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우리는 늘 시간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공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시간의 귀중함을 잘 모르며 살아간다. 만약 길거리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몇 시입니까?(What time is it?)”라고 묻는다면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몇 시라고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런데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time?)”라고 묻는다면 매우 의아하고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다.” 라고 했으며, 뉴턴은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며 우주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했다. 반면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시간은 단순히 여러 사건의 순서일 뿐 실체가 아니다.”고 했다. 즉, 열차가 오후 7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시계가 7시를 가르키는 순간 열차가 도착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은 크고 작은 사건이요, 생활은 사건의 연속이라는 의미이다.
누구나 사용하지만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 시간(時間)이라고 한다. 끓임없이 변하고 발전하고 진보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시간이란 중요한 개념이다. 하루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누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능력을 평가받는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헬라어(그리스어)에서 소개하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크로노스(Chronos)는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간(時間)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이름 자체가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시간” 이다. 자연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통해서 결정되는 시간이다. 낮과 밤의 기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의 시간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시간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세슘 원자의 92억번 진동을 1초로 정한 인간들의 측정기능한 사회적 약속의 양적인 시간이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시간 관리를 잘 한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의 시간이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은 의식적으로 주관적인 시간,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기회의 시간이며 결단의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시간은 사람마다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은 하루가 일년보다 길 수 있고, 일년이 하루보다 짧을 수 있는 시간이다. 죽음 앞에 초급을 다투는 응급환자에게는 1시간이란 평상시 생활하는 1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멈춰버렸으면 좋을 정도로 행복하고 아까운 시간이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Kairos)시간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크로노스(Chronos) 시간은 붙잡을 수도,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되어 가치와 효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역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조사(survey)나 탐구(research)에 의한 순수 역사가 있고, 해석이나 뜻으로 본 풀이 역사가 있다. 독일어로 보면 순수역사를 ‘히스토리에‘(Historie)라 하고, 풀이된 역사, 해석되어진 역사 즉 구속사를 ‘게쉬크테‘(Geschichte)라고 한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발생했던 일들을 한 곳에 모아 적으면 역사가 된다. 그것이 개인의 역사라면 전기나 자서전이 된다. 그런데 그 중에 특별히 신앙체험을 모아 적었다면 그것은 간증집이 되는데 간증집은 ‘게쉬크테‘로, 전기는 ‘히스토리에‘로 분류될 수 있다.
곧 ‘크로노스‘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 ‘크로노스‘가 바로 ‘카이로스‘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다름없는 시간으로 따지자면 그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 오늘이라는 주어진 시간에 주님과 함께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시간은 ‘카이로스‘가 되는 것이다.
크로노스(Chronos)라는 시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에게 부어된 흐름이다 그래서 수평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은 ‘생각’을 넘고 ‘죽음’을 초월하는 수직적인 시간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짊어지신 십자가가 수평적인 크로노스(Chronos)의 인간의 시간 위에, 수식적인 카이로스(Kairos)의 하나님의 시간이 만난 사건이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로 969세를 살았지만 그 생애는 단 몇 구절로 그친다. 크로노스 인간의 시간은 매우 길었지만 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간은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예수님의 생애에서 크로노스의 시간은 짧았지만 카이로스적인 하나님의 사건은 가득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복음은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 15)였다. “때가 찾고”에서 “때”가 바로 카이로스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구원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에베소서 5장16절에서도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서 세월을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어떤 선하고 좋은 목적을 두고 가치가 있게 쓰인 시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목적이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그래서 “아끼라”고 한다. 즉 “값을 주고 사라”는 의미다. 댓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댓가를 치르고 그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그렇게 가치 있는 구원의 사건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 크로노스(Chronos)안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Kairos)을 넓여가는 것이 기도요, 찬양이요, 예배요, 전도요, 선교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섬김는 사역이 아니겠는가?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