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Sacrum Romanum Imperium, 800 / 962 ~ 1806)
신성 로마 제국 (라: Sacrum Romanum Imperium)은 중세 초기에 형성되어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중앙유럽에서 발달한 다민족 (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독일계) 영토복합체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복합체를 구성한 영토 가운데 중 가장 큰 게 독일 왕국이었고, 그 외 왕국으로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 등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제국이라 불렸고, 또 고대 로마의 전통 보존자인 그리스도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 (神聖)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로써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이라 불렸다.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3세기 동안 공석이었던 서유럽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카롤루스 왕조 서로마 황제 제국은 8세기까지 지속되다가, 이탈리아 지역에서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잇따른 끝에 924년 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가 죽으면서 단절되었다.
962년 오토 1세가 황제로 대관하고 프랑크 왕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서유럽 제국이 부활했고, 이후 8세기 동안 제국이 지속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을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라고 여겼고, 또다른 역사학자들은 오토 1세의 대관이 시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현재의 학자들은 대개 신성로마제국을 이루는 제도와 원칙들이 한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발달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말은 13세기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권이양론에 따라 로마 황제로부터 계승된 최고권력인 주권을 소유하는 것이 황제의 특권이라는 개념은 계속 유지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는 원칙적으로 선거군주였으나, 대개 왕조를 이루며 특정 가문에서 계승되었다. 제국의 최고위 귀족인 독일 선제후들이 누군가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면, 이후 교황이 로마인의 왕에게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씌어주는 식으로 대관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6세기부터 교황의 대관 전통은 거의 단절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이 중앙집권을 향해 발달한 것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수백 개의 왕국, 공국, 후국, 백국, 자유시 등의 영방국가들로 이루어진 분권화된 제한적 선거군주국으로 발전했다. 신성 로마 황제의 권력은 제한적이었고, 여러 공작, 후작, 백작, 주교후, 시장들은 명목상 황제의 제후였지만 자신의 영토 안에서는 사실상의 독립적 지위를 누렸다. 1806년 8월 6일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라인 동맹을 만듦과 동시에 신성로마황제 프란츠 2세 (Franz II, 1768년 2월 12일 ~ 1835년 3월 2일)가 제국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 기구

기구로는 선제후, 마르크그라프, 제국제후, 제국의회 등이 있다.
.선제후: 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諸侯).
.마르크그라프: 프랑크왕국과 중세 독일제국에서 마르크(Mark:邊境區)의 행정을 담당한 지방관.
.제국제후: 슈타우펜왕조의 신성로마(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재위 1152∼1190)는 6차에 걸친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레냐노 전투에 패하여 화의를 맺었다. 유력한 제후(諸侯) 작센공(公) 하인리히 사자공을 추방하고 봉토(封土)를 몰수하여 제국제후(帝國諸侯)의 시대를 열었다.
.제국의회: 신성로마제국의 의회. 1356년에 신성(神聖)로마 황제인 카를 4세(재위 1347~1378)가 뉘른베르크 및 메츠의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발포한 제국법(Golden Bull of Emperor Charles IV)으로 금인칙서가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원수(元首)는 황제였는데, 황제라는 칭호는 로마시대 이래의 세계 지배자, 광대한 지역지배자라는 이념과 결합되어 한 지역의 지배자에 불과한 국왕보다 차원(次元)이 높고 또한 영광의 지위로 여겼다. 황제는 독일 국왕이 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고, 독일 국왕에 선출된 자는 아헨에서 국왕 대관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례가 계속된 것은 15세기까지였으며, 1508년의 막시밀리안 1세의 황제 즉위 때 이후로 로마에서의 교황에 의한 대관식 거행의 관례는 없어지고 아헨에서 국왕 대관을 끝낸 독일 국왕은 즉시 황제의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독일 국왕의 지위는 혈통자에 의한 상속과 제후(諸侯)들에 의한 선거라는 두 가지 원리가 결합한 절차를 밟고 선정되었다. 즉, 전(前)국왕의 혈통 상속자가 제후의 선거에 의해 새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국왕 선거인은 처음에는 일반 제후였으나 그 후 소수의 제후로 한정되었다. 즉, 1273년 이후에는 마인츠·쾰른·트리엘 등 세 대주교와 프파루츠 백작, 보헤미아왕, 작센공(公), 브란덴부르크 변경백(邊境伯) 등 7명으로 한정되어, 이 7선제후제(七選帝侯制)는 1356년의 금인칙서(金印勅書)에 의해 성문화되었다.
