 다 이성적 행동들입니다. 공부는 어렵고 노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공부도 이성적 노력이지만 노는 것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어렵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출생과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라는 의사의 아들로 트리키아지방의 Stageira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넓리 마케도니아라고 불리우는데 그 곳 사람들은 주로 목축업을 했기 때문에 아테네인들이 보기에는 야만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의 시의였습니다. 이 필립포스 2세의 아들이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입니다. 영어로 흔히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라고 부르는 이 사람이 훗날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인도까지 세력을 넓혀 그리스문명을 동서양에 퍼뜨린 유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친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나이 20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어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지중해 지역의 모든 나라들을 평정하고 동으로는 인도, 남으로는 이집트까지 점령하여 헬라제국을 건설하고 정복지마다 그리스 문화를 심고 동·서 문화를 교류시키고 경제, 무역, 교통,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탈 문화를 접목시키고 헬렌이즘(Hellenism)을 꽃피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살 때 고향을 떠나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Akademia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플라톤이 죽기까지 20여년 동안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플라톤 사후 약 3년간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로 일한 후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스승의 ‘아카데미아’와는 별도로 ’리케이온’(Lykeion)이라는 자신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원전 335년경 아테네의 아폴론 신전 근처 숲 속에 세워진 이 철학학교는 아테네의 4대 학교중 두 번째 학교였으며, 교수와 학생들이 숲속을 거닐면서 강의와 질문을 함께하는 토론식 공부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의 토론식 교수법인 Tutorial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특히 리케이온에는 서구 최초의 도서관을 세워 많은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심지어는 동물원까지 만들었습니다. 주로 야외에서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강의와 질문을 했다고 해서 ‘페리파토스’ 즉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불리우는 리케이온에서는 철학이나 논리학, 수사학, 윤리학, 미학, 시학만이 아니라 물리학, 식물학, 동물학, 정치학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을 통털어 서양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Wemer Jaeger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는 3기로 나누어집니다. 제1기는 아카데미아 시절입니다. 플라톤의 제자로써 철저히 플라톤을 추종하던 시절입니다. 제2기는 과도기요, 편력기입니다. 플라톤 사후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사상들을 접하고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을 넓히던 시절입니다. 그 기간에 퓌티아스와 결혼도하고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니코마코스’라고 지었는데 이것이 훗날 아들과의 대화체로 엮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되었습니다. 제3기는 마침내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교를 세우고 강의하면서 저술 활동을 한 마지막 12년입니다. 리케이온에서는 주로 오전에는 상급반 학생들을 위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제1철학인 형이상학과 논리학이 주요 과목이었습니다. 오후에는 기초과목을 가르쳤는데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같은 것들을 공개강좌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대부분이 여기에서 진행했던 강의의 초고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
그의 수많은 강의록들은 9세기 이후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서 출판이 되었는데 제1부는 ‘오르가논’(Organon)이고 제2부는 ‘물리학’(Physics)입니다. 이중 제1부 오르가논은 주로 형이상학적 내용들이고 제2부는 형이하학적 도서들입니다. 중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흥기였고 그때 그의 모든 저서들은 거의 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와 아람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의 ‘논리학’에는 범주, 명제, 분석론, 변증론 같은 것들이 있고 ‘자연과학’에는 자연학, 천체학, 기상학, 동물학, 영혼학, 생성과 소멸, 생각과 기억, 꿈과 깨어남,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정치학, 시학, 수사학 등 방대한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대 공로
그는 서구에서 처음으로 ‘학문‘(Wissenschaft)의 기초를 세운 사람입니다. 학문의 정의, 학문의 분류, 학문의 방법론 등을 가다듬었습니다.
1. 학문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학문, 혹은 학문연구란 개인, 사회, 자연에서 나타나거나, 경험 되거나, 감정으로 느껴지거나, 이성으로 판단되는, 그 어떤 현상, 운동, 행위, 경험, 사유, 판단, 주장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연구, 증명, 설명, 토론, 정리, 정돈, 응용하는 인간들의 일체 이성적 행동이다’ 그에 의하면 학문이란 자연과 사물과 역사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성적 접근입니다.
그런데 학문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아가는 어떤 ‘과정’입니다. 학문이란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학문을 획일적으로 정의하여 마치 어떤 종교적 신념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학설이나 주장에 대하여 타협 불가능한 확신을 갖고 불변의 진리로 고정 시킨다면 학문하는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학문이란 진리를 찾아가는 영원한 지적 여행입니다.
