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걷는 기도

걷는 기도 (17)
늦은 저녁 먹장구름,
마지막 여름이 눈을 감듯
폭우로 쏟아져 내립니다.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물의 장막에 가려지고,
우산도 없이 강변을 걷습니다.
폭우는
얼굴과 어깨를 가리지 않고 때리지만
이것은 벌이 아니라
씻김의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지워지지 않던 생각들,
미루어 두었던 고백들,
끝내 말하지 못한 사랑의 문장들이
물속에서 번져 흐릅니다.
강은 이미 불어나
제 몸의 경계를 잊고
흙과 풀과 낙엽을 휘감아 안습니다.
경계란 본디
마른 날의 환상이었음을
물은 소리 없이 증언합니다.
인생이란
맑은 날의 산책이 아니라
이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물의 시간 속을 걷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폭우 속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흐릿해지고
오직 지금,
젖은 발걸음 하나만이 또렷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던
‘던져진 존재’의 감각이
빗방울처럼 피부에 와 닿습니다.
사실은 내가 선택한
시간 속에 던져졌으니
걷는 일만은
지금 여기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가로등마저 희미하여
앞이 선명하지 않지만
여름비 찬기가
무거운 발길을 재촉합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빗물은 눈물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하늘의 슬픔이고
무엇이 나의 회한인지
이제는 묻지 않습니다.
구별이 사라질 때
나는 조금 더 가벼워집니다.
젖은 옷이 몸에 붙고
신발은 진흙에 잠기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생은 결국
젖는 것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젖은 채로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 용기임을
당신의 폭우는 가르칩니다.
마지막 여름이
물의 언어로 나를 통과해 갑니다.
이 비가 그치면
계절은 다른 얼굴로 서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나는
이 어둠 속에서
조금 더 깊어진 강처럼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도
나는 압니다.
강은 결국 바다로 가고,
폭우는 끝내
맑음으로 스며든다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이 젖은 밤을 지나
비 냄새 품고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