황제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는 전통적으로 독일·이탈리아·부르군트(오늘날의 프랑스 동부와 스위스에서 지중해안의 프로방스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영역은 관념적인 것으로, 실제적으로는 황제가 이탈리아와 부르군트를 지배한 일은 거의 없었고, 계속적으로 지배하였던 지역은 독일뿐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지배권이 덴마크·폴란드·보헤미아·헝가리 등까지 미쳤던 시대도 있었다.

독일제국의 최고관직으로는 대재상(大宰相)이 있었는데, 이 독일의 대재상에는 마인츠 대주교가 취임하였고, 이탈리아의 대재상에는 쾰른 대주교가, 그리고 부르군트의 대재상에는 트리엘 대주교가 취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제국 관방(官房)의 일상업무를 취급하는 관료로 궁상(宮相)이 있었으며 재판업무를 수행하는 제국 궁정재판소가 있었다.
지방영주(領主)의 전체회의로서 제국의회가 있었고, 이 제국의회에 출석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을 제국제후라 불렀다. 또한 행정조직과 제국의회는 형식적인 것으로서 중앙집권제의 근대국가에서 명확한 직무 내용을 가진 직제와는 달랐다. 황제는 자기 집안 소유의 영지를, 그리고 지방 영주는 각자의 소유 영지를 서로가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실체(實體)였다.
중세의 독일 국가는 봉건국가로서 지방영주는 각자의 봉건영지를 자신을 위하여 지배하였고, 황제에게는 개인적 봉건계약에 의해 종속관계를 가졌다. 황제에게 직속한 지방영주를 제국제후라 하였으며, 1180년 프리드리히 1세 때에 제국제후의 제도가 정비되어, 백작이나 남작 등은 배신(陪臣:간접적으로 황제에게 종속)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주교나 대수도원장 등의 고급 성직자도 세속적인 영주와 똑같이 황제로부터 봉토(封土)를 수여받고 봉건가신으로서 황제에게 종속되었다.
황제는 각지의 왕령을 관리시키기 위하여 대관(代官)을 임명하였는데 이 대관은 지방대관과 도시대관으로 나뉘었다. 도시 중에서 지방 영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황제에게 직속한 것을 제국도시라 하였다. 제국도시는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직속은 명목적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지방영지라 할 수 있었다.
– 멸망
그리스도교회를 지배하고, 교회지배를 통해 제국 통합의 지주(支柱)로 하였던 신성로마제국 오토 1세의 제국교회 정책은 그 후 여러 황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잘리에르 왕조의 하인리히 3세 시대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교회지배를 황제의 임무라고 확신하고 교황청 내부의 부패를 숙청하여 4명의 교황을 자신의 의사로 임면(任免)함으로써 교회를 완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그러나 다음 대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 시대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독일 국내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여 황제의 교회지배를 배제하기 위한 반격으로 황제와 교황 사이에 성직서임권투쟁(1075∼1122)이 발생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역사상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1077)으로 일단 굴복하였으나 그 후 반격에 나서 다음 대의 하인리히 5세 시대에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타협에 의해 보름스협약(1122)이 체결되어 서임권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12세기 후반에 출현한 같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중세 기사의 전형이라 추앙되는 유능한 군주로서 독일 내부의 국내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이탈리아 지배의 이상에 불탄 황제로서 그의 생애에 6회나 이탈리아 원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는 후세의 독일 민간설화에서 키프호이자의 묘지에서 잠자고 있지만 언젠가는 소생하여 독일을 구출해낼 것이라는 불사(不死)의 영웅으로 믿고 있는 인물이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시대는 신성로마제국의 최고조 시대라 하지만 이 왕가 최후의 프리드리히 2세는 이색적인 황제였다. 그는 어머니가 노르만계의 시칠리아왕이었으므로 상속에 의해 시칠리아왕을 겸하여 시칠리아섬에서 남이탈리아에 걸친 시칠리아왕국도 지배하였다.