2. 학문의 분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학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상계입니다. 즉 5감으로 경험되는 현상계를 다루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形而下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Physics, 곧 물리적 세계인 자연현상을 우선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학, 물리학, 화학, 기하학, 천문학, 지리학을 비롯하여 의학, 농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법학 등등 인간의 삶에 대한 제반 학문들이 여기에 속합니다(초기 형이하학은 인간 삶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그리 넓게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은 지나칠 정도로 세분화되어 오히려 학문적 융합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 곧 현실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 연구분야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나타나지 않은 이면의 세계’ ‘본질의 세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形而上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런 종류의 학문을 Physics 뒤에다 두고 Metaphysics라고 불렀습니다. ‘Physics 뒤에 오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그리 명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물리학 뒤에 오는 학문’ ‘물리학 이면에 있는 세계’로써의 형이상학을 ‘제일철학’(Proto philosophia)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5관으로 경험되지 않는 이면의 세계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存在論입니다. 그는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를 문제 삼은 최초의 철학자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의 존재론입니다. 훗날 20세기가 되어 하이덱거는 그의 ‘Sein und Zeit’에서 서구 2천년 역사에서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나타난 유일한 철학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 학문연구의 기본적 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것이라고 여겨지는 학문연구의 기본적 틀을 정리해 보면 다섯가지입니다. 첫째, 그것이 Logical 하냐? 즉 논리적이냐? 말이 되는 소리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이 Reasonable 하냐? 즉 이유가 타당하냐? 합리성을 지닌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것이 Scientific 하냐? 즉 학문적이냐? 과학적이냐? 하는 것을 묻습니다. 넷째, 그것이 Analytic 하냐? 즉 논리적으로나 실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냐?를 질문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그것이 Synthetic한가? 즉 종합성을 지녔는가? 종합이 가능하냐?를 묻는 것입니다. 학문연구의 이런 기본적 틀, frame은 계몽주의시대 이후 더욱 강화되었고,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몇 가지나 충족 시키느냐에 따라서 ‘학문의 학문성’을 점검하는 척도와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4. 학문의 방법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업적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부분은 ‘학문하는 방법론’을 확립한 것입니다(Methodology of Science). 그는 모든 학문들(물리학, 천문학, 기하학, 생리학, 의학, 정치학, 수사학은 물론이고 철학, 심리학, 미학 등등)에는 어떤 통일된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개별 과학들을 관찰, 연구, 분석할 때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도구’(tool)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논리’(logic)라는 ’연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논리학’을 학문의 방법론으로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연역법적 방법론’(Deductive Methodology)입니다. 흔히 ‘삼단론법’(Syllogism)이라고도 합니다. 연역법은 학문을 연구하고 논리를 전개할 때 어떤 추론, 혹은 가설이나 전제를 제시하고 거기에서부터 어떤 결론을 만들어 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1)명제1. ‘모든 사람은 죽는다’ 2)명제2.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3)명제3.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 여기에서 명제3, 즉 ‘소크라테스는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명제1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명제2인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가 아무런 이상이나 잘못이 없는 ‘참된 전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1)명제1. ‘모든 사람은 죽는다’ 2)명제2. ‘예수는 사람이다’ 3)명제3. ‘그러므로 예수는 죽었다’(이 경우에는 명제1과 2가 아무런 이상이나 잘못이 없는 참된 전제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1)명제1. ‘모든 권력은 악하다’ 2)명제2. ‘문재인도 권력자 중 하나다’ 3)명제3. ‘그러므로 문재인의 권력도 악하다’ /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의 참된 전제가 되는 명제1과 명제2를 ‘알케’(arche) 즉 모든 것의 기본이요, 근본인 ‘제 1원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명제3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명제1과 명제2가 모순이 없고 참된 전제들이 되어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럼 명제1과 명제2, 즉 알케가, 제 1원리가 ‘참되고 바르고 틀림이 없는 명제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선험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성 속에는 경험해 보지 않아도, 태어나기 전부터 아는 어떤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흔히 ‘선험적’(a priori) 지식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모든 권력은 악하다’ ‘문재인도 권력은 쥔 사람이다’ 하는 것은 꼭 배우고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타고난 이성적 능력으로써 알게 되는 ‘선험적 지식’이라는 것입니다(논리학에서 이런 연역적 방법론과 대비되는 방법론이 Francis Bacon이나 John Stewart Mill 같은 철학자들이 세운 ‘귀납적 방법론[Inductive Methodology]입니다. 이는 사물의 현상들에 대한 계속적 관찰을 통하여 보편성을 증명해 내는 방법론인데 요즘은 자연과학에서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들이 데이타 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5. 학문의 체계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상기한 학문의 정의나 분류나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와 방법론 못지않게 학문을 체계화한 점에서 대단히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는 모든 사물과 사상에는 계층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층 분류를 체계화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A.