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1강의)

기독교의 고전, 『천로역정』 : 본향을 향한 순례의 시작
- 존 번연과 천로역정
기독교 역사에는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읽혀 온 고전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천로역정』, (영.한표기 Pilgrim’s Progress : 天路歷程: 천성으로 향하는 여정기) 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힌 기독교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단순한 신앙 소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하나의 순례 (pilgrimage)로 이해하도록 이끄는 영적 지도라 할 수 있다. 이책을 몇차례 나누워 독자들을 위해 강의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존 번연 (John Bunyan1628 ~ 1688)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였다. 그는 정규 신학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던 목회자였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 (성공회)에 속하지 않은 설교와 예배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은 형식적인 예배와 국가가 통제하는 신앙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개인의 회심, 그리고 거룩한 삶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청교도 설교자들은 국교회의 통제를 거부하였고, 박해와 투옥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감옥에서 존 번연은 한 가지 질문에 깊이 사로잡히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천로역정』이다.
『천로역정』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주인공 ‘기독도 (Christian)’는 멸망의 도시에 살다가 성경 말씀을 통해 그 도성이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깨닫는다. 그는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집을 떠나 순례의 길에 오른다. 가족과 이웃의 만류와 조롱을 뒤로한 채 시작된 그의 여정은 좁은 문, 십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허영의 시장 등 수많은 상징적 장소를 지나며 시험과 유혹, 은혜와 회복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결국 그의 순례는 천성 (天城)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길에서 실제로 겪는 경험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천로역정』은 한국 교회에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소개되었다. 한국 최초의 『천로역정』 번역은 1895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 (James Scarth Gale)과 그의 부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한국 근대 최초의 영한 번역 소설로 기록된다. 해방 이후에도 이 책은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읽혀 왔고, 개인 경건서이자 설교와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특히 이성봉 목사의 『천로역정』 강해는 이 고전을 한국 교회의 현실과 신앙 여정 속에서 풀어낸 대표적인 해석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강해는 『천로역정』을 단순한 상징 해석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슬람 신자들이 일생에 한 번 메카를 방문하는 하즈 (Hajj)를 통해 신앙을 확인하듯, 기독교 신앙에도 순례의 개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천로역정』이 말하는 순례는 특정 장소로의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순례의 길이라는 고백이다.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 일상의 선택, 고난과 유혹 앞에서의 결단 모두가 순례의 일부를 이룬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천로역정』의 주요 장면들을 차례로 살펴보며, 존 번연이 말한 순례의 의미가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 이 길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살아 있는 길이다.
2. 하나님의 부르심과순례 의 시작
(Faith Begins with the Call of God)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기독교 신앙을 ‘순례의 길’로 묘사한 영적 비유이다. 이 순례 여정의 첫 장면은 멸망의 도시에 살던 기독도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장망성을 떠나려 할 때, 가족과 이웃이 그를 붙잡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의 아내는 “당신은 미쳤어요!”라고 외치며 울부짖고, 이웃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워!”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기독도는 귀를 막고 외친다.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믿음의 여정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믿음은 안정과 익숙함을 보존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 순례적 결단에서 시작된다. 『천로역정』은 이 출발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제도나 사상 체계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 시작되어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실존적 여정으로 제시한다. 기독도는 스스로 길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멸망할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Call)이었다. 청교도 신학에서 이 부르심은 흔히 ‘효력 있는 소명 (effectual calling)’이라 불리며,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실제로 깨우시는 구원의 행위를 가리킨다. 청교도 신학자 William Perkins는 이 부르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효력 있는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성령으로 인간의 마음을 여셔서 그 말씀이 실제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역사이다 (Perkins, 1970, Golden Chain, 24 ).”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같은 설교를 듣고도 어떤 이는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어떤 이는 깊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청교도 전통은 이를 설교의 능력이나 청중의 감수성에서 찾지 않고, 성령께서 ‘들을 귀’를 여시는 주권적 역사에서 설명한다. 현대 청교도 연구자인 Joel R. Beeke 역시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효력 있는 소명은 인간의 결단 이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며,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게 된다(Beeke 2011, p.21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기독도의 가족이 그 음성을 듣지 못한 반면 기독도만이 그 부르심을 들었다는 설정은, 청교도 신학이 강조하는 선택과 은혜의 신비를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믿음의 시작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개인의 내면을 향한 실재적 음성으로 임한다. 『천로역정』은 바로 이 신학적 통찰을 한 인물의 순례 이야기 속에 압축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도의 순례는 가족이나 세상적 책임을 무책임하게 포기한 행위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이 땅의 안식을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나은 본향을 향해 삶의 방향을 재정향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히브리서가 말하듯, 순례자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상대화하며 하늘의 성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히 11:16). 기독도는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의 부르심에 더 깊이 순종함으로써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설정한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눅 9:62) 제자도가 결코 값싼 은혜의 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청교도 신학이 이를 ‘제자도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로 이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은혜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삶은 기존의 안전, 익숙함,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실존적 전환을 요구한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란 세상의 만류와 현실적 계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신뢰하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천로역정』은 이 신앙의 구조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믿음은 머무름이 아니라 떠남에서 시작되며, 그 떠남은 도피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순종이다. 기독도의 여정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안주하고 있으며, 어떤 부르심 앞에서 방향을 전환하도록 요청받고 있는가? 청교도 신학이 말하는 순례의 신앙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다시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삶이다.
그러나 『천로역정』은 믿음의 시작을 떠남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길을 나선 기독도는 곧, 떠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근본적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성령의 부르심이 그를 길 위에 세웠다면, 이제 그의 여정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완성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 번연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답을 제시하며, 십자가 앞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을 통해 구원의 본질을 드러낸다. (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Bibliography)
Bunyan, John. The Pilgrim’s Progress. 1678. Repri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 (Cambridge, 1591; rep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23–25.
Joel R. Beeke, Puritan Reformed Theology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1), 219.
존 번연 (지은이),조은화 (옮긴이) .『쉽게 읽는 천로역정』,생명의말씀사2012
존 번연 (지은이),루이스 레드 형제 (그림),유성덕 (옮긴이). 『천로역정』, CH북스,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5.
이성봉 목사 오디오북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XZMHwnMGtKJSRrm8U5b8hUfhYBQNeODX

이상택 목사
(아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