그 궁정은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에 있었으며 황제는 그곳에 상주하면서 궁정에 가톨릭문화 외에 비잔틴문화·아랍문화 등을 받아들여 일종의 국제문화를 만들어냈다. 또한 시칠리아왕국의 통치에서 서유럽 제국에 앞서서 절대주의 체제를 만들어낸 것은 독일 제국사(帝國史)에서 이채를 띠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뒤에 시칠리아 왕위는 에스파냐의 아라곤가(家)로 옮겨지고 독일에서는 정통(正統)의 황제가 없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의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가 되었다. 그 후 대공위시대가 끝나고 제위가 독일제후의 각가(各家)를 전전하는 시대가 되었으나 143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가 제위를 계속적으로 계승하는 합스부르크 시대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시대에도 제후가 자기소유의 영지에 할거하는 상태는 여전히 전대와 변함이 없었으며 황제도 오스트리아 왕가 소유 영지의 보존과 확대에 전념하였고, 혼인정책으로 헝가리·보헤미아·북이탈리아로 영토를 확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는 정책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독일의 영방(領邦:지방영지) 군주는 30년전쟁(1618∼1648) 후의 베스트팔렌조약에서 영토 주권자로 규정되어 제국에 적대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 한 외국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도 인정되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대립하여 18세기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서로 우위(優位) 쟁탈을 위하여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미 한 국가로서의 실질적인 의의를 잃고 단순한 형체만이 남은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시대의 국제적 변동의 충동에 의해 최종적으로 붕괴하였다. 1804년 프란츠 2세는 단순히 오스트리아 황제라고 칭하게 되었으나, 1806년 16명의 제국제후가 라인동맹을 조직하여 제국에서 분리하였기 때문에 신성로마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고 제국의 소멸을 선언하였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들

– 카롤루스 왕조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 (루트비히 1세)
로타리우스 1세 (로타르 1세)
루도비쿠스 2세 이탈리아왕 (루도비코 2세)
카롤루스 2세 대머리왕 (샤를 2세)
카롤루스 3세 뚱보왕 (카를 3세)
– 귀도 왕조
귀도 1세
람베르토 1세
– 카롤루스 왕조
아르눌프
– 보종 왕조
루이 3세
– 운로크 왕조
베렝가리오 1세
– 궐위 (924 ~ 962)
베렝가리오 2세
카를 5세
– 오토 (작센) 왕조
오토 1세
오토 2세
오토 3세
하인리히 2세
– 잘리어 (프랑켄) 왕조
콘라트 2세
하인리히 3세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5세
– 주플린부르크 왕조
로타르 3세
– 호엔슈타우펜 왕조
콘라트 3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하인리히 6세
필리프
– 벨프 왕조
오토 4세
–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
– 대공위시대 (1254 ~ 1273)
빌렘 2세 (1227~1256)
리처드 (1209~ 1272)
알폰소 10세 (1221~1284)
– 대공위시대 이후
루돌프 1세
아돌프
알브레히트 1세
하인리히 7세
루트비히 4세
카를 4세
벤체슬라스
루페르투스
지기스문트
– 합스부르크 왕조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페르디난트 3세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
1740.10.20
– 비텔스바흐 왕조
카를 7세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프란츠 1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