여기 자연계가 있습니다. 그 자연계는 1)움직이는 것들을 다루는 동물계와 2)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을 취급하는 식물계가 있습니다. B.움직이는 것들을 다루는 동물계는 1)육지에서 움직이는 것들 2)물에서 움직이는 것들 3)공중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식물계에는 1)일년종과 2)다년종이 있습니다. C.육지에서 움직이는 동물들은 다시 1)걸어서 다니는 것들 2)배로 기어서 다니는 것들과 3)물에서 헤엄쳐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물 속에서 다니는 물고기들을 보면은 1)비늘이 있는 것이 있고 2)비늘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모든 사물과 학문을 계층적으로 분류하여 체계화 했습니다. 이런 논리 체계를 우리는 흔히 ‘범주’(範疇 category)라고 합니다. 범주란 인간의 사고와 생각의 유형(typology)을 이르는 말입니다. 학문이란 무턱대고 열심히 관찰, 연구, 분석을 하거나 생각만 많이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카테고리에 따라서 진행할 때 하나의 학문이 형성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9가지의 범주를 지니게 된다고 했습니다.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상태, 소유, 능동, 수동 등이 ‘존재의 존재하는 방식’을 규정한다고 본 것 입니다. 이것은 자연과학 만이 아니라 문사철을 포함하는 인문학, 신학, 사회과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중 가장 중요하고 또 훗날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Dualism)을 거부하고 ‘일원론’(Monism)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데아와 현상은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 속에는 그 사물의 이데아가 본래부터 들어와서 함께 공존한다’는 말로 요약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던지(예컨데 책상, 의자, 나무, 꽃, 자동차, TV, 컴퓨터, 전화, 교수, 학생, 사람은 물론이고 삼각형, 사랑, 진리, 정의, 평화 등등 무엇이든지) 나타난 하나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그 속에는 그것의 실체요, 본질적 속성인 이데아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데아와 사물은 별개로,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쳐 ‘하늘에 있던 이데아를 개개의 사물들 속에서 발견해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늘에 있던 진리를 사물의 실체인 땅으로 끌어내린 사람입니다. ‘이데아는 절대로 사물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아는 개별적 사물 속에 이미 내재되어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책상 속에는 책상의 이데아가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의자, 꽃, 나무, 새, 집, 자동차, 컴퓨터, 전화기, 교수, 학생, 사람도 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그렇게 불리우는 데는 이미 그것의 이데아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라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존재하는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일 뿐입니다. 우리가 플라톤을 ‘이상주의자’(Idealist)라고 부르고,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실주의자(Realist)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데서 연유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티칸에 있는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린 ‘아테네 학당’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에 나타난 54명의 철학자들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토론을 벌리고 있는 이 프레스코 그림의 한 가운데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플라톤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원론을 주장했던 이상주의자 플라톤과 일원론자요, 현실주의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들의 사상이 아주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원론,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계를 나누어서 보는 이분법적 시각을 버렸습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앞서가신 선배라고해서 그냥 무조건 추종만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사용했던 ‘이데아와 현상’이라는 분리된 두개의 개념을 ‘질료와 형태’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었습니다. 그는 질료가 형태이고 형태가 질료라고 보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나타난 형태 속에는 이미 그것의 질료가 들어와 있고 그 어떠한 질료이든지 질료는 형태로 변형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럼 질료란 무엇입니까? 질료란 형태를 형태되게 하는 잠재력이며 가능태입니다. 형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질료가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질료따로, 형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하나’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밥이란 형태가 있습니다. 밥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쌀이라고 하는 질료가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은 쌀이라고 하는 질료와 밥이라고 하는 형태의 결합입니다. 밥 속에는 쌀이 있고 쌀은 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란 영, 혹은 혼 이라고 하는 질료와 몸, 혹은 육이라고 하는 형태가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영 없는 육이란 없는 것이고 육이 없으면 영도 없는 것입니다. 학교란 무엇입니까? 학교란 교육 혹은 연구라는 질료와 교실, 혹은 연구실이라는 형태의 결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질료들, 예컨데 책상의 질료, 의자의 질료, 나무의 질료, 밥의 질료, 사람의 질료 등등 모든 질료는 처음부터, 원천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거나 변화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태’(Potentiality)라고 부르고, 그 가능태가 결국은 현실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태’(Actuality)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질료에서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가르쳐 ‘운동’(Movement)라고 했습니다. 약간 어렵기는 하지만 조금 더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에서 형태로 변화하는 이 ‘운동’에는 어떤 원인과 목적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원인이나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입니다. 