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예수는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을 창조했나?
위 글은 단순한 반기독교적 비난이라기보다,
현대 성서비평학과 인문학의 여러 요소를 혼합하여
예수를 “유대교 내부의 혁명가” 혹은
“새로운 신 개념의 창조자”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글은 흥미로운 통찰도 있지만
몇 가지 심각한 문제와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1. 역사비평적 관점
“예수는 야훼를 버렸는가?”
역사비평의 명제적 관심은.
“예수는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이다
이 글은 예수가 구약의 야훼를 부정하고
새로운 하나님 개념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한
대다수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예수는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갔고,
율법을 암송했으며,
시편으로 기도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그래서 예수는
1) 율법을 인용했고,
2) 시편을 기도했으며,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포했고,
4) 유대교의 종말론적 희망 안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예수를 “반(反)야훼 운동가”나
“새로운 신 창조자”로 보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거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비평은 또 하나를 말한다.
예수는 단순히 기존 유대교를 반복한 사람도 아니다.
예수는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하며 전통을 재해석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는 “야훼를 버린 사람”도 아니고
“기존 야훼 신앙을 그대로 반복한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하나님 이해를
급진적으로 새롭게 읽은 예언자적 유대인이었다.
예수가 자주 사용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새로운 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이스라엘의 아버지 하나님”개념의 심화였다.
예수는 야훼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야훼를 독점한 종교 권력에 맞서
그 하나님을 민중에게 돌려준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라는 표현은
역사비평적으로 맥락을 왜곡한 과장된 주장이다.
2. 문학비평적 관점
성서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합창이다
이 글은 구약의 하나님을
“전쟁과 파괴의 신”으로 단순화 했다.
초대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마르키온(Marcion/(AD 85~160경))의 주장과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마르키온의 주장은 급진적이었다
1)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과 율법의 하나님이다.
2) 예수가 계시한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다.
3) 따라서 둘은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4) 구약은 기독교 경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결국 구약을 부정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예를 들어
1) 출애굽기는 해방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2) 호세아서는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3) 이사야는 위로의 이야기이기도 한다.
반대로 신약에도
최후의 심판, 게헨나, 하나님의 진노가 등장한다.
따라서 “구약 = 폭력”, “신약 = 사랑”이라는 구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현대 구약학자들인
월터 브루그만이나, 테렌스 프레타임은
성서 안에 다양한 하나님 이해들이 공존한다고 본다.
성서는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오랜 세월 이어진 신앙 공동체의 대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비평으로 보면.
성서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거대한 합창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에는 심판하는 하나님이 있지만,
동시에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하나님도 있다.
시편에는 전쟁의 언어가 있지만,
또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편)
라는 노래도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외친다.
“나는 제사보다 인애를 원한다.”(호6:6)
예수의 하나님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새로운 신이 아니라,
구약 안에서 오랫동안 흐르던
자비와 정의의 강물을
더 깊고 넓게 드러낸 분이다.
궁극적으로 성서비평학의 질문 하나가 있다.
“과연 출애굽기의 하나님과 욥기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은 완전히 동일한 모습인가?”
실제로 성서 안에서도 하나님 이해는 변한다.
예를 들어
1) 초기 전승에서는 민족신적 성격이 강하고
2) 예언서에서는 윤리적 보편성이 강조되고
3) 지혜문학에서는 존재론적 질문이 등장하며
4) 예수에게서는 하나님 나라의 아버지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즉 성서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발전과 논쟁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현대 성서학은 이것을 계시의 발전
또는 전통의 재해석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윗 글은 구약 전체를
하나의 폭력적 신관으로 환원시키는
문학적 오류를 범했다.
3. 사회학비평적 관점
예수는 종교민주화 혁명가였는가?
위 글은 예수를
성전 체제를 해체한 혁명가로 묘사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실제로 예수는 성전 경제, 정결 체계,
배타적 종교 권위를 비판했다.
그러나 예수의 관심은
단순한 사회혁명에 있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했다.
예수의 나라란?.
정치혁명도, 경제혁명도, 종교민주화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가
새롭게 되는 사건이다.
사회학비평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1) 가난한 자를 우선했고
2) 여성들을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였고
3) 세리와 죄인과 식탁을 나누었고
4) 성전 중심 체제에 도전했다면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이었다
예를 들어 존 도미닉 크로산, 게르트 타이센 등은
예수 운동을 사회적 대안 공동체 운동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사회혁명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문제는 사회학비평의 위험은
예수를 체 게바라처럼 만들거나,
사회운동가처럼 만드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가이면서도 혁명을 넘어선 사람이다.
예수는 제도를 바꾸기 전에
인간의 마음을 바꾸려 했다.
4. 심리학비평적 관점
인간은 어떤 하나님을 원하는가?
위 글은 사실 하나님보다
인간 심리를 더 많이 이야기했다.
인간은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자비로운 아버지를 원한다.
억압 속에서는 해방자를 원한다.
상실 속에서는 위로자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어 내고 싶어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나를 위로하는 하나님” 은 사랑하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은 두려워한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은
단순히 위로자만은 아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며,
부자에게 가진 것을 팔라고 말한다.
예수의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지만,
동시에 우리의 자기중심성도 무너뜨린다.
따라서 하나님을 “따뜻한 아버지”로만 이해하는 것도
또 다른 우상화가 될 수 있다.
5. 철학적 성찰
이 글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의 상징으로만 이해한다는 점이다.
만약 하나님이
시대마다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믿는 셈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전혀 변하지 않는 고정된 교리라면,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박물관의 유물이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예수는 옛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고,
새 하나님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권력과 교리와 욕망 속에 가두어 두었던
하나님을 다시 살아 있는 분으로 드러내셨다.
윗 글의 핵심은 사실 마지막 부분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상징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현대 신학 전체가 씨름한 문제다.
루돌프 불트만은
신화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려 했고,
폴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의 근거”라고 불렀으며,
칼 라너는
인간 존재 깊은 곳에서 경험되는
초월의 신비를 말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은 인간의 투사인가?”
라는 질문과
“하나님은 인간 경험을 초월하는 실재인가?”
라는 질문 사이에서 고민했다.
통전적으로 성서비평학적 관점에서
야훼는 누구인가?
성서비평학적으로 말하면,
야훼는 단순한 전쟁신도 아니고,
예수 시대에 새로 등장한 사랑의 신도 아니다.
오히려 야훼는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공동체가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해석하고 논쟁했던 하나님이다.
그래서 성서 안에는
1) 출애굽기의 해방자 하나님,
2) 아모스의 정의의 하나님,
3) 호세아의 사랑의 하나님,
4) 욥기의 침묵하는 하나님,
5) 시편의 목자 하나님,
6)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이 모두가 함께 존재한다.
성서비평학은 이 다양한 목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듣고자 하며,
조직신학은 그 목소리들 속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찾으려 한다.
따라서 “예수는 야훼를 버렸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성서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증언해 온
하나님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살아내셨는가?”
성서비평학의 관심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끝나지 않은
신앙의 순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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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을 정리하면………
광야에서 천둥처럼 들려오는 전쟁의 신인가?
아니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아이들을 품에 안는 사랑의 아버지인가?
성서는 말합니다.
그 둘 사이에는
긴장과 모순과 신비가 함께 존재한다.
예수는 새로운 신을 창조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잊어버린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보여 주었다.
광야의 불꽃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의 침묵 속에서도,
갈릴리 가난한 어부의 눈물 속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롭게 이해된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롭게 그분을 발견하고 만나는
끝없는 순례인지도 모르겠다.
P/S
이 글을 시드니 인문학모임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담론을
필자는 반론으로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