그는 여기에는 네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흔히 ‘四原因說’이라고 합니다. 1) 質料因(Material) –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2) 形態因(Foma) – 그것은 어떤 모양을 이루고 있는가? 3) 動力因(Causa Efficiens) – 그것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이루어지는가? 4) 目的因(Causa Finalis) – 도대체 그것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 예컨데 여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 과일 셀러드가 있습니다. 1) 이 셀러드의 질료인은 야채가게에서 사온 과일과 채소입니다. 2) 이 셀러드의 형태인은 보이는 그대로 아름답고 좋은 셀러드입니다. 3) 이 셀러드의 동력인은 늘 우리를 위해서 헌신 봉사하는 김동숙 선생입니다. 4) 이 셀러드의 목적인은 우리 인문학교실 참석자들을 섬기고 함께 기쁨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플라톤의 이원론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그의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바꾸어 갔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훗날 중세철학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갔던 오리게네스(Origenes)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같은 초기 교부 철학자들은 신앙과 계시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그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스콜라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자,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하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가능태가 현실태로 가는 데는 최종적 목적이 있고, 모든 질료들이 형태로 바뀌어지는 데도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세상에는 목적 없이 하는 일도 없고, 목적 없이 일어나는 운동도 절대로 없습니다!’ 왜 보이지 아니하는 질료는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고, 쌀은 밥이 되고, 과일은 셀러드가 되고, 쇠덩어리는 자동차가 되고, 나무는 의자가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인간과 사물들과 세상은 쉬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마디로 ‘모든 운동과 변화의 최종적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운동과 변화의 최종적 목적지는 행복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우리들 대부분도 동의합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든 사회나 공동체적으로든 행복을 목표로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만들고 부시고,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자고 깨고, 활동하며, 정치하고, 연구하는 등 경제활동, 정치행위, 사회생활, 문화생활, 종교생활을 하는 등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을 알아야지 행복할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오해나 실망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란 보통 우리들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행복’에 앞서서 먼저 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德’(virtue)입니다. 그리스말로는 ‘아레테’(arete)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아레테’를 이루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말로 단순하게 ‘德’이라고 번역하기에는 포괄적인 뜻을 담고 있어서 그냥 ‘아레테’라고 하겠습니다. ‘아레테’에 대해서는 이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레테’를 ‘옳바른 앎’이라고 했습니다. 옳바른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무지에 대한 인식’입니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대의 덕이란 곧 자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아는 것이며 ‘I know only one thing that is that I know nothing’이라고 고백하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자신을 안다는 것’ ‘자신이 무지한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은 단순한 겸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지한 존재요 나란 존재는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드는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플라톤은 ‘아레테’를 ‘지혜와 용기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상적 철인 통치 국가인 ‘폴리테이아’를 꿈꾼 플라톤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 이 3가지 덕목은 개인만이 아니라 이상국가 전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레테’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생퉁한 개념을 꺼냈습니다. ‘아레테는 노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선에 서있는 철학자’라고 불리웁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상식선에서 ‘노력’을 이야기 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 장부터 그는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 최선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인간 의지의 가장 옳바른 태도는 ‘노력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어떤 일의 최종적 승패와 관계없이 과정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일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 노력에도 ‘무엇을 위한 노력이냐?’하는 물음이 제기 됩니다. 악과 불의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과연 아레테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이성적 존재가 되려는 노력만이 아레테이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때 그는 아레테를 이루어 갈 것이며 국가적으로는 그 정부나 권력이 ‘선해지려고 노력’할 때 참된 아레테에 접근해 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구한 ‘이성적 인간’을 향한 그들의 공통적 꿈과 이상이 드러납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결같이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하고 이성적 존재가 되도록 설득하고 이성적 존재를 지향하도록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이성적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레테다’ 헬렌이즘의 공통적 지향점은 ‘이성’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은 노력하지 않고 그냥 은총으로 주어지는 신앙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끊임없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고 행동할 때 마침내 행복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레테’를 ‘이성적 존재가 되려는 노력뿐 만이 아니라 그 이성의 능력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이 본래의 목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두 말 할 필요없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에게는 그 사물 자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표와 기능이 있습니다. 자동차는 사고 없이 잘 달리는 것이 자동차의 아레테이고 사과는 잘 익어서 먹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사과의 아레테이고 볼펜은 글씨를 잘 쓰게 하는 것이 볼펜의 아레테입니다. 그럼 인간의 아레테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침이 없습니다. ‘이성적 사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인간의 아레테, 인간 최대의 덕이다’ ‘누가보다 더 이성적인가?’ 여기에 따라서 인간의 아레테가 들어나게 되고, 인간의 행복이 결정되고, 인간이 인간 아닌 다른 존재와 구별된다는 헬라철학의 본 모습, 헬렌이즘의 본색이 확실하게 들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이성이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를 하나 제시했습니다. ‘중용’니다. ‘치우치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그는 ‘중용과 일치하는 이성’ ‘이성의 통제 아래 있는 중용’을 말합니다. 물론 중용이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면서도 正道를 걷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에서, 인색함과 낭비성 사이에서, 교만과 겸손 사이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복종과 저항 사이에서, 있음과 없음, 존재와 비존재, 희망과 좌절, 믿음과 회의 사이에서, 우리는 중용의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혜와 용기, 선택과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중용에서 제일 크게 요구되는 덕목은 관용입니다. 톨레랑스(Tolerance)입니다. 너그러움입니다. 지난해 한국에서는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지난날 저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나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고 함께 나가겠습니다’ 톨레랑스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이는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포용, 관용, 너그러움이 너무도 어려워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이는 오히려 적패청산이라는 깃발을 들고 포용(inclusiveness)이 아닌 배타(exclusiveness) 혹은 보복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나의 승리는 나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실패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 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길은 아무나 갈수 있는 길이 아닌가 봅니다. 저의 개인적 삶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게 되어서 많이 죄송합니다. 저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종교에서는 인간이란 하느님에게서 사랑, 용서, 자비, 호의, 긍휼을 받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걸 그들의 종교적 용어로는 ‘은혜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미 관용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 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부족한 제가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 인생에서 중요한 삶의 태도로 중용, 겸손,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면서 될수 있는대로 너그럽게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태도도 이 종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중용, 관용, 너그러움, 톨레랑스에 있다는 교훈을 귀담아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용의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고민, 고통, 아픔이 따라옵니다.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의 확신을 고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중용이란 결국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항복을 선언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인문학의 종착역은 자기성찰입니다. ‘인생이란 죽을 때까지 고뇌와 갈등, 고민과 쓰라림으로 부터 해방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늘 말씀드려왔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민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답게 산 사람이요 인생을 훌륭하게 산 사람입니다’ 고민하는 것이 어렵다고해서 무슨 일을 너무 일찍 결정하지 않도록 제발 신중하게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맺는 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마지막은 윤리학을 지향합니다. 인간의 삶과 행위를 문제 삼습니다. 사실 그는 학문을 체계화하고 방법론을 만들고 논리학을 세웠습니다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데’ 그의 학문적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표는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레타(덕)가 있어야 한다. 아레타란 무엇이냐? 그건 노력이다. 무슨 노력이란 말이냐? 이성적 존재가 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가 될 때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이성적 존재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한다. 그는 중용의 길을 간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입니다. 인문학 친구 여러분! 행복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 인간이란 진정 이성적 존재라고 확신하십니까?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성적 판단의 결정이라고 믿으십니까? 인간 세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움직인다고 보십니까?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난 후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존재는 진정으로 행복할까요?’ 지금 우리 시대는 무너진 이성에 대한 신뢰 때문에 ‘냉소주의’에 빠져서 그 무엇도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는 허무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부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노는 것은 그래도 공부하는 것 보다는 쉽고 덜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Comments & Question
▷Sharing – 자신의 인생관 나누기 / 자신의 인생관을 이루어가기 위한 삶의 태도 소개해 보기 / 정해 놓은 내 인생의 목표로 이루어 가는데 어렵고 힘이 드는 이유 찾아보기 / 무엇이 과연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일